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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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잖아, 지미. 찬이 연애 생각 없다고 그랬다니까.」
루이즈가 부루퉁하니 내뱉은 말에 내가 영문을 몰라하자, 지미가 웃으며 말했다.
「아, 미안 미안. 난 여친한테서 문자 온 줄 알았지.」
뭐 그거야 오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한데···.
그게 대체 왜 궁금하냔 눈빛으로 눈을 크게 뜨자 지미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내 주변에 너한테 관심 있는 여자애들이 좀 있어서.」
···뭔가 되게 낯선 상황인걸.
*
11호선을 타고 샤틀레 역에 내리자, 커다란 분수가 자리한 샤틀레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사방을 둘러싼 근사한 풍경.
차가운 겨울 공기가 대수롭잖게 느껴질 정도로 가슴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찬, 여기서 소르본까지는 좀 걸어야 해.」
「하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걸어갈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루이즈의 말에 지미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는 센 강 다리를 건너 시테 섬에 발을 들였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고딕 양식의 생트샤펠 성당이 시선을 붙드는 가운데, 루이즈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 시테섬은 중세에 지식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야.」
12세기, 성당학교가 처음 생긴 것을 시작으로 초반에는 교단이 운영하는 학교가 대부분이었지만.
차츰 교수가 중심이 되는 교육조합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늘어났다고 한다.
「피에르 아벨라르, 토마스 아퀴나스가 명강의로 이름을 떨친 곳도 바로 이곳 시테섬이었지.」
우리는 그 길로 다시 다리를 건너 시테 섬을 벗어났다.
대로를 따라 죽 내려가자 카르티에 라탱, 즉 ‘라틴 지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찬, 여기가 바로 니가 보고 싶어했던 라틴 지구야.」
중세에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8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대학가.
라틴어가 사용되던 파리 대학 부근이 ‘라틴어 구역(quartier latin)’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이 라틴 지구란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자그마한 헌책방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은 그 자체로 낭만을 자극했다.
‘0.1유로라니, 되게 싸네.’
나도 모르게 헌책방의 가판대로 자꾸만 눈길이 가는데, 루이즈가 한마디했다.
「아, 이 근처에 중세 박물관이 있는 거 알아?」
각종 중세 조각이나 미술품 등은 물론이고, 3세기의 공중 목욕탕 유적까지 볼 수 있다고.
「···중세?」
내 안의 중세 덕후가 날뛰려던 그때, 지미가 거리의 어느 레스토랑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이 근처에 싸고 맛 좋은 레스토랑이 많거든? 10유로 내외면 풀코스를 맛볼 수 있어.」
구경 다 하고 나서 이 근처에서 점심을 먹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저 중세 박물관도 꼭 한 번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 팡테옹이 모습을 드러냈다.
「팡테옹은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 묘지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웅장한 외관이 근사한 위용을 자랑한다.
그 안에는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루소, 볼테르 같은 이들이 안장돼 있다고 덧붙이는 루이즈.
「근사하네.」
그 풍경을 온전히 눈에 담은 채,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
우리는 소르본 대학의 교정을 잠시 거닐다가 근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헤어졌다.
「내일 봐, 찬.」
어느덧 스터디할 시간이 되어 약속 장소인 카페로 나가자, 한서영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찬영 씨, 이쪽이에요.”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마치자 그녀가 날 보며 씩 웃었다.
“요즘 인기 많던데요?”
“인기는요 뭘.”
“왜요, 루이즈도 그렇고 세계 각국의 학생들에게 늘 둘러싸여 있잖아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요즘 어울리는 무리를 떠올려 보았다.
루이즈뿐이 아니라 지미나 비안카도 모두 20대 초반이랬나.
‘솔직히 말하면 걔들은 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어른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런 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서영 씨는 루이즈 씨랑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아, 같은 기숙사라서요. 운 좋게 도핀 대학 부설에 들어갔거든요.”
잠시 사담을 나눈 우리는 본격적인 스터디를 시작했다.
텍스트 주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안.
먼저는 그녀가 통역을, 다음 번에는 내가 통역을 하기로 했는데, 처음 하는 상대와 하려니 은근 긴장되는 동시에 기대감이 들었다.
