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32)
*
간만에 본가로 돌아와서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시차 적응 탓도 있겠지만, 거의 하루 가까이 잠만 자다 일어났다.
그렇게 여전히 비몽사몽한 채로 눈을 뜨자···.
“삼촌! 삼촌!”
“수아야.”
나는 품에 안겨드는 수아의 동그란 머리통을 행복하게 쓰다듬었다.
“일어나, 나랑 놀아.”
“그래, 그래.”
몸을 일으켜 수아를 번쩍 안아들자, 한 달 전에 비해 부쩍 무거워진 게 느껴졌다.
“우리 수아 그새 많이 컸네?”
“키 마니 컸져. 우리 반에서 제일 커.”
“우와, 진짜? 우리 수아 최고네.”
전에 형이 그랬던가.
수아가 얼굴은 엄마를 닮았고, 키는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고.
‘형 말고 형수님 닮아서 진짜 다행이지 뭐야.’
그렇게 대꾸했더니 형은 내 등짝을 후려치면서도 맞는 말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 말대로 수아는 형수를 닮아 이목구비가 아주 또렷했는데, 눈이 아주 땡그랗고 예뻤다.
‘작년만 해도 아기 티가 가득했는데.’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 했던가.
통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세 돌이었던 수아는 이제 만 48개월을 넘겨 한국 나이로는 다섯 살, 어느덧 유치원에 입학할 시기가 되었다.
아기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지고, 꼭 TV 속의 아역 모델처럼 아주 예쁘고 의젓하다.
“우리 수아가 진짜 많이 컸다.”
그런 심정을 입 밖으로 꺼내자, 수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다섯 살인데. 난 이제 아기가 아니라 어린이야.”
“···아기랑 어린이랑 달라?”
“그럼 다르지! 엄청 달라!”
자신이 어린이니 이제 다 컸다고 주장하는 수아를 데리고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가 거하게 차려놓으신 밥을 먹은 뒤 아버지가 깎아주신 과일을 먹고 있으니, 잠깐 외출했다던 형과 형수가 돌아왔다.
나는 프랑스에서 사온 선물을 꺼내 각자에게 나눠주었다.
“엄마 향수랑, 아빠 넥타이랑··· 이건 형수님 드릴 바디 제품.”
파리 마레 지구에서 산 넥타이와, 향수의 도시 그라스의 유기농 향수 공방에서 사온 제품들.
별것 아닌 작은 선물에도 세 사람은 상당히 기분 좋아했다.
“얘는 뭘 이런 걸 다 사왔대. 향수병부터가 프랑스 느낌 난다.”
“허허, 고맙다.”
“어머, 향이 진짜 좋네요. 안 그래도 바빴을 텐데 너무 고마워요.”
“아, 그리고···.”
나는 나름으로는 오늘 선물 중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것을 꺼내 형에게 건넸다.
무심코 건네받은 것을 확인한 형의 눈이 커졌다.
“이거··· ‘춘향전’의 불역판 맞지?”
그것은 파리 라틴 지구의 어느 고서점에서 발견한 오래된 책으로, 겉장에는 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세간에는 김옥균을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 대한제국 시기의 지식인 홍종우. 그가 프랑스 소설가 로니와 함께 번역한 ‘춘향전’의 프랑스어판 제목이었다.
“어. 상태가 꽤 괜찮지?”
“와, 안에 삽화도 그대로 실려 있네. 완전 대박이다, 이거.”
장정을 새로한 탓에 수집품으로서의 소장 가치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가끔 여행 갈 때마다 고서를 하나둘씩 사모으곤 하는 형이라면 좋아할 것 같아 샀는데.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고서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형을 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저럴 때 보면 천상 편집자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중인 수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수아는···.”
4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는 프랑스 굴지의 완구 기업에서 만든 아기 인형.
···이라고 해봤자 그냥 귀여운 아기 인형을 꺼내서 보여주자, 수아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아기 귀여워!”
벌써부터 아기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한 수아.
