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08)
잠시 후,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음료를 들고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한 부사장님은 이런 자리에 자주 오시죠?”
최 기자의 말에 한아영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자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와인업계의 이미지 때문일까.
요식업뿐 아니라 패션이나 뷰티 관련 행사에도 제법 초대를 받는 편이었다.
“또, 향수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편이기도 하거든요.”
사실, 그저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조예가 깊은 편이었다.
그건 그녀가 꽤 어린 나이부터 임원으로 일하며 아버지를 도와야 했던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첫 대면에서 어리다는 인상을 풍기면 만만하게 보이기 십상이니까.’
보이지 않는 옷이라고도 표현하는 향수는 그런 부분에서 아주 효과적이었다.
어떤 향을 뿌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첫인상을 180도 달라 보이게 할 수 있으니.
한아영 또한, 사업차 모임에 나갈 때면 전략적으로 택한 향수를 뿌리곤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프로페셔널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절대 밀리지 않을 듯한 인상을 풍기는 향을.
또 오늘 같은 파티에는 일부러 가볍고 청량한 향을 뿌려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
자신의 퍼스널한 향수가 따로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그날 그날 상황에 맞춰 이미지를 달리 하는 편이랄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향에 관심이 생겼고, 자신의 체취에 잘 녹아드는 향수를 찾게 되었다.
향수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프랑스에서 오노레그라스 VIP 매장에 들른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는데.
가격대가 높은 만큼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한다- 라는 취지하에 전문 조향사가 고객의 체취에 맞는 향수를 일일이 찾아주고, 그것들을 적절히 배합하여 자신만의 향수를 만드는 레시피까지 제공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터였다.
‘과연 한국에서도 그런 서비스를 접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걸.’
그러한 생각에 잠겨 있던 때, 음료를 홀짝거리던 최 기자가 신제품 시향 부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저렇게 완성 이전 단계에 있는 시제품을 홍보하는 경우도 있나 보죠?”
한 부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받았다.
“흔한 케이스는 아니긴 하지만, 일부러 기획 단계에서부터 기사를 내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특히 해외 브랜드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일 때 자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라는 말에 최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어그로를 끄는 게 중요하다, 이 말이군요.”
“네, 물론 저건 시제품이라 보기에는 향의 완성도가 이미 상당한 것 같지만요.”
한아영의 시선 또한 사람들이 제법 몰려 있는 시향 부스로 향했다.
제품명 공모 이벤트도 아마 여론몰이의 일부로서 기획한 듯하지만···.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는 큰 관심을 받기 어려울 텐데.’
그런 생각을 하던 때, CEO 인사말이 있을 예정이라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초대객들 대부분이 착석하고 나자, 환한 조명이 무대 위를 비췄다.
– 오노레그라스의 프랑시스 뒤트롱 CEO와 박찬영 통역사를 소개합니다!
한아영과 최재중이 예상했던 대로, 프랑시스 뒤트롱은 박찬영을 대동하고서 무대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아까만 해도 현란한 형이상학적 무늬들이 BGM의 리듬에 맞춰 춤추던 무대 뒤편의 화면이, 돌연 프리젠테이션 화면으로 바뀌었다.
「Merci beaucoup à tous ceux qui sont venus ici. Je suis Francis Dutron, PDG d’Honoré Grasse et parfumeur qui a appris les secrets d’Honoré Dutron.」
세련된 인상의 CEO는 짤막하게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박찬영에게 배턴을 넘겼다.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모든 분들꼐 감사드립니다. 저는 향수 장인 오노레 뒤트롱의 비법을 전수받은 조향사이자, 오노레그라스의 대표 프랑시스 뒤트롱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짧게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프랑시스 CEO는 익숙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17세기에 가장 위대한 향수 장인이라 불렸으며 왕족들의 향수를 주문 생산했던 장인 오노레 뒤트롱.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만들어진 브랜드가 바로 이 ‘오노레그라스’라는 것.
“저희 오노레그라스 제품은 프로방스에서 생산되는 천연 원료, 그리고 자체 공장에서 추출 및 조향한 천연 에센셜 오일만을 사용하여 생산되며···.”
소수 고객에게 한정 판매하여 브랜드 프리미엄을 높인다, 이거로군.
