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6
016
졸지에 호출당한 카리나는 불만이 역력해 보였다. 토드가 그녀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모래늪」 주문, 알고 계시죠?”
즉각 카리나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암살자를 플레이했을 때, 그의 주된 먹잇감은 마법사들이었다. 상성 상 몸이 허약한 마법사 계열은 사냥하기도 쉽고, 현상금도 많았다.
그래서 마법사들이 애용하는 주문들은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모래늪」은 마법사가 초반부에 익히는 기초 군중 제어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4원소의 간단한 주문들은 마법사라면 기본적으로 갖추는 소양이지 않습니까.”
바짝 미간을 좁힌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인다.
“마탑에 속하지 않은 외인이 마법사들의 생태를 파악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인데.”
“뭐, 제가 이래 봬도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보고 알게 된 것들이 있는지라.”
카리나는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계속 눈싸움을 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마땅히 없으니, 한숨을 흘린 카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나더러 저것들 누울 묫자리를 파놓으라고?”
그녀는 연신 무장한 해골 병사들을 살폈다.
“예.”
“왜? 그냥 전처럼 삽으로 파면 되지 않아?”
“안됩니다. 지면 아래에서 언제라도 올라올 수 있도록 얕게 파야 하는데, 삽으로 팠다간 눈썰미 좋은 놈들한테 들통날 수 있습니다. 「모래늪」 정도라면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죠.”
“홍염의 마탑에서 파견된 마지스터를 인부처럼 부려먹으려는 놈은 너밖에 없을걸.”
카리나의 푸념을 웃어넘긴 토드가 성채와 자신이 선 곳을 가늠하는 시늉을 했다. 주춤대며 뒷걸음질 치던 그는 맨땅 위에 멈춰섰다.
“여기가 적당하겠군요. 이쪽에 시전해주시겠습니까.”
“왜 굳이 거길 파달라는 건데?”
“···에스터리츠 양은 원래 마탑에서도 호기심이 많으셨습니까?”
오늘따라 왜 이리 질문이 많냐는, 토드의 완곡한 항의였다. 콧방귀를 뀐 카리나가 팔짱을 꼈다.
“변경백이 내건 계약 조건, 기억 안 나? 비록 너와 내가 명목상 동등한 종군마법사로 부임하지만, 넌 내게 모든 행적에 대해 보고할 필요가 있어. 널 감시하고 통제하는 건 내 의무란 소리지.”
아직 정식 마지스터도 아니면서, 카리나는 변경백의 군영에서 꼬박꼬박 마지스터 칭호를 들을 때마다 매번 입꼬리를 씰룩댔다.
병사들이야 카리나가 평원에서 일으킨 마법의 위용에 감화된 탓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토드는 그녀의 어설픈 실체를 알고 있다.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다.
“주변을 잘 둘러보세요. 에스터리츠 양. 이곳은 지대가 낮은 강가입니다. 여기에 진을 친다면 오른쪽에 강을 끼고 있으니, 전면과 좌측만 막은 채로 성채를 틀어막을 수 있겠죠? 게다가 야트막한 언덕이 있으니 말뚝을 세우고 포대를 배치하기엔 최적의 위치입니다.”
“아.”
그제야 토드의 속셈을 헤아린 카리나가 입을 작게 벌렸다.
“···누구도 발치에 움직이는 시체들을 묻어두리라곤 예상하지 못하겠지. 잔머리가 제법 굴러가네?”
그녀가 토드를 향해 물었다.
“저 녀석들, 얼마나 강해?”
“글쎄요. 아마 뜨내기 병사들론 당해내기 어려울 겁니다.”
해골 병사는 일반적인 날붙이로 잘 무력화되지 않는다. 움직이는 인골 때문에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뼈는 마력을 잇는 매개일 뿐, 반쯤 영체에 가까운 존재다.