그렇게 모두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나자,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되었다.
“얘, 찬영아. 내가 너 땜에 요즘 완전 핸드폰 중독된 거 알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껌벅거리자,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니 엄마가 요즘 단톡방 여기저기서 대화하느라 아주 바빠요, 바빠.”
“···단톡방?”
어머니는 대답 대신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친척들은 물론이고, 엄마 친구들, 학교 동창들까지 해서 몇 개 단톡방이 활성화돼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나에 관한 온갖 기사와 SNS 게시물, 너튜브 영상 따위를 실시간으로 공유 중이었다.
[저 세상 인맥··· ‘또찬영’의 인맥, 난리도 이만저만이 아냐]“···엄마 제발, 이런 것 좀 공유하지 마시라고 해.”
“얘는 무슨, 내가 공유해달라서 공유하는 줄 아니? 다 니 팬이니까 그렇지!”
“아, 진짜···.”
어우, 민망해 죽겠네.
내 반응을 본 형이 낄낄 웃더니, 뭘 그러냐며 어깨를 툭 쳤다.
“찬영아, 넌 이제 우리 집안의 공식 스타야.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적당히 좀 하지.”
“내가 뭘 어쨌다고. 야, 오죽하면 수아가 저럴 정도라니까.”
“저러다니?”
할머니의,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핸드폰을 잠깐 들여다보던 수아가 고개를 들더니 해맑게 외쳤다.
“또찬영!”
“···.”
차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형수가 호호 웃으며 덧붙였다.
“요즘 수아가 ‘또찬영’이라고 외치는 데 재미가 붙었나 봐요.”
그럴 때마다 어른들이 깜짝 놀라며 반응을 보이니 그것을 재밌어한다는 것.
그렇구나, 우리 수아가···.
“뭐, 수아가 재밌다면야 상관없죠.”
*
그다음 날 아침.
그 어떤 통역을 나갈 때보다도 긴장한 채로 거울 앞에 섰다.
···나는 아주 중대한 약속을 앞둔 상태였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일찍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머리부터 발 끝까지 때 빼고 광을 냈다.
10년 전에 비해 제법 괜찮게 입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내 패션 감각에는 자신이 없는 터였으니.
거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고 있자, 어머니가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 출발하게?”
“아니, 기숙사엔 목요일에 갈 거야.”
“근데 왜···.”
어머니는 평소와는 상당히 다른 내 옷차림을 보고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너··· 혹시.”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며 흐흐 웃었다.
“우리 아들, 데이트 가는구나!”
“어, 음, 그게.”
너무 돌직구로 튀어나온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순간, 안방에 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찬영이가 데이트한다고? 누구랑!”
그러자 수아가 다다다다 달려나와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삼촌, 여자친구 만나?”
···다섯 살짜리가 데이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것도 잠시.
수아의 말을 받은 것은 어머니였다.
“아직은 없대. 하지만···.”
어머니는 몹시 흐뭇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곧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우와, 삼촌 여친 생겨?”
···제발 살려줘.
수치사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재빨리 집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가운데, 나는 레아 신을 향한 내 감정을 되짚어보았다.
‘회귀 전에만 해도 손닿지 않는 곳에 있는, 성공의 표본 같은 동기였지.’
레아 신. 국제회의 전문으로 활약하는, 국내 통번역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동시통역사.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아는 업계 네임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회귀 직후, 그러한 그녀를 마주했을 때도 그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호기심과 부러움, 질투가 뒤섞인 대상이라고 해야 할까.
많이 배웠으면 싶은 동시에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상대.
어찌 보면 나 혼자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 것에 가까울 터였다.
‘처음만 해도 사회성 없는 아싸 스타일의 천재, 라고만 생각했지만.’
함께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해나감에 따라 나는 레아의 진짜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재능만 넘치는 천재가 아니었다.
잘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많고 성실근면한 것은 물론, 그 누구보다도 노력하는 독종에 가까웠다.
···같은 목표를 향하는 동료이자 라이벌로서 존경할 만한 상대라고 할까.
