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52)
사실, 러시아 번역가의 발언을 들으며 서이준은 자신의 지난 경험을 떠올린 터였다.
‘재작년에 번역했던 청소년 소설이 바로 그런 경우였지.’
어느 모로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청소년 소설이었는데, 모로코 관련 용어가 유독 자주 나와 곤란을 겪었더랬다.
예컨대 이 같은 원문과 맞닥뜨릴 때마다 번역가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Alors que le soleil brûlant tombait sur sa tête, Amir pensa à sa mère. En sa mémoire, sa mère en djellaba rouge a servi du tajine d’agneau et du couscous dans une assiette.]선택지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방금 이 러시아 번역가의 말대로 원어를 최대한 살려 해당 국가의 문화적 정서를 보여주는 것.
[머리 위로 뜨거운 햇살이 떨어질 때면 아미르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의 기억 속, 붉은 젤라바를 입은 어머니는 양고기 타진과 쿠스쿠스를 접시에 담아주고 계셨다.]모로코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것이 장점이라면, 독자들에게 ‘젤라바’ ‘타진’ ‘쿠스쿠스’ 같은 단어들이 즉각적으로 와닿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단점이다.
이에 두 번째 선택지, 즉 낯선 것을 최대한 배제하는 식으로 번역해본다면.
[그의 기억 속, 붉은색 모로코식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는 양고기 찜과 좁쌀 파스타를 접시에 담아주고 계셨다.]이해하기는 한결 쉽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준이 결국 선택한 것은 일종의 절충안이었는데.
‘젤라바’ ‘타진’ ‘쿠스쿠스’ 같은 단어를 최대한 원어 표기대로 살리되, 필요한 경우 설명을 문장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물론 문장이 너무 길어지지 않게, 꼭 필요한 경우에만 말이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문장 그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효과’를 번역해야 한다는 이준의 말에 잠시 조용해졌던 강의실에서-
짝짝짝···.
잔잔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서이준이 조금 얼떨떨해 있던 가운데, 오늘의 토론 진행자는 잠깐 시계를 돌아보더니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훌륭한 정리인걸요. 오늘 토론의 마무리는 방금 전 서이준 번역가의 발언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렇게 아를에서의 첫 토론 프로그램은 기분 좋게 끝났다.
이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붙였다.
「아주 멋진 발언이었어요, 준.」
고개를 든 순간,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얼굴에 서이준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당신은···.」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붉은 머리가 매력적인 프랑스 여성.
서이준은 그녀를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이 분명··· 루이즈였지?’
루이즈는 찬영이 프랑스 ESIT에서 특강을 들을 때 사귄 친구였는데, 이후 한불 교류행사에서 한두 번 얼굴을 보며 소개받은 바 있었다.
「루이즈, 맞죠?」
「후후, 오랜만이네요 준.」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것이 4년 전이니 오랜만이라는 말이 맞았다.
이준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루이즈도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겁니까?」
「아, 전 번역가가 아니라 참관인 자격으로 들어온 거고요.」
루이즈는 ESIT에서 학위를 딴 뒤 한동안 문학번역에 매진했고, 지금은 아를 문학번역협회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단다.
그녀는 옆에 서 있는 아랍인 남성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파리드는 당신 같은 문학 번역가인데, 아랍 고전문학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어요. 아, 파리드도 ESIT에서 찬과 같이 특강을 들었던 사이에요.」
파리드와 이준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덥수룩한 수염에 안경을 쓴 모습이 저명한 학자처럼 보이는 파리드는 미소 띤 얼굴로 운을 뗐다.
「을 번역하셨죠?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셨습니까?」
서이준의 눈이 커지자 파리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요. 소설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이 소설의 해외 번역을 기획한 게 무슈 서라는 기사까지 찾아봤는걸요.」
둘은 이 주제로 한창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이즈가 픽 웃으며 한마디했다.
「둘이 아주 죽이 잘 맞네.」
그 말에 파리드가 씩 웃자, 이준이 고개를 들더니 제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두 분, 찬영이랑 영상통화 안 할래요?」
두 사람을 아를에서 만났다고 찬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무척 반가워하더라고.
「마침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는 중이었다고, 괜찮으면 잠깐이라도 얼굴 봤으면 좋겠다는데.」
이준의 말에 루이즈와 파리드가 눈을 빛내더니 동시에 대답했다.
「완전 좋아요!」
그리고 잠시 후.
세 사람은 자그마한 스마트폰 화면 속에 나타난 찬영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찬, 오랜만이야!」
「여전히 잘 나간다며, 친구?」
화면 속, 근사한 수트 차림의 찬영이 루이즈와 파리드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 와,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이렇게 얼굴 보는 거 몇 년 만 아냐?
「그러게. 서로 바빠서 제대로 연락도 못 했네.」
– 어떻게 셋이서 만나게 된 거야?
루이즈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찬영은 파리드가 아랍 고전문학을 번역한다는 것이 영 신기한 모양이었다.
– 이렇게 보면 업계가 참 좁단 말이지.
서이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여기서 내 번역서를 읽어본 사람을 다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걸.」
– 근데 참 신기하네. 루이즈도 그렇지만 파리드는 진짜 예전이랑 똑같아.
찬영의 말에 파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찬 너는 전보다 젊어진 것 같은데?」
– 흐흐, 그게 노안의 장점이지.
「난 아직 십 년은 더 있어야 내 나이로 보일 듯.」
파리드의 자조적인 말에 루이즈가 깔깔 웃어댔다.