곤봉이나 철퇴 따위의 둔기로 연결부를 부수면 동작을 멈추겠지만, 그건 하급 망자의 한계상 어쩔 수 없다.
“그럼 깜짝 기습으로 유의미한 손실을 입힐 순 있겠어. 그래도 이리공이 바보가 아닌 이상, 호위 병력을 배치해두지 않을까?”
“당연히 반대쪽에서 이들의 시선을 먼저 잡아끈 뒤에, 이 녀석들이 뛰쳐나오도록 해야겠죠.”
대체 뭐로 이리공 측의 시선을 끌겠다는 건지 의문이었지만, 토드는 작업을 마친 뒤에 답해주겠다고 일축했다.
손을 모은 카리나가 낭송에 매진했다. 역시 그녀는 간단한 「모래늪」을 읊는 데만 5분이 넘게 걸렸다. 토드가 몰래 혀를 찼다.
사르륵···!
지면이 움푹 사그라들더니, 사람이 겨우 몸을 뉠만한 공간이 드러난다. 토드가 손을 까딱이니 해골 병사가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다시 카리나가 손을 오므리니 흩어진 땅이 저절로 구덩이를 덮었다.
그런데 어째 카리나의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에스터리츠 양? 이제 겨우 한 구 묻었습니다.”
애써 거친 숨을 가다듬은 카리나가 으르렁거렸다.
“원래 마력은, 정교한 작업일수록 배분하는 게 더 까다롭다고.”
이 자리엔 크뤼거도 와 있었다. 그 역시 카리나와 마찬가지로 토드의 감시역이지만, 변경백 쪽으로 통하는 연락책이기도 하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드가 히죽 웃었다.
“흐음, 듣기론 마지스터에 이른 마법사들은 수십 가지의 다채로운 주문과 온갖 삼라만상의 가변을 손쉽게 이뤄낸다죠. 설마 마지스터 에스터리츠께서 고작 구덩이 몇 번 팠다고 지치시는 건···”
화들짝 놀란 카리나가 토드와 크뤼거를 번갈아 봤다.
“내, 내가 언제 지쳤대?!”
카리나는 열 구를 묻어줬을 즈음 호흡이 흐트러졌다.
호기롭게 나선 거치곤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주문의 위력에만 치중된 기형적인 형태로 육성된 마법사였으니.
품을 뒤적인 토드가 약병을 내밀었다. 찰랑거리는 액체는 얼핏 이온 음료를 닮아 있었다.
“이건 또 어디서···”
“저는 만성적으로 마력이 부족한 편이라 항시 챙겨둡니다.”
토드가 내민 약병을 받아든 카리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는 색과 농도만으로 저질의 양산품임을 알아차렸다.
“이런 걸 상시 복용했다간 속이 남아나지 않을걸.”
“모든 상황에 대비해둬야죠. 가령 이렇게 마력을 남발했다가 자칫 이리공의 군세가 갑자기 들이닥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정말 먹기 싫은지 인상을 쓰던 카리나는 마개를 부여잡고 낑낑댔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물약과 씨름하는 카리나의 모습은 참으로 하찮다.
“이리 줘보시지요.”
“주문을 사용하느라 잠시 힘이 빠진 것뿐이야.”
토드의 손아귀에서 마개가 퐁, 열렸다. 박하와 치약, 아세트를 섞어놓은 듯한 화학적 향이 풍긴다.
카리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직 20구 남았습니다?”
물약을 낚아챈 카리나가 단숨에 들이켰다.
와락 얼굴을 구긴 그녀는 몇 차례 기침하더니, 입가를 훔쳤다.
“이 수모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러게 꼬우면 「캐스팅 감소」와 「마력 환류」를 적절하게 올렸어야지.
자존심 때문에 마력 물약도 안 챙기고 다니면서. 그런데 초반에 비해 정신력이 좀 떨어졌는지, 점점 구덩이를 파는 모양이 흐트러진다.
