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19)
*
코아펙 행사가 끝난 지 일주일.
현장에서 너무 긴장감 넘치는 시간을 보내다 와서 그런가.
전에는 지옥처럼 느껴지던 통대의 일주일이 평화롭고도 한가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번 통역일로 꽤 많은 수확을 얻었지.’
일단 첫 번째는 HMY에이전시와의 인연.
통대 재학 중은 물론이고, 졸업 후에도 계속 양질의 일감을 가져다줄 만한 곳이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만에 느껴보는 현장감이라 할 수 있겠다.
‘회귀 전에도 통역일을 하며 생긴 좋은 추억이 많았는데.’
한때 아프리카 개발 프로젝트 통번역 일을 주로 하던 시기가 있었다.
사하라 이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6개월의 단기 프로젝트였는데, 그때 일을 계기로 현지인들과 많이 친해졌던 기억이 난다.
‘SNS로도 한동안 연락을 주고 받았었지.’
이번에도 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단 사흘의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기회였달까.
행사가 끝난 그 주말에 하미드 왕자의 명함에 적힌 이메일로 감사인사를 적어 보냈는데.
[C’était aussi un moment significatif pour moi(내게도 의미 깊은 시간이었소).]얼마 뒤 도착한 답신을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야, 너 한약 냄새 나. 대체 뭘 먹은 거냐?”
수업이 끝난 뒤 휴게실에 잠깐 앉아 쉬던 중, 추가 코 끝을 찡그리며 한마디했다.
“절편.”
“절편?”
“홍삼 절편 몰라?”
주말을 본가에서 보내고 월요일에 기숙사로 돌아와 짐을 꺼내려고 사물함을 열어봤더니.
그 안에 홍삼 절편 선물세트가 하나 있고 위에 메모지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Merci bcp. – Léa]고맙다는 한마디만 적힌 레아의 메모.
그러니까 나름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한 선물인 듯 싶은데···.
‘홍삼 절편이라니.’
도도하다 못해 어딘가 신비로운 이미지의 소유자 레아와는 몹시 어울리지 않는 초이스였지만.
“절편 맛있어, 안 먹어봤냐?”
몇 년 전부터 부쩍 건강 식품에 관심이 많았던 내게는 꽤나 반가운 선물이었다.
그냥 쭉 빨아먹는 것보단 절편이 씹는 맛도 있고 꿀에 절여서 달달하고 말이지.
“설마 몸 챙긴다고 벌써부터 홍삼 챙겨먹는 거냐?”
“글쎄.”
“···징한 놈.”
요즘 들어 부쩍 선물을 많이 받는 것 같다.
하나 하나 따지면 대수롭지 않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야 하나.
“근데 아까 불한번역 수업 끝나고 나서 뭔 얘기 했냐? 표정이 심각하던데.”
“아.”
그 말에 방금 전,
불한번역의 강소희 교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이번 주가 3주차이니, 세 번째 과제물까지 제출한 상황.
그러는 동안 나는 매번 비슷한 피드백을 들었다.
···피드백을 딱히 할 게 없다는 피드백 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하네요, 찬영 씨 과제는.”
“···.”
앞서 두 번 모두 그랬지만.
저 강소희 교수의 입에서 ‘완벽’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내 귀를 믿지 못하겠다.
내심 뿌듯해하는데.
강교수의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근데, 이게 찬영 씨 본인에게도 좋은 일일지는 모르겠어요.”
“네?”
“통대 수업은 못 하는 걸 잘하려고 듣는 수업이지, 이미 잘하는 모습을 선보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에요.”
그 말에 잠시 아무 대꾸도 못하고 있는데.
“찬영 씨가 완벽한 과제를 하려고 몇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어낸 결과물이 이거라면 상관없어요. 그 과정에서 실력이 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강교수의 눈이 빨간 줄 하나 없이 깨끗한 내 과제물로 향했다.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거든요, 이건? 너무 쉬워서 한 큐만에 끝내버린 것 같아요.”
속으로 뜨끔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야 비싼 학비를 내는 의미가 있겠어요? 내 수업이 찬영 씨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예요.”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제안을 하나 하죠.”