박찬영의 통역을 경청하던 한아영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오노레그라스는 내수 시장에만 공을 들였지만, 이제는 전 세계로 발돋움하는 중입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VIP 조향 서비스 또한 한국 시장에 도입될 예정이라는 말에, 패션지 에디터들이 분주하게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년 말, 배우 레아 데주를 이미지 모델로 삼은 는 기록적인 판매를 달성했는데요···.”
라뉘드니스의 탑노트와 미들노트, 베이스노트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 뒤.
프랑시스 뒤트롱 CEO는 파티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시향 부스를 가리켜 보였다.
“다들 시향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보셨다시피 다음 신제품은 남자 향수입니다. 이것 역시 특정한 개인을 이미지 모델로 삼았는데요···.”
기분 탓일까.
청산유수로 통역하던 박찬영이 유독 이 대목에서는 조금 머뭇거리는 듯 보였는데.
“오, 진짜? 누구지?”
“완전 기대된다···.”
“배우? 아니면 가수?”
오노레그라스의 새로운 뮤즈를 공개하겠다- 라는 말에 청중의 관심이 초집중되었다.
「Cette personne est(그 인물은 바로)···.」
프랑시스 뒤트롱 CEO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박찬영의 표정이 묘해진다 싶은 순간, 화면에 팟 하고 누군가의 사진이 나타났다.
“···!”
그것은 다름 아닌 박찬영이었는데.
···포토월 앞에 서서 어색하게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잠시 적막이 흐르가 싶더니.
「Chan-young Park, alias EncoreChan!(박찬영, 일명 앙코르찬입니다!)」
프랑시스 CEO의 말에 와아아- 하며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성일보의 최재중은 그저 감탄하는 중이었다.
‘원래도 강심장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의 시선은 무대 정중앙에 선 박찬영에게 향해 있었다.
청중의 시선을 한몸으로 받는 와중에도 지극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최 기자는 혀를 내둘렀다.
‘저게 나였다면 얼굴이 시뻘개졌을 텐데 말이지.’
하긴, 박찬영이 어디 보통 인물인가.
서장석 교수의 홈파티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포스가 남달랐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가 아마 1학년 1학기였을 텐데.’
첫인상만 보고 신인 정치가나 사업가로 착각했던 어마어마한 분위기의 소유자가···.
‘형, 여긴 내 친구 찬영이.’
‘···찬영이?’
‘어, 나랑 동갑이거든.’
‘이준이 너랑··· 동갑이시라고?’
이준이의 친구라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던가.
거기에 자신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고 말이다.
그때를 떠올리던 최 기자는 어쩐지 풋, 하고 웃음이 나고 말았다.
*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그럼, 나머지는 한국 CKT인터내셔널의 황준섭 본부장님께서···.”
오노레그라스의 국내 런칭을 맡은 CKT 측에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나와 프랑시스 뒤트롱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파티장 뒤쪽에 마련된 대기실에 들어가 숨을 고르는데, 프랑시스 CEO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Comment vous sentez-vous?(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내 대답을 미처 듣기도 전, 오늘 이 자리가 몹시 감개무량했다며 본인의 소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당신 덕분에 어마어마한 영감을 얻었느니, 시향 부스에 몰려온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성공할 게 분명하다느니, 남성 향수 업계의 판도를 뒤집을 거라느니···.
「하하, 배트맨의 슈트를 디자인하던 작가의 기분이 바로 이런 거일까요.」
「···.」
그 말을 듣자 뒤늦게 떠오른 사실 하나.
이 프랑시스 뒤트롱에 관한 어느 자료에 따르면, 그가 DC코믹스, 그것도 배트맨의 엄청난 팬이라고 했다.
「그거 아십니까? 배트맨 슈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돼 왔는데···.」
일명 배트슈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기분이 어떻냐고?’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통역할 때는 그 사실을 잠시 마음 한 켠으로 밀어둘 수 있었지만···.
무대 위 화면에 내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나온 순간의 수치심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너무 민망한 나머지 사고회로가 아예 멈춰버린 느낌이었지.’
그 후로 마이크를 쥘 일이 없는 것이 몹시 다행이었다.