토드가 슬쩍 끼어들었다.
“거기선 마력을 조금 줄여서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건 인위적인 느낌이 좀 강하군요.”
카리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쓰읍, 이건 너무 깊게 파였는데요. 이러다간 망자가 뚫고 나오는 데까지 시간과 힘이 많이 소모됩니다.”
쉴 새 없이 나불대는 입.
장장 10분 동안 옆에 붙어서 꼬치꼬치 지적을 해대니 그녀의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다.
카리나가 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씨. 말 진짜 많네! 야, 그냥 네가 여기 들어갈래?!”
“사양하겠습니다.”
카리나의 손에 열기가 치밀었다.
원래 저렇게 마법을 빨리 시전하는 편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럼, 다물자?”
“옙.”
음, 대충 감이 잡혔다. 어느 정도로 놀려먹어야 살살 긁을 수 있는지.
까칠해도 하나하나 리액션이 커서 그런지, 재밌다.
카리나가 구덩이를 파는데 열중하는 사이, 토드가 크뤼거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이리공은 어디까지 왔답니까?”
토드가 종군마법사가 되었으므로, 자연히 크뤼거 역시 공손한 어투로 답했다.
“척후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이리공의 군세는 도보로 이틀 거리에서 병력을 규합 중이라고 합니다.”
“그 숫자는요?”
“약 3천을 조금 넘는 거로 보입니다.”
어떻게 저번보다 더 늘어날 수가 있는 거지?
변경백 측은 이리공에 비해 명백히 수적으로 열세였다. 게다가 연이은 야전의 패배로 부상자들도 상당했다.
저쪽에 대포가 있는 이상, 수성 측의 이점이 전무한 상황.
과연 전투에 돌입하면 그나마 남은 병사 중에 얼마나 제 위치를 지킬진 의문이다.
“어째 숫자가 꽤 늘어났군요. 이리공의 악명이 워낙 자자해서, 여기선 병력을 충원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주로 용병들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현찰 박치기로 해결하겠다는 건가.
멀쩡히 밭 갈고 있던 놈 강제로 끌고 가는 것보다 품삯을 주고 데려오는 게 훨씬 낫다지만, 이리공이 무리한 지출을 거듭하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하물며 3천이면 일개 제후가 이끄는 규모치고 상당하다.
비록 이리공의 얼굴은 모르나 토드는 자꾸만 그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광경이 연상되었다.
저쪽도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어떻게든 대비책을 세우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테지.
내심 토드는 이리공이 어떤 해답을 제시해올지 기대했다.
가급적이면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의표를 찌르는 수이기를 희망했다. 그래야 짓밟는 재미가 있을 테니.
마침 카리나가 30번째 구덩이를 덮었다.
아까 심통이 좀 난 거 같으니, 좀 달래줄까?
즉시 토드가 손뼉을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에스터리츠 양. 역시 고매한 홍염 마탑의 마지스터답게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육안으론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고, 마략의 잔향도 남지 않아 혹시 모를 적의 마법사가 눈치채지도 못할 테죠!”
물약의 맛이 어지간히 고약했던지, 카리나는 연신 헛구역질을 간신히 억누르며 답했다.
“닥, 쳐···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우고, 우욱. 어떻게 적들의 시선을 끌 건지나 마저 말해.”
토드는 언덕 너머의 저편을 가리켰다.
“혹시 이리공이 전사자들을 수습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까?”
크뤼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보고는 아직 없었습니다.”
“평원에 남은 전사자들이 상당한 거로 보이던데, 그대로 방치되고 있겠군요? 허허, 죽은 자들이 통탄할 일입니다.”
토드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카리나는 꺼림칙한 눈길로 그를 훑었다.
“너, 거기서 죽은 사람들을 다 일으키려고?”
“마땅히 누군가에겐 죽은 자들의 원성에 귀 기울일 의무가 있는 법이지요.”