그렇게 좀 더 서로를 알게 된 후, 우리는 우연히 진득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렇게 하는 게 편하더라고요. 적어도 남들 손에 배제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고립되길 택한 거니까.’
‘근데 찬영 씨는 좀 달랐어요. 날 그저 동기 1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가봐요. 찬영 씨에게는 이상하게 마음을 쉽게 열게 된 게.’
그래, 아마 그때였을 거다. ···레아가 제 섬세한 내면의 약점이자 상처를 처음으로 내보인 순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내가 좀 더 기댈 수 있고, 자신을 편안하게 내보일 수 있는 상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레아를 향한 감정은 꾸준히 커져갔다.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꽤 오래전이지만, 그 감정을 내내 부정하며 멀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었으니까.’
공부 외에 다른 곳에 시간을 쓸 여유도, 감정을 소모할 여력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1학년 1학기의 나는 눈앞의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음 가면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고 연애도 하고 그러는 거지.’
‘생각만 해보라고. 만약 니 옆에 누가 앉아 있다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면···.’
내 안에서 커질 대로 커진 감정을 더는 모른척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불안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업계가 좁은 만큼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퍼질 수 있다는 점이나, 이 관계가 좋지 않게 끝날 경우의 후폭풍이라든가.
그럼에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찬영 씨가 한국에 돌아오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그 모든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를 향해 내딛는 이 한 걸음을 앞으로 절대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
오늘이 오길 내심 기다렸기 때문일까.
레아는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더 일찍 도착해버렸고, 먼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날씨가 많이 풀렸네.’
창문 너머 한결 가벼워진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뿐, 또다시 몹시 낯선 생각과 감정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갑자기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 나네.’
어릴 적부터 소극적이었던 딸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
‘레아,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놓치지 말고 곧바로 붙잡으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먼저 잡는다고 하잖아?’
‘엄마, 그거 그럴 때 쓰는 속담이 아닌데···.’
어머니는 한국인 유학생이었던 아버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자신이 먼저 대시했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금방 사랑에 빠졌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국제 커플이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고.
···지금에도 여전히 사이가 좋은 부모님을 늘 봐왔기 때문일까.
지난번 스카이브로 통화하며 레아는 무심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찬영 씨가 한국에 돌아오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충동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온 말이기도 했다.
원체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성향의 그녀로서는 누군가를 이렇게 마음에 두는 것도, 그런 감정을 본인 쪽에서 먼저 표현한 것도 전부 처음이었다.
그동안 레아에게 관심을 표했던 남자가 없던 것은 아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너무 많은 편에 가까웠다.
햇빛 아래서는 가끔 금발로 보이기도 하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유독 튀는 화려한 외모.
거리를 다니다 연예 기획사의 명함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한 그녀에게, 남자들은 첫 만남부터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대고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 나의 진짜 모습에는 관심이 없지.’
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목표를 갖고 노력하는지 대부분은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본인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다가 받아주지 않으면 돌변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다.
‘너 진짜 차가운 거 알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고 완전 독종이네 독종이야.’
‘사람이 얼굴만 예쁘다고 다가 아니야.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지···.’
그런 일을 몇 번 당하며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뒤.
레아는 그런 어줍잖은 이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가운 표정과 비사회적인 말투로 자신을 무장했다.
독종, 얼굴만 예쁜 4차원, 사회성 제로, 재수 없는 혼혈.
무슨 말을 들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찬영 씨는 달랐어.’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을 여느 동기들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게 취급했고, 스터디를 함께할 때마다 기분 좋은 자극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때, 코아펙 회의에서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레아 씨, 가서 본인이 맡은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자괴감에 빠져 있을 여유 같은 건 없어요.’
섣불리 위로하거나 달래는 대신, 그는 그렇게 일침을 놓았다.
그것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때만 해도 그저 감사의 마음이 전부였다면, 이제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레아 씨?”
문득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녀의 머릿속을 내내 차지하던 얼굴이 눈앞에 와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