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46)
꼴깍, 마른침을 삼킨 서영이 전화를 받았다.
“어, 으, 교수···님?”
– 허허, 교수님이 뭔가 자네는. 이젠 아버님이라고 불러야지!
“···.”
···그러기엔 ‘자네’라는 호칭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요,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서영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으, 호칭은 천천히 바꿔나가는 것도···.”
동생의 통화를 지켜보던 아영은 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전 직속상관이 시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현실이라는 것에.
그리고 그 시각, 평창동에 자리한 서이준의 본가.
“그래, 주변에 우리 며늘아가 자랑 좀 해야지 허허허! 그러니 자네도 이제는 아버님이라고 편하게···.”
서장석 교수의 서재에서 동굴 소리 같은 웃음이 들려오는 가운데.
서재 바로 밖, 거실에 앉아 있던 서이준의 어머니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아버지가 아주 웃음꽃이 폈구나 폈어.”
“···.”
서이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머니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얘, 너 꼭 아버지가 이럴 줄 몰랐어- 라는 얼굴이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난 네 아빠가 이럴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이번에 새로 나온 책, 되게 재밌더라.”
“그래요?”
“어, 이준이 니가 직접 기획한 거라고 했지?”
곧이어 독자로서의 감상을 늘어놓는 어머니.
그 말을 기쁜 마음으로 듣던 이준의 시야 한구석에, 거실 한쪽에 놓인 자그마한 책장이 들어왔다.
거기 꽂힌 책들의 공통점이라면-
[서이준 옮김]오로지 서이준 자신이 옮긴 책들이라는 것.
아들의 시선을 눈치챈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저 책장 볼 때마다 기분이 참 좋더라.”
물론, 아들이 유명한 번역가이자 촉망받는 번역가로 승승장구하는 것 자체도 좋았지만.
“자식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만족하며 지내는 걸 보는 것만큼, 부모에게 기쁜 일은 없는 것 같아.”
“···.”
묵묵히 그 말을 곱씹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툭 던지듯 물었다.
“맞다, 함영사 윤 팀장님은 어떻게 지내시니?”
이준이 아직 햇병아리 번역가였을 시절, 함영사의 굵직한 책들을 맡겨줬던 고마운 인연.
그녀의 말에 이준이 고개를 저었다.
“이젠 팀장님 아냐. 독립한 지 좀 됐거든.”
“어머, 이젠 대표님이구나.”
몇 년 전 그녀가 새로 차린 출판사는 지금도 여전히 서이준의 주요 거래처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잠깐 나갔다 올게요.”
“서영이 보러 가니?”
“그건 아니고, 정 선생님 뵈러 가기로 했거든.”
정선욱 번역가.
한때 그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선배 번역가와 저녁 약속이 잡혀 있다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귀찮게 해드리지는 말고.”
“네, 다녀올게요.”
그렇게 대꾸하는 이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이처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찬영과 인연이 있었던 이들 또한 각자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입학 직후의 찬영이 종종 일감을 받았던, CVC프로덕션의 한기준 실장은 연예계 매니저로 전직했으며.
EBC 장대석 피디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코리아로 이직해 다양한 다큐를 제작하고 있다.
을 담당했던 윤형준 피디 또한 프리랜서 피디로 독립을 선언한 후, 업계에서 제법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무역관을 담당했던 한중섭은 코트라의 임원급 인사가 되었는데, 지금도 가끔 술만 들어가면 ‘박찬영 통역사의 활약상’을 이야기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인 권상만 화백은 고령에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며, 얼마 전 신작이 드라마화되며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랩퍼 뉴프레드(본명 정홍식)는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얼마 전 출연한 예능에서 ‘나도 결혼하고 싶다’는 폭탄 발언을 해 시청자들을 당황케 했다.
지영찬 감독은 바벨탑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 로 아카데미 5관왕을 석권하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찬영의 ‘오타쿠’ 선언 이후 그를 여기저기 소개하고 다녔던 프레데릭 마르탱 문화원장은 은퇴후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중이었고.
비슷한 연배인 앙투안 바르보 노교수 또한 퇴임 후 친구 마르탱과 이따금 같이 골프를 쳤다.