아무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찬영 씨는 본인이 원하는 텍스트로 추가 과제를 하게 해줄게요. 원래 취약한 쪽이라든가, 관심이 있는 분야가 있다든가.”
“···.”
“그런 텍스트가 있으면 따로 가져와요. 나도 정식으로 수업 준비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최대한 공을 들여 피드백해주도록 할 테니.”
“정말요?”
그야말로 엄청난 제안이었다.
내가 원하는 텍스트를 원하는 텍스트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상 교수 입장에서는 두 배의 수고가 들어가는 일이니까.’
반쯤은 특혜라도 봐도 좋을 법한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하자, 강교수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공통 과제는 그대로 해야 하는 것, 알고 있죠?”
“그럼요.”
전에도 느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가차없는 피드백을 하는 이 강소희 교수는, 냉랭한 첫인상과는 달리 언제나 학생들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교수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교수님.”
진심을 담아 말하자 강교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찬영 씨 같은 학생이 더 아등바등하는 걸 보고 싶어요. 지금은 너무 쉽잖아요, 안 그래요?”
“···.”
너무 쉽다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1회차에 비하면 난이도가 대폭 낮아진 게 사실.
‘찬영 씨 같은 학생이 더 아등바등하는 걸 보고 싶다.’
강교수의 그 말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내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다.
*
“별건 아니고, 추가 과제를 하라고 하셔서.”
“추가 과제? 너만?”
“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긴장했지만.
추는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로구만. 맨날 몇 시간 만에 다 끝냈다고 자랑하더니.”
“···내가 언제 자랑했냐.”
여하튼.
추는 이내 휴게실에 도착한 수용이 형과 은새에게 관심을 돌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수용이 형은 대뜸 이런 말을 꺼냈다.
“야, 불어 숙달 수업 좀 너무하지 않냐.”
은새도 그렇고, 둘 다 불어 숙달 수업에 불만이 많은 눈치였다.
“응? 그 수업이 왜요, 형?”
“성원이 너는 한국어 숙달 수업 들어서 잘 모르겠구나.”
“왜, 뭐 문제 있어요?”
“아니, 워낙 젊어 보이는 강사라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수업이 뭔가 맥없이 진행되며.
과제의 양은 많은데 대부분이 불필요해 보이는 쪽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음, 역시 이번에도 이런 반응인가.’
아무래도 통대 생활이 과제의 홍수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수업의 과제에는 더 민감해지는 경향이 생기기 마련.
과 은 유일하게 통번역이 아닌, 언어 자체의 훈련에 관련된 수업이다.
두 수업 중 하나를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는데, 한국어가 약하다면 을, 불어가 약하다면 을 택하는 식인데.
이 은 유일하게 프랑스 원어민 교수가 담당하는 과목이다.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선정한 뒤, 그것의 라틴어 어원부터 추적해가며 거기서 등장하는 다양한 프랑스어 어휘와 표현, 관용구를 학습해나간다.
‘10년 전에도 이 수업에 불만 있는 학생이 많았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지.’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프랑스식의 원론적인 교육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당장 눈앞에는 성과가 잘 보이지 않지만.
‘통대를 나오고 보니 새삼 그때 그 수업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을 얕게나마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결 더 자연스러운 프랑스어 표현을 체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음, 수용이 형. 아무래도 다른 통번역 수업에 비해 중요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그렇게 말문을 열자 나머지 세 명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하다 보면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전에 교환학생 갔을 때 프랑스 대학에서 그 비슷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나도 모르게 자만했던 걸까.’
돌이켜보니 독기가 확실히 빠졌던 것 같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 매일의 공부 루틴은 빠짐없이 하고 있지만.
‘그때의 절박함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등바등.
절박함을 대치할 수 있는 단어가 딱 그것이겠지.
게다가 지난번 통역에서 활약한 것에 사실 조금 우쭐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자그마치 십 년이야, 십 년.’
그 정도의 경험치를 가지고도 이 정도 앞서나가지 못하면 그야말로 우스운 일일 터.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일은 명백하다.
나의 취약점을 재점검하고, 그것을 단시간 내에 극복할 전략을 찾는 것.