“그럼 텍스트 낭독하겠습니다.”
흠흠.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낭독을 시작했다.
「Les membres du Conseil ont approuvé à l’unanimité un durcissement des sanctions contre la Corée du Nord···.」
사각사각.
한서영은 초집중한 채로 노트 테이킹에 몰두했다.
「Depuis le début de l’année, Pyongyang a procédé au tir de 20 missiles et a effectué un essai nucléaire···.」
약 3분간의 낭독을 마쳤다.
처음 듣는 한서영의 통역이 어떨지 내심 기대하는데, 그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유엔 안보리 회원국들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자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는데···.”
한서영이 통역을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마치 귓가에 대고 말하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쏙쏙 들어왔기 때문.
“연초 이래로 북한은 미사일을 20발 발사했으며 한 차례의 핵실험을 단행했고···.”
그건 아마도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 발성도 발성이지만 특색 있는 음색 덕분일 것이다.
그냥 대화할 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귀신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섬뜩하다 느꼈던 그 목소리가, 오히려 통역사에게는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통역이 끝난 뒤, 나는 이렇게 총평을 내렸다.
발음이 정확하고 발성도 좋지만, 독특한 음색 덕분에 귀에 팍팍 꽂히는 것 같다고.
“서영 씨, 한국어 아웃풋이 되게 좋은데요?”
“그쵸? 근데 저 프랑스어도 잘해요.”
그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런 자신감 좋네요.”
서영 씨가 해외파라길래 BA보다 AB 통역이 강점일 줄 알았다, 라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통대 들어오기 전만 해도 한국어 아웃풋이 좀 부족했어요. 그치만 서장석 교수님한테 단단히 혼나가며 열심히 했죠.”
“음, 서 교수님한테 혼나면··· 저라도 열심히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듯?”
이번에는 역할을 바꾸어 그녀가 텍스트를 낭독했다.
잠시 후 내가 통역을 마치자 한서영은 이런 말로 크리틱의 포문을 열었다.
“저는 사실 찬영 씨 통역 여러 번 들어봤거든요?”
“아··· 정말요?”
“또찬영 영상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봤다니까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던 그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고 들으니까, 또 느낌이 색다르네요.”
발성, 음색, 속도, 음량···.
뭐 하나 아쉬운 점이 없다며 극호평을 늘어놓던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근데 다른 무엇보다도, 찬영 씨 통역의 가장 큰 장점은 그것 같아요. 연사의 마음을 읽는 듯한 통역이랄까?”
“연사의··· 마음이요?”
한서영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찬영 씨에게서 가장 부러워하는 점이기도 하고요.”
“···.”
묘하게 솔직해진 목소리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자.
한서영은 노트테이킹용 노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좀 특이한 편이잖아요?”
“···어.”
허를 찔린 느낌에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도 알고 있었네, 라고 말하는 듯한 그 표정은 뭐예요?”
“아니, 딱히 그런 건···.”
“딱히 그런 거 맞아도 상관없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4차원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한서영.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달관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뭐 근데, 알아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다고 내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찬영 씨처럼 원래 사회성이 좋은 사람들이 있는 거고요.”
“···내가요?”
“설마, 본인은 몰랐다고 얘기할 생각은 아니겠죠?”
“음, 뭐 누구랑 막 부딪치는 성격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서글서글하거나 사교적인 타입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말을 줄이는데, 한서영의 말투가 돌연 진지해졌다.
“난 늘 찬영 씨 부럽던데.”
“···.”
“금방 신뢰를 얻잖아요, 은근 사람 마음을 열게 하는 타입이랄까. 그거 되게 큰 자산이에요.”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쏟아내던 그녀가 아! 하고 외쳤다.
“왜요?”
“서장석 교수님.”
“···.”
“서 교수님이 찬영 씨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언제 한 번 같이 안 볼래요?”
그러고 보니 서 교수도 프랑스에 온다고 했었지.
“어, 음···.”
쉽사리 대답을 못하고 말을 얼버무리자, 그녀가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물론 찬영 씨 입장에선 불편하겠죠, 그치만··· 저 좀 도와준다 생각하고 와주면 안 돼요?”