(참고로, 의 징징이를 좋아하던 그의 손주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주한 프랑스 대사로 일했던 다비드 발랑탱은 캄보디아 대사로 근무 중이며, 상당한 외교적 수완을 인정받고 있다.
마르탱 원장에게서 찬영을 소개받았던 티에리 오키에 만화센터장은 여전히 만화센터장으로 근무 중이며, 만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을 듯했다.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석학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 다니엘 세노는 지금도 현역에서 연구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그와 이따금 학회에서 얼굴을 마주치곤 하는 토마 키페티는 이후 명실상부한 스타 경제학자로 자리매김했다.
보르도의 유명 샤또 중 한 곳인 ‘샤또 라까반’은 마담 벨루아의 아들, 알렉스가 차기 대표로 취임한 후 더더욱 승승장구하는 중이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파티셰 10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클레르 미샬락은 작년에 홍콩점을 오픈했다.
그녀는 이따금 오랜 친구인 알랭 루조와 함께 ‘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제 알랭 루조는 쇼콜라티에보다는 예술가로 더 많이 알려진 터였다.
에르메스의 안장 장인 에르베 르갈은 5년 전 은퇴해 자식과 손주들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8년간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지켰던 마고 토렐리는 재작년 본인의 개인 브랜드를 런칭했고, 브랜드 ‘마고 토렐리’는 프랑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중이다.
오노레그라스의 CEO 프랑수아 뒤트롱은 지금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찬영에게 꼭 선물을 보냈으며, 얼마 전 레오 카슬을 모델로 한 신제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조르디는 꽤 오래 전에 밴드를 해체했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일반인의 삶을 살고 있다(밴드원들과는 여전히 끈끈한 우정을 유지 중이라고 한다).
소설가 조르주 드뤼옹은 얼마 전 시리즈의 최종권인 7부를 출간했다.
올 초에 휴고상과 네뷸러상까지 석권함으로써 ‘3대 문학상’을 모두 거머쥐는 영광을 누린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한 번 더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모로코의 하미드 왕자는 자국의 교육제도 강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는데, 찬영과는 이따금 SNS로 연락을 이어나갔다.
로 단박에 스타가 된 배우 파벨 브뤼스는 그 후로도 수많은 뮤지컬과 영화에 출연했으며, 오늘날 들어서는 프랑스의 간판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프랑스의 여인’이라 불리는 국민 여배우 레아 데주는 클로드 마리니 감독과 두 번째로 합을 맞춘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촬영 이후 그녀와 우정을 이어나간 배우 엘리오 마레는 5년 전 감독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고, 현재는 연기보다 연출에 치중하고 있다.
로익은 재작년, 해외 입양의 문제를 다룬 자서전 을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지난달에는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딸을 결혼시키는 아버지처럼 눈물을 흘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여든의 나이를 넘긴 뱅상 뒤부아 교수는 몇 년 전부터 가족과의 시간에 집중해왔으며, 애제자인 정화영 교수와는 이따금 영상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정화영 교수를 비롯한 교수들은 대부분 통대에 재직하는 중이었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교수진에 ‘신레아’라는 이름이 추가되었으며, 성주원 교수와 함께 동시통역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
또, 강소희 교수는 작년에 제자 서이준과 한 권의 책을 공동 번역했으며, 선욱재 교수와 이미애 교수는 각기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어리버리했던 십 년 전과 달리, 올리비에 교수는 통대생들 사이에서 ‘명강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로헤알의 수석 통역사로 일하던 황은새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프랑스 코스메틱 브랜드를 국내로 수입하는 회사를 창업했다.
전시회 도록 번역가로 일하던 한유정은 작년에 첫 개인 전시회를 열어 오랜 예술가의 꿈을 이루었다.
김수용은 송하늬가 소개해준 회사 선배에게 한눈에 반했고, 만난 지 세 달 만에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는 데 성공했다. 결혼해서 알콩달콩하게 사는 그는 현재 대형 로펌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하는 중이다.
‘대한민국 축구의 빛’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장요한 선수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끝에 몸값이 가파르게 상승했고, 몇 년 뒤 엄청난 제안을 받아 맨유로 이적했다.
