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51)
윤주하 대표가 웃음 띤 얼굴로 이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튼, 두 분 우정 보기 좋네요.”
“···결론이 뭔가 이상한데요.”
“아 그리고 이준 선생님, 2주 후에 출국하신다고 했나요?”
그 말에 서이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윤주하가 언급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국제 번역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프랑스 아를 국제문학번역협회에서 주관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높은 경쟁율을 뚫고 선정되어 3개월 간 프랑스에서 체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 일단 파리로 갔다가 아를로 향할 생각입니다.”
윤주하 대표 앞에서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서이준은 내심 끓어오르는 기대감을 누르기 어려웠다.
유럽의 가장 공신력 있는 문학번역협회로 알려진 아를협회.
그곳에서는 매년 일정 기간 동안 전 세계 유수의 문학가와 번역가를 한자리에 모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것이 바로 국제번역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이다.
각국의 대사관과 문화원의 협력 아래 대상자를 엄선하고, 이렇게 선발된 이들에게 항공권과 숙박까지 지원해준다.
서이준은 그 존재를 강소희 교수를 통해 처음 알게 된 터였다.
‘이준 씨, 괜찮다면 혹시 지원해보지 그래요? 상당히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선정 기준은 ‘자국 문학’을 해외 언어로 1종 번역한 경우인데.
서이준은 프랑스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왔을 뿐 아니라 한국 책 또한 프랑스어로 번역해왔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한국문학번역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매년 1종을 꾸준히 출간했는데, 가장 최근에 번역한 한국소설 이 페미나상 외국문학 부문에 최종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준은 올해의 번역 레지던스 대상자로 선정이 되었고···.
‘비용적인 지원은 둘째 치고.’
유럽의 번역학 명문이라는 아를에서 문학번역 전문 강의를 듣고, 전 세계의 번역가들과 얼굴을 맞대고 매일 같이 의견을 나눌 수 있다니.
“벌써부터 두근거리네요.”
“네?”
“전 세계 번역가들끼리 모여 매일처럼 번역론에 관해 토론하고, 서로의 표현을 봐주고···.”
간만에 수업을 듣는 것 또한 기대되는 일이다, 라고 서이준은 덧붙였다.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이 한 달의 시간이 제게 큰 자극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윤주하 대표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서 선생님은 외모와 달리 타고난 번역가 스타일이라니까요.”
“외모요? 제 외모가 왜···.”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서이준.
“아니, 음, 솔직히 말해 이준 선생님 외모가 번역가 느낌은 아니잖아요?”
“제가 생긴 게 좀··· 날티가 나나요?”
“날티라뇨, 설마. 말하자면 배우상이다, 이 말이죠.”
그 말에 서이준이 아니라며 손을 내젓자, 윤주하 대표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 보였다.
[배우상 아이돌, 아니 배우상 번역가 서이준이 도서전을 접수했다(feat. 얼굴 천재)]“···.”
이제 막 게시된 듯한 인터넷 기사 제목에, 서이준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
서울 국제도서전이 끝난 지 정확히 2주 뒤.
서이준은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를 가지고 인천공항에 나와 있었다.
“잘 다녀와.”
···한서영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결혼한 지 몇 년째였지만, 아이가 없기 때문인지 여전히 신혼 부부 같은 분위기였다.
“나 없다고 울고 그러는 건 아니지?”
이준이 장난스레 던진 말에 한서영이 혀를 찼다.
“울긴 누가 울어. 혼자만의 시간을 차고 넘치게 즐길 테니 걱정 마시고요.”
“방금 그 말, 한 이틀도 못 가서 취소할 것 같은데?”
이준이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자, 한서영이 그를 올려다보며 보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딴 여자랑 얘기하거나 쳐다도 보지 마, 알았지?”
그 말에 서이준이 뭐라고 답하기 전, 얼른 덧붙이는 그녀.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 나도 알아. 번역가 대부분이 여자일 테니까. 그냥··· 그냥 하는 말이야, 알았지?”
그러자 이준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우리 서영이가 불안하구나?”
“···불안은 무슨.”
“걱정하지 마, 금방 볼 거잖아.”
그래.
그 말대로 두 사람은 금방 볼 예정이었다.
이준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석 달 일정이지만···.
“한 달 뒤면 볼 거잖아.”
“···응.”
박사과정을 진작에 마친 뒤 현재는 화경외대 전임교수로 근무 중인 한서영.
그녀는 국제적으로 촉망받는 학자이기도 했는데, 기계번역에 관해 새로 발표한 이론이 큰 호평을 받은 터였고.
얼마 후 파리에서 열릴 국제번역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준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한 달 뒤에 프랑스로 향할 터였으니.
“그렇게 맨날 같이 있는데도 아직도 아쉬워?”
“아쉽긴 누가 아쉽대, 진짜.”
고작 한 달 떨어져 있는 것 가지고 이러는 모습을 다른 동기들이 봤으면 다들 학을 뗐겠지만.
본인들은 진심이었다.
“곧 봐.”
“응, 먼저 잘 가 있어.”
그렇게 애틋한 작별 인사를 마친 뒤, 게이트 너머로 들어선 서이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이준아, 공항이냐.
“···아버지.”
화경외대에서 여전히 학과장으로 지내고 있지만, 슬슬 은퇴를 고려 중인 서장석 교수였다.
– 서영이랑 인사는 잘했지?
“네, 방금 인사하고 헤어졌어요.”