무슨 노안 배틀도 아니고, 서로 자기가 더 노안이라고 우겨대는 둘을 보며 이준 또한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여전히 내 타입이네.」
「응?」
루이즈의 중얼거림에 이준이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말을 받았다.
「아, 찬의 외모 말이에요.」
「그렇···군요.」
「물론 준 같은 예쁜 얼굴도 보기 좋지만, 역시 섹시한 건 찬처럼 남자다운 스타일이죠. 크, 수트가 넘 잘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전보다 훨씬 멋있어진 것 같은···.」
이준이 잠시 아무 말도 못하자, 루이즈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괜한 오해는 하지 말고요. 어디까지나 외모가 내 타입이라는 얘기죠.」
자기뿐 아니고 프랑스 여자들 대부분이 저런 스타일을 섹시하다고 여길 거다- 라는 루이즈의 말.
‘···서영이가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겠는걸.’
찬영이 프랑스에선 의외로(?) 인기남이라는 사실에 조금 충격받은 이준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이준은 주말을 틈타 파리로 향했다.
제일 큰 목적은 다음 날 오전에 도착할 아내 서영을 배웅하기 위해서였지만, 한 가지 용건이 더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준.」
다름 아닌 뱅상 뒤부아를 만나는 것 말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뒤부아 교수님.」
한때 통번역학계의 전설로 불렸던 노교수는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여유로운 은퇴 생활을 보내고 있던 터.
하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학회의 요청을 받아 연단에 서기로 했고, 그의 이름을 컨퍼런스 참가자 명단에서 발견한 서이준이 반신반의하며 뒤부아 교수에게 연락했던 것.
이제 여든의 나이에 가까워진 만큼, 주름진 얼굴에서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눈빛과 목소리는 여전하시네.’
형형한 눈빛에 변함없는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노교수와 마주앉은 서이준은 알 수 없는 감회에 젖어들었다.
「이런 자리에서 이준 씨를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군요. 그리고 이준 씨의 아내가 이번 컨퍼런스의 발표자 중 한 명일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그러게요. 프랑스어 통번역업계가 좁긴 좁은가 봅니다.」
이준의 말에 노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뱅상 뒤부아 또한 십여 년 전, 한국에서 통대 학생들을 가르쳤던 기억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향학열로 빛나던 학생들의 뜨거운 눈빛.
강단에 선 그에게도 피부로 느껴지던 강렬한 의지를.
그리고 그중 가장 투지를 불태우던 것이 바로 이 서이준이 아니었던가.
통역이면 통역, 번역이면 번역.
A언어와 B언어를 막론하고 팔방미인처럼 뭐든 잘해내는 학생이었지만, 어딘가 한구석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통역은 분명 잘하는데, 사람들 앞에서 통역할 때마다 본인이 극심한 부담에 시달리는 듯했지.’
막상 그 당시에 서이준 본인은 딱히 인지하지 못한 듯했지만, 통번역 전공생들을 수없이 길러낸 뱅상 뒤부아의 눈에는 그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가 과연 앞으로 평생 통역사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 내심 걱정하곤 했는데.
「···결국, 이렇게 출판 번역가가 되었네요.」
그랬던 그 서이준이 진로를 변경했다는 얘기를 듣고 뱅상 뒤부아는 마음 깊이 안심한 터였다.
고개를 끄덕여가며 서이준의 말을 경청하던 노교수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 출판 번역가로 사는 건 어떤가요?」
많은 것을 내포한 질문에 이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게 꼭 맞는 옷 같다고 할까요.」
이전에는 출판 번역가로 산다는 것 자체를 상상도 못했지만.
「매일 같이 새로운 책을 찾고, 문장 하나 하나를 붙들고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고. ···이런 삶이야말로 내가 몰랐던 ‘나다운 삶’이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고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대답에 뱅상 뒤부아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잠시 진지한 대화를 나눈 뒤, 노교수는 추억을 더듬으며 지난날의 기억을 입에 담았다.
「한국에서 보낸 날들이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군요.」
통대 교수들과 함께 먹었던 떡볶이 하며, 학생들과 다같이 갔던 고급 카페 하며···.
「교수님이 떡볶이도 드셔보셨을 줄은 몰랐는데요.」
「어디 떡볶이뿐인가요, 시장 골목을 누벼가며 길거리 음식은 다 먹어봤습니다 하하.」
「입에는 맞으셨고요?」
「안 맞았다면 선욱재 교수를 귀찮게 해가며 온갖 음식을 다 먹어보지 않았겠지요. 한국에서 먹어본 것 중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든 게 있다면···.」
노교수의 주름진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깃들었다.
「찬영 씨가 소개해준 한국의 밀크티 정도일까요.」
「한국의··· 밀크티요?」
고개를 갸웃하던 서이준에게 뱅상 뒤부아는 찬영이 줬던 밀크티 캔 이야기를 했고, 서이준은 이내 해답을 찾았다.
‘찬영이 자식 설마··· 두자와를?’
송하늬와 더불어 두자와 홍보대사처럼 굴곤 했던 박찬영의 지난날을 떠올린 그가 아, 하며 탄식했다.
「음, 제가 남들 취향을 여간해서는 다 존중하는 편이지만-」
「이준 씨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군요.」
「밍밍한 밀크티는 좀 많이 아니죠.」
「더군다나 차갑고 밍밍한 밀크티라니, 후우.」
「교수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나저나···.」
이준은 웃음 띤 얼굴로 교수에게 말했다.
「저희가 이런 얘길 한 걸 알면 찬영이가 발끈하겠는걸요.」
그 말에 뱅상 뒤부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앉은 카페의 창가 밖, 평화로운 풍경 위로 파리의 노을이 내려앉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