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21)
그러나 추는 강적이었다.
같잖은 드립을 꿋꿋이 마무리하더니, 돌연 나를 돌아보며 묻기를.
“야, 나랑 윤아 씨 분위기 좋은 것 같지 않냐? 어?”
“···아니 뭐.”
쥐고 있던 펜을 잠시 멈춘 채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더 좋거나 안 좋거나 할 거리가 없었던 것 같은데···.
“윤아 씨는 내년 4월이면 과정이 끝난다 하더라고.”
사랑에 빠진 것으로도 모자라, 벌써부터 롱디 커플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추에게 한마디했다.
“···김칫국 너무 마시는 거 아니냐?”
그러자.
의외로 본인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추.
“야, 근데 김칫국도 마실 수 있을 때 마셔둬야 하는 거야.”
“뭔 소리야.”
“나중에 와장창 되면 김칫국도 못 마신다고.”
“···.”
내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추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야 내가 눈치 백단인데 모르겠냐? 그냥 잠깐 기분이라도 내고 싶은 거지.”
그건 그렇다.
저 자식이 말로만 그렇지 눈치는 또 되게 빨라서, 상대에게 부담스럽게 들이대거나 하는 건 못 봤으니.
‘오히려 분위기 띄우려고 하는 거에 가깝달까.’
추는 창 밖을 내다 보며 애수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으, 낭만의 도시 파리에 와서까지 김칫국만 마시고 있어야 한다니.”
“···.”
“나도 연애하고 싶으다··· 햄보카고 싶으다···.”
이제는 완전한 혼잣말로 탈바꿈한 추의 목소리를 BGM으로 삼은 채.
나는 펜을 사각거리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왜 나 추성원은 햄보칼 수가 업서!”
추성원의 슬픈 목소리가 창문 너머 파리의 밤 풍경 사이로 흩어졌다.
*
그주 목요일.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별 포네틱 수업의 첫 레슨이 있는 날이었다.
조금 일찍 온 탓인지 텅 빈 강의실에 자리를 잡던 중, 핸드폰 진동과 함께 문자가 왔다.
[찬영 씨, 오늘 오후에 스터디 하는 거 기억하고 있죠?]누군가 했더니 한서영이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포네틱 수업은 안 듣는 모양이다.
[그럼요. 텍스트도 다 준비해놨습니다.]한서영은 기대하고 있겠다며 오후에 소르본 대학 근처의 카페에서 보자는 답장을 보냈다.
첫인상은 조금 오싹한 감이 있었지만, 스터디 준비 때문에 얘기를 나눠보니 의외로 나쁘지 않은 스터디 파트너가 될 듯했다.
‘시사 상식도 풍부하고, 척하면 척 말이 잘 통한다고 해야 하나.’
수업이 끝난 뒤 스터디 전까지 뭘 하는 게 좋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학생들이 하나둘씩 강의실로 들어왔다.
보다는 듣는 학생이 적어 보였는데, 그중에 아는 얼굴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지미, 파리드, 비안카도 다 이 수업을 듣는구나.’
아는 척이라도 할까 잠시 고민하던 순간,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수업의 강의를 맡은 야스민 퀼리네입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야스민 교수는 자신이 음성학을 전공했고, 지금까지 수많은 ESIT 졸업자들의 발음을 교정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이 수업은 전반부의 한 시간은 음성학의 기초를 배우는 데, 후반부의 한 시간은 개인별 교정에 할애될 겁니다.」
교정이 더 필요한 경우에는 수업 외 시간에도 봐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음성학이란 사람의 말소리를 물리적 차원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하는데···.」
그렇게 잠시, 기본적인 설명을 마친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이 수업에선 이론보단 실전이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잰말놀이(virelangue)’를 해볼까요?」
잰말놀이, 영어로는 텅트위스터(tongue twister)라 부르는 이것은···.
‘쉽게 말하자면 간장 공장 공장장이지.’