취약점, 이라는 표현을 떠올리자 첫 한불통역 수업 때 들었던 선욱재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아까 통역했던 추성원 씨처럼 유창함은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현지 체류 경험은 1년이 전부라 했으니···.’
유창함이 부족하다.
다시 말하자면, 유학파 동기들에 비해 자연스러운 플로우가 아쉽다는 의미.
‘그리고 아마도 억양이 어색하다는 속뜻도 숨겨져 있겠지.’
프랑스어의 유창함과 억양 문제.
이건 1회차에도 수없이 고민했던 취약점이기도 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까라면 까야죠.”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던지 모르겠다.
추가 수용이 형을 향해 한마디하더니 내 쪽을 돌아봤다.
“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아주 혼자 딴 세상이에요, 딴 세상.”
“추야.”
“왜.”
“네가 전에 나 보고 그랬잖아. 인생 2회차라고.”
“···.”
“그게 만약 진짜라면. 그래서 니가 내 입장이라면 뭘 어떻게 할 것 같냐?”
추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야, 내가 인생 2회차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난 옛날로 되돌아가면 죽어도 통대 안 와.”
“그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니 백억을 준대도 안 올 거임.”
“백억은 좀 많지 않아요, 추 오빠? 백억 주면 난 통대 올 듯.”
의외로 자본주의의 첨병 같은 은새의 대답.
나는 둘의 대화에 실소하다가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 니가 나라면 말야.”
“···너라고? 박찬영?”
“응.”
“흠.”
추는 의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불쑥 한 단어를 내뱉었다.
“억양.”
“응?”
“니가 맨날 그랬잖냐, 본인 억양이 맘에 안 든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오래 살다온 사람을 따라가긴 어렵다며.”
그건 사실이다.
다른 건 국내에서 노력으로 대부분 따라잡을 수 있고, 발음도 귀가 좋은 편이면 어떻게든 네이티브에 근접할 수 있지만.
억양만큼은 바꾸기가 쉽지가 않으니 말이다.
“야, 근데 나도 프랑스에서 날 때부터 살았던 건 아니거든? 나름 노력해서 이 정도 하는 거라고.”
“그 노력이란 게 뭔데?”
“전문가 코칭.”
추가 어깨를 으쓱했다.
“프랑스어 쪽은 그런 거 되게 많거든. 얘네가 자기네 언어에 자부심이 많아서.
그건 맞다.
‘아카데미프랑세즈’라고 프랑스어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재상 리슐리외가 17세기에 만든 기관이 지금도 여전히 활동 중이니.
“어학원 출신 강사들 보면 억양 교정 코칭 많이 하거든. ···한국에도 찾아보면 그런 사람 있을 텐데.”
역시 금수저다운 해결책이다.
물론 그런 전문 튜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만.
그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용이 상당할 뿐더라 그걸 지불할 만큼의 효과가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추가 덧붙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음 좋겠지만, 뭐 원어민도 아니고 자신도 없어서-”
“야, 됐다. 너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무슨.”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얼마 없는 시간에조차 제대로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지만.
내가 말없이 고민하자 추가 말을 이었다.
“잘만 하면 돈 한 푼 안 받고 봉사해줄 호구, 아니 선량한 프랑스인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응?”
“아니, 니가 타지에서 외롭게 지내는데 한국어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해봐. 자기네 말로 대화할 상대가 그립지 않겠어?”
추가 씩 웃었다.
“근데 프랑스어가 유창한 한국애가 와서 종종 같이 대화하며 억양 좀 교정해달라 하면, 못할 게 뭐 있겠냐 이 말이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아까 저 세 사람이 나누던 대화가 번뜩 떠올랐다.
‘그 강사, 좀 소심해 보이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면 될 텐데 매번···.’
기억 났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절호의 카드가.
“네 말이 맞다, 추.”
“응?”
“너 덕분에 잊었던 걸 떠올렸어.”
수업을 매번 들었으면서도 여지껏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추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래, 이 징글징글한 2회차가.”
그래.
2회차에겐 2회차만의 공부법이 있는 법.
‘그 사람’이라면 날 도와줄 수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씩 웃자, 추가 몸서리를 쳤다.
“이 자식 또 소름끼치게 웃고 있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