지금도 아들을 대할 때는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며느리인 한서영만 보면 늘 흐뭇한 얼굴로 껄껄대기 일쑤였으니.
‘아버지 표정이 그렇게 다양한 줄도 몰랐지.’
– 그래. 아무리 한 달이라도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것만큼 힘든 게 없는 거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연락하고.
“네, 그럴게요.”
그리고 최근 서 교수는 조금 다른 쪽에 부쩍 관심을 둔 터였는데.
– 그건 그렇고 너, 전 교수 기억 나지? 전일고 동창 말이다. 그 친구랑 며칠 전에 만났는데···.
“···.”
– 그 친구가 날 붙잡고 손녀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이제 네 살이라는데 아기상어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른단다···.
단톡방에 사진과 영상을 자꾸 올리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모르겠다고.
– 딱히 부러운 건 아니지만, 너도 서영이도 그렇고 이제 결혼한 지-
“저 이만 들어가봐야 해요.”
– 허허, 그래.
스마트폰 너머로 흩어지는 동굴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준은 전화를 끊었다.
···요즘 들어 ‘손주’를 언급하는 빈도가 부쩍 잦아진 것 같다 느끼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까.
*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 위치한 도시, 아를.
고대 로마의 유적지와 ‘반 고흐의 도시’로 알려진 곳이지만, 번역가들에게는 문학 번역의 성지이기도 하다.
‘국제문학번역협회의 본거지이니까.’
서이준이 이곳 아를의 번역가 전용 레지던스에 도착한 것은 이틀 전의 일.
아를 레지던스는 그야말로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깔끔하고 편안한 주거 시설에 매끼 식사가 제공되는 기숙사는 물론, 세계 각국의 번역본을 소장하고 있는 전문 도서관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첫 번째 토론 아틀리에가 열리는 날.
널따란 강의실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한창이었다.
「···그 의견에도 동의하지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출판물의 경우 가독성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가독성이 중요한 거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가독성을 우선하다 원 의미를 상실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A언어와 B언어 사이의 거리 역시 여기서는 중요한 변수가 되는···.」
서이준이 이번 아를 레지던스에 있는 동안 참석하기로 한 프로그램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문학번역 실무 토론’이었으니.
문학번역가들이 업무 현장에서 부딪히게 되는 번역의 고민을 함께 논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오늘 주제는 원어와 역어의 선택과 차용에 관해서···였지.’
즉, 번역가들이 번역을 할 때 어디까지 원어를 살리고 어디까지 번역어를 택하느냐에 관한 고민.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냥 우리말로 다 번역하면 되는 거 아냐 싶겠지만, 생각만큼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이런 고민은 음식이나 패션에 관련된 내용을 번역할 때 가장 많이 하게 된다.
서이준 자신도 이런 경우가 있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이 ‘필레미뇽’을 먹는 장면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것을 처음에는 ‘안심 스테이크’로 옮겼지만.
몇 페이지 뒤에서 주인공이 ‘샤또브리앙’, 즉 안심살을 살짝만 익힌 프랑스식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장면에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면 앞에 안심 스테이크도 필레미뇽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프랑스어 단어는 국내에 좀 더 알려진 편이니 낫지만, 다른 언어 같은 경우 그 고민이 한층 더하다고 했다.
「예컨대 에 등장하는 ‘사모바르’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죠.」
러시아 문학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러시아 출신 번역가가 발언을 이어나갔다.
「사모바르란 러시아 전통 주전자를 말하는데, 이걸 그냥 ‘주전자’로 표현해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거든요.」
기나긴 겨울, 혹독한 추위를 버텨내야 하는 러시아에서 이 사모바르는 가정 내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부의 열로 물을 끓이는 것이 아닌, 안에 담긴 열통에 숯이나 장작을 넣어 물을 끓이는 이동식 물끓이개에 가깝다고 했다.
「톨스토이 소설에 이 사모바르가 자주 등장하는데, 에선 ‘사모바르’라는 별명을 지닌 조연 캐릭터까지 나오죠.」
헌데 이 사모바르를 ‘주전자’라고만 옮기면 원래의 그 러시아식 주전자가 지닌 문화적 함의가 상당 부분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긴, 역시 국내 번역본에서도 주전자보다는 사모바르라고 표기한 쪽이 더 많았지.’
하지만 러시아 번역가의 의견에 반박하는 이들도 다수였다.
「하지만 번역 소설은 안 그래도 가독성이 떨어지게 마련이 아닙니까.」
「동감이에요. 거기서 낯선 용어까지 등장하게 되면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지지 않을까요?」
토론이 과열돼서인지 언젠가부터 논의가 원점을 도는 느낌을 주는 가운데.
다른 번역가들이 열렬한 토론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서이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양측의 의견이 모두 타당하다고 봅니다. 결국은 번역가의 선택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부드럽고도 힘 있는 발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저는 문학번역의 기본 전제란, A언어를 B언어로 일대일 대응하듯 옮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강의실의 전원이 자신을 돌아보고 있음을 의식하며 이준은 말을 이었다.
「A언어로 적힌 어느 문장의 의미가 100이라면, 그것을 B언어로도 100에 가깝게 재현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번역에 ‘완벽’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표현 그 자체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이어나감에 따라 머릿속의 생각은 점점 더 명료해졌고.
「우리는 그 표현의 ‘효과’를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니까요.」
서이준의 입에서 그 같은 결론이 나온 순간, 강의실 안에 일순 적막이 내려앉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