발음하기 어려운 문장을 빨리, 반복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
「어린이들은 놀이 삼아 하는 것이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이 잰말놀이만큼 발음 연습에 효과적인 게 없거든요.」
삑삑삑-
마커가 움직이며 화이트보드에 문구 하나를 적었다.
[Si mon tonton tond ton tonton, ton tonton sera tondu.]교수는 웃음 띤 얼굴로 그것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건 꽤 유명하죠?」
보드 위의 내용을 입안으로 따라하던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발음을 소리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이렇게 되기 때문이다.
‘시 몽 통통 통 통 통통, 통 통통 스라 통뒤.’
그 내용 또한 골때리기는 마찬가지.
If my uncle shaves your uncle, your uncle will be shaven.
···만약 내 삼촌이 네 삼촌의 수염을 깎아준다면, 네 삼촌은 수염이 깨끗하게 밀릴 것이다.
‘애초에 이런 언어 유희 문장은 의미가 중요한 게 아니긴 하지만.’
「‘on’ 발음과 ‘t’ 발음이 가득한 문장이죠. 누구 해볼 사람?」
딱히 지원자가 나오지 않는 분위기에, 교수는 맨앞에 앉은 파리드를 지목했다.
「음··· 저요?」
「그래요, 학생 이름이?」
「파리드···입니다.」
해봐요, 파리드.
그녀의 말에 파리드는 쭈뼛거리며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시 몽 통통 통··· 통통 통통···.」
그러다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그것은 다른 학생들에게로도 전염되었다.
푸흐흐 웃던 지미가 한마디했다.
「삼촌 말고 파리드 본인이 수염을 깎아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파리드를 포함해 모두가 더 신나게 낄낄거리던 그때, 교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생각만큼 쉽지가 않죠?」
「네, 자꾸 헷갈리네요.」
파리드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학생이 의미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말을 해서 그래요. 내가 발음하는 걸 다들 잘 들어보세요.」
내가 그 문장을 입안에서 굴려보는데, 교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Si mon tonton tond ton tonton, ton tonton sera tondu.」
오.
나를 비롯한 학생들의 입에서 작은 감탄성이 나왔다.
아까 파리드가 했던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기에.
「다시 한 번 해볼 테니 그 차이를 잘 파악해보세요.」
나는 그녀가 그 문장을 반복하는 것을 들으며 나름대로 강세를 표시했다.
[Si↗mon→ton↗ton↘tond→ ton↘ ton↘ton↗]···의미를 생각하며 억양에 주의하라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와닿을 것 같았다.
파리드도 발음은 나쁘지 않았지만, 강세를 고려하지 않은 탓에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
「벌써 그 차이를 알아차린 학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문장을 하나 더 봅시다.」
이번의 문장은 아까 그 통통보다 좀 더 난이도가 높았다.
A hunter who knows how to hunt, must know how to hunt without his dog.
즉 ‘사냥할 줄 아는 사냥꾼이라면, 사냥개 없이도 사냥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의문장.
그러나 그 발음만 보자면···.
‘앙 샤쉐흐 사셩 샤세 두와 사부아 샤세 상송쉬앙.’
우리말로 따지자면 ‘경찰청 철창살 쇠철창살 철철창살’ 급의 난이도였다.
「우우우···.」
「너무 어려워요···.」
입안으로 발음해보던 학생들 사이에서 소리 죽인 야유가 쏟아져 나오자, 교수가 씩 웃어 보였다.
「알아요. 프랑스인들에게도 어려운 발음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잰말놀이용’ 문장들을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발음이 좋아짐은 물론 억양이 교정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녀가 학생들의 얼굴을 죽 둘러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잠시 분위기를 살피던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동음이의어 덕분이 아닐까요?」
동음이의어.
발음이 같되 의미가 다른 단어를 언급하자 야스민 교수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계속 해보라 말했다.