아까 무대 위에서 포커페이스가 제대로 유지됐기만을 바랄 수밖에.
사실, 며칠 전의 사전미팅에서 나는 ‘향수 모델이 되어달라’라는 제안을 절반만 받아들이기로 한 터였다.
‘음, 아무래도 향수 모델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프랑시스 뒤트롱의 말에 내 의견을 조심스레 설명했다.
‘저를 향수의 이미지 모델로 삼아주신 것도, 그 제품에 앙코르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모두 크나큰 영광입니다. 하지만···.’
TV CF나 광고용 화보 촬영 같은 걸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 향수가 지닌 가능성이, 나를 모델로 기용함으로써 제한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말이다.
향수뿐이 아니고, 어느 제품이나 마찬가지다.
광고 모델은 본디 소비자들이 선망하는 인물이 맡아야 하는 법.
···내 이미지가 뭐 나쁘지야 않지만, 그렇다고 향수까지 뿌려가며 닮고 싶은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말하자.
‘하지만 찬, 난 당신을 보며 브루스 웨인을 떠올렸습니다. 불의와 범죄의 도시 고담에서 홀로 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또다시 배트맨 이야기로 빠져버리는 프랑시스 뒤트롱.
저 모습을 보니 그가 상당히 괴짜에 무척이나 충동적인 사람이라는 게 다시 한 번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시아 마케팅 디렉터 제롬은 좀 더 실리에 밝은 사람이었고, 다음과 같은 절충안을 제안했다.
‘음, 정 그러시다면 이건 어떨까요.’
내가 이 향수의 이미지 모델임을 오픈하고, 그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되.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부담스럽다 하시니, 본격적인 CF는 전문 모델을 따로 기용하는 것으로 하죠.’
그 대신 유명 패션지와 콜라보해서 이벤트성 화보 하나만 찍자는 것인데.
그것만 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자, 이만하면 휴식은 충분히 취했으니 슬슬 나가볼까요?」
프랑시스의 말에 우리는 다같이 휴게실을 나섰다.
CEO에게는 개인 수행원 겸 통역담당이 따로 있는 만큼, 나는 자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박찬영 통역사님! 아까 통역 너무 잘 봤습니다.”
“어떻게 오노레그라스의 향수 이미지 모델로···.”
“원래 뒤트롱 CEO와 친분이 있으셨던 건가요?”
···
나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쏟아지는 질문들.
그 사이에 명함도 수없이 주고받았다.
‘연예인이나 아나운서도 꽤 있는 것 같은데.’
파티에 온 유명인 중 일부와는 친한 척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도 찍었고.
나한테 또찬영 사인을 해달라는 사람도 상당수였다.
누구한테 번호를 줬는지, 누구와 무얼 했는지, 누가 어떤 사진을 SNS에 올렸는지 체크도 못한 채로 정신이 나갈 듯한 밤을 보낸 다음 날.
“···또 무슨 일이야.”
전날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채, 부르르- 울려대는 스마트폰 진동에 잠에서 깨어났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페북그램 알림이 수백 개가 와 있었다.
‘···312개라고?’
언뜻 훑어본 바.
친구 요청만 200개 가까이 와 있었고, 좋아요나 DM 알림도 상당수였다.
그중 맨 위에 있는 것을 무심코 클릭하자, 초면의 인물에게서 DM이 줄줄이 와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오노레그라스 파티장에서 인사드렸던 박형준인데요.] [어제 말씀드렸던 건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메시지로 보내드립니다.]···어제 말씀드렸던 건이라니, 그게 대체 뭐지.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스크롤을 내리자, 그제서야 이 메시지의 진짜 의도가 나왔다.
[저희 MK엔터테인먼트는 이동준 MC, 강수민 아나운서 등 유명 방송인이 다수 소속돼 있는 MC 전문 기획사입니다.] [박찬영 통역사님께 정식 계약을 제안드리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는데요.]그것을 멍하니 보다가 와,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어차피 제안에 응할 건 아니지만.’
이준이 놈과 레아는 받았지만, 나는 못 받은 그것.
···연예인 기획사의 캐스팅 제안을 드디어 받았다는 사실에 괜히 뿌듯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