이적할 때는 그의 오른팔이라고 불렸던 추성원 에이전트와 함께였는데, 원래는 장요한의 개인 통역사였던 추성원은 타고난 친화력으로 일부 마르세유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제 고객으로 만든 것으로도 유명했다.
한편.
원래 한국에서 활동하던 너튜버 송하늬는 어느 날 프랑스로 이민을 가겠다고 선포하더니, 프랑스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생중계하며 상당수의 구독자들을 멘붕에 빠뜨렸다.
···그리고 결혼식에 나타난 그녀의 남편이, 장요한 선수의 에이전트로 얼굴이 알려져 있던 추성원이라는 사실에 적잖은 구독자들이 충격을 받았다.
올해로 성인이 된 배우 레오 카슬은 ‘헐리우드에서 가장 건실한 청년’으로 꼽힐 만큼 모범적인 행보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다양한 배역에 도전하며 연기 경험을 넓히는 한편, 아역배우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그는 바로 얼마 전에도 찬영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찬, 올해 추수감사절도 셋이서 행복하게 보냈어. ···이렇게 부모님이 함께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늘 찬이 생각나네.](첨언하자면 그의 부모는 몇 년 전 재결합했고, 지금도 꾸준히 부부 상담을 다니고 있다.)
어쩌면 옷깃 하나 스쳐 지나간 사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누구나 서로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수많은 이들과 찬영이 맺어온 인연의 무게만큼이나.
*
오후 7시가 되기 10분 전, 예약해둔 프렌치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살짝 늦어버려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로 다가가자.
“왔어?”
레아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응, 사인회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좀 늦었네.”
“나도 이제 막 왔는걸 뭐.”
예약할 때 미리 주문해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한숨 돌리며 레아의 맞은편에 앉는데, 때마침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얘, 연호 걱정은 하지 말고 밤 늦게까지 데이트 잘하고 와라.] [수아가 아주 잘 데리고 놀고 있어. 삼촌이 거하게 한 턱 냈다며 자기한테 맡겨달라던데ㅋㅋ]피식 웃으며 문자 확인을 마치자, 레아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머님이 보내신 거야?”
“어, 연호 잘 있다고. 수아가 잘 데리고 놀고 있다네.”
“다행이다.”
내심 신경 쓰였는지 웃으며 대꾸하는 레아.
나는 테이블에 올려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늘은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잖아.”
“···응.”
결혼 생활도 어느새 몇 년 차에 접어들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연호는 건강하고 사랑스럽다.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감사한, 그림처럼 단란한 가족.
‘야망도, 성공도, 권력도 모두 좋지만.’
···아직까지는 내 손 안에 쥐여진 이 행복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확고해진다.
이윽고.
“첫 메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레아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한, 오늘의 만찬이 이어졌다.
우리는 즐거운 분위기로 식사를 즐겼고 식사가 모두 끝난 뒤.
“어머, 케이크까지 준비했어?”
배가 너무 부르다던 레아는 특별히 주문 제작한 케이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응, 여기 케이크 좋아하잖아.”
“자기가 최고야.”
케이크의 초에 불을 붙인 채, 우리는 서로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교환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통대 다니면서 자기랑 데이트하던 때가 생각 나네.”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던 때 말야?”
“···뭐야, 내가 언제.”
칫, 하고 혀를 차는 레아.
문득 10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웃음이 절로 나오던 그때.
“어? 눈 온다!”
그녀의 말대로, 창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헐벗은 나뭇가지들 위로 휘날리는 눈발.
어느새 쌓인 눈으로 하얗게 물든 바깥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그때.
‘···!’
오랫동안 떠올린 적 없는, 그러나 익숙한 광경이 불현듯 기억 났다.
‘10년 전으로 회귀한 직후.’
···통대의 교정에서 마주했던, 헐벗은 겨울 풍경 말이다.
그때와 지금, 같은 풍경을 너무도 다른 기분으로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현실에선 해피엔딩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돌아보는 레아의 눈빛이 진지했다.
“행복한 현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의미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우리 계속, 지금처럼 행복하자.
그것이 내 유일한 바람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