「앞서 Ton tonton(너의 삼촌)에서 보았듯, 발음이 같아도 의미가 다른 단어를 말할 때는 그 강세와 억양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또다시 내게로 집중되는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처럼 동음이의어가 많은 문장을 연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강세에 더 신경을 기울이면서 발음하는 습관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렇게 강의실이 잠시 조용해진 순간, 야스민 교수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Exact(정확해요)! 내가 하려는 설명을 학생이 다 해버렸네요. 학생 이름이?」
「박찬영입니다. 찬이라고 불러주세요.」
내 이름을 들은 그녀는 일순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알 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
첫 수업은 매우 만족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첫 번째 시간에 ‘잰말놀이’를 통해 억양과 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면.
‘두 번째 시간에는 여러분 각자의 발음을 교정해보겠습니다.’
야스민 교수는 열다섯 명에 이르는 학생들 모두에게 다양한 발음을 시켜보았다.
어떠한 발음이 부족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각자의 단점을 콕 짚어주는 것은 물론.
그것을 어떤 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 처방책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자 학생들의 얼굴이 한결 더 밝아졌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고, 샘플 문장들 몇 개를 교수 앞에서 읽고 나자.
‘음, 보통 아시아 학생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부분이 [z]와 [j]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건데···.’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야스민 교수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혀 문제 삼을 만한 게 없는데요? 저것 외에도 다른 발음은 물론이고, 억양도 상당히 훌륭해요.’
그저 해외에서 오래 산 게 아니라 전문적인 포네틱 수업을 받은 것 같다, 라는 그녀의 평가.
이에 올리비에 교수에게 포네틱의 기본을 배웠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자 야스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더 수준을 높여보죠.’
[ø], [œ], [ɛ̃]···모든 외국인이 공통적으로 어려워하는, 까다로운 단모음 혹은 반모음 위주로 연습하되.
아까 수업에서 했던 virelangue로 훈련하자는 것.
그렇게 첫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앞서 수업을 같이 들었던 파리드와 비안카가 자연스레 다가왔다.
「요, 찬. 오늘도 활약이 대단한걸!」
「너 발음 좋다고 교수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데?」
「활약은 무슨. 내일 또 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마침 복도를 지나던 루이즈와 지미와 마주쳤다.
“찬! 수업은 잘 들었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나왔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포네틱 수업이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대꾸했다.
아직 오전 11시에 불과한 상황.
점심을 먹기도 그렇고, 스터디를 하러 갈 때까지 여유 시간이 제법 있었다.
「흠, 이젠 뭐할 거야?」
지미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간만에 파리 투어?」
그러자 루이즈와 지미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그럼 나야 좋지.」
「찬은 어디 가고 싶어? 말만 해, 내가 안내할 테니.」
루이즈가 오늘은 특별히 가이드 투어를 해주겠다고 하자, 지미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럼 난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데려갈게.」
라틴 지구를 둘러보고 소르본 대학 교정을 지나 대학 도서관을 구경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자 자기만 믿으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루이즈.
그때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아, 잠시만. ···문자가 왔네.」
[찬영 씨, 수업은 잘 듣고 있습니까? 학교 근처에 내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다름 아닌 뱅상 뒤부아 교수가 보낸 것으로, 다음 주에 카페에서 만나서 차나 한잔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또 교수님을 뵙게 됐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여친이··· 그건··· 모르는 일···.」
「연애는··· 물어보면···.」
잠시 둘이서 대화하던 루이즈와 지미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음, 이런 거 물어보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는데.」
조심스럽게 운을 띄우던 지미의 말을, 루이즈가 중간에서 가로챘다.
「방금 문자 보낸 사람 말이야. Plus âgé ou plus jeune que toi(연상이야 연하야)?」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어린지가 갑자기 왜 궁금한지 싶었지만.
두 사람이 워낙 두 눈을 강렬하게 빛내고 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Plus âgé que moi(나보다 나이가 많지).」
「오, 몇 살이나?」
「음··· 아마 50살 정도 차이 나지 않을까?」
「···Quoi(뭐)?」
지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고, 루이즈는 한 박자 후에야 말했다.
「Oh là là(맙소사). 너··· 생각보다 대범하구나.」
···대범하다니 뭐가?
잠시 후.
좀 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