“네?”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묻자 한서영이 머쓱한 얼굴로 설명했다.
“사실은 서 교수님이 여기서 꼭 가보고 싶어하시는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근데···.”
1학기 때부터 지도 교수였던 서장석 교수가 지금도 여전히 불편하고 어렵다는 것.
“으으, 교수님이랑 단둘이 밥 먹을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막 체할 것 같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럼, 모를 수가 없지.
약간 동정심이 들던 그때, 그녀가 회심의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리고 찬영 씨 혹시 중세풍 좋아해요?”
“···중세요?”
“중세풍 컨셉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내 안의 중세 덕후가 눈을 뜨고 말았다.
*
방금 전 박찬영의 한불통역이 끝났을 때.
한서영은 솔직히 말하면 감탄을 금치 못한 터였다.
‘이 사이에 이만큼이나 늘 수가 있나?’
그의 프랑스어 실력은 일부 너튜브 영상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터였다.
그 영상도 기껏해야 한 달 전의 것이니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지금과 그때와 큰 차이가 없어야 마땅했지만···.
‘···찬영 씨, 귀가 엄청 좋은가 보네.’
그녀가 알기로 찬영은 프랑스 체류 경험이 1년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프랑스에 와 본격적인 통역을 하고, 프랑스인들과 며칠 통으로 어울려 지내며 부쩍 실력이 늘게 된 것.
‘물론 나도 타고난 귀는 좋은 편이지만.’
한서영 또한 어릴 적부터 외국어 신동이란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원래도 외국어에 재능이 있었고, 해외 각국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덕분에 영어는 원어민 수준,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도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통역사에게 중요한 건 외국어 능력뿐이 아니니까.’
아니, 전제부터가 틀렸다.
외국어는 통역사로 일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니까.
그녀가 찬영의 재능 중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통 능력’이었다. 그거야말로 늘 4차원이라는 소리를 듣는 서영에게는 가장 부족한 재능이니까.
‘서 교수님이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계셨지.’
진짜배기 통역사란 개똥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 듣는 사람을 말한다고.
여간해서는 학생에게 관심을 갖는 법이 없는 서 교수가 박찬영에게 눈독을 들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잠재력 때문이리라.
‘말하자면, 훌륭한 통역사가 되기 위한 모든 자질을 갖췄다는 것이지.’
지금 이 순간의 프랑스어 실력 자체는 아직은 한서영 자신이 뛰어날지 모르겠으나.
박찬영은 어디까지 성장해나갈지 모르는 괴물 같은 존재다.
···그러한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조금 복잡해지던 그때.
“아, 맞다. 서영 씨.”
인사까지 마치고 돌아서려던 그녀를, 찬영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붙잡으며 말했다.
“네?”
“저도 서영 씨를 초대하고 싶은 곳이 있는데.”
그 말과 함께 서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하자 그가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
[Coucou les potes! 😀 J’organise une grosse soirée pour fêter le dernier jour de l’année 2010! (···)] [안뇽 친구들! 😀 2010년 마지막 날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열려고 해! (후략)]깨발랄한 말투에 이모티콘까지 곁들인 전문 아래에는 파티 장소와 시간, 약도가 첨부돼 있었다.
대략 같이 모여서 카운트다운을 하며 연말을 함께 보내자는 파티 같은데···.
서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물었다.
“설마 이거 찬영 씨가 쓴 거예요?”
“아뇨, 아뇨. 그··· 우리 같이 수업 듣는 친구 중에 파리드 있잖아요.”
“파리드요?”
“네. 그 친구가 아제르바이잔식 파티를 보여주겠다고.”
키 크고 덩치가 상당한 데다, 온 얼굴에 수염과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아랍인 학생.
수강생 중 최연장자로 추정되는 파리드의 모습을 뒤늦게 떠올린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친구가 ‘이걸’ 썼다고요?”
찬영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들은 눈치였다.
“···프랑스어 SMS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구글에서 ‘파티 초대장’으로 검색했다 하더라고요.”
아···.
서영은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