잠시 크뤼거를 곁눈질하던 카리나가 토드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기껏해야 네가 부릴 수 있는 한계는 30기였잖아···! 평원에서 죽은 사람만 100명이 넘어갈 텐데?”
“저도 나름의 술수가 있답니다.”
토드의 옷깃을 강하게 부여잡은 카리나가 이를 갈았다.
“설마 거기에 붙는 조건으로 영혼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이라던가, 모종의 대가를 지불시키는 사악한 술수 따위가 끼어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그래도 에스터리츠 양과 저는 나름의 신뢰 관계가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저만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신뢰고 자시고, 흑마법사들이 한계를 초월해서 힘을 끌어내는 가짓수가 그런 종류밖에 없지 않아?”
엄밀히 따지면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는 별개의 집단이지만, 그걸 여기서 일일이 설명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저는 그런 하찮은 속임수는 쓰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애당초 그런 식으로 성취의 미진함을 돌려막아봤자, 나중에 닥칠 반동은 어떻고요? 저는 그걸 감당할 위인은 못 됩니다.”
토드를 놓아준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바로는 네 사령술은 사역마를 부리는 원리와 비슷하게 작동했어. 그럼 마력 물약을 들이붓는다고 더 많은 숫자를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 대목에서 토드가 미소지었다.
“굳이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까?”
“뭐?”
“망자들은 본능적으로 생자의 기운을 쫓습니다. 게다가 원한을 품은 상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표적이 되어줄 테죠.”
시전자의 통제가 풀리면 제멋대로 날뛰는 건 사역마나 망자나 비슷하다.
더군다나 전사자들이 대거 묻힌 평원은 들판의 뒤쪽에 있었다.
눈매를 좁힌 카리나가 제 입술을 두들긴다.
“그래, 거기 묻힌 자들을 다 일으켜 세운다 치자. 근데 내가 봤을 때 네가 부리는 망자들이 잘 조직된 전열 상대로도 위협적일진 의문이야.”
말하다 보니 좀 전에 마신 약물의 냄새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던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여태껏 네 하수인이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적의 훈련도가 낮거나, 전열이 흐트러진 추격 국면이었기 때문이야. 당장 제대로 된 장창 방진만 짜더라도, 망자들이 접근조차 못할 테고.”
“타당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망자들과 이리공의 병력이 정정당당하게 맞붙도록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랬다간 당연히 일방적으로 쓸려나갈 테죠.”
토드가 낮게 읊조렸다.
“좀 더 지저분한 방식으로 이리공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성첩 위에서 아른거리는 횃불을 가리켰다.
“성벽의 보수 공사를 하는 겁니까?”
“워낙 낡은 성채라 곳곳에 균열이 많습니다. 크리슈토프 경께서 공사를 총괄하고 계십니다.”
“공사를 중지하라고 전해주세요.”
“예?”
크뤼거가 당혹스러운 비명을 흘리자 토드는 태연히 턱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대포알에 얻어맞으면 다 허물어질 담장인데, 전투를 앞두고 쓸데없이 장병들의 힘을 빼봤자 뭐하겠습니까.”
“뭔 생각이야? 아무리 그래도 적을 저지해줄 장벽이고, 엄폐물로 기능하는데.”
“성벽이 빨리 무너질수록 오히려 좋습니다. 에스터리츠 양. 우리는 저들을 성벽 안으로 끌어들여야만 합니다.”
“성채 안에서 싸우겠다고?”
“프론지 성채의 규모가 작은 게 지금은 천운입니다. 비좁은 내부 구조를 감안하면 일부 통로만 틀어막아도 적병의 진입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리공의 전열이 성채에 쏠린 틈을 타서··· 배후에 망자들을 풀어놓는 겁니다.”
“앞에선 변경백의 병력과 얽히고, 뒤에선 망자들이 덮친다···. 그런 난전 형태라면 양상이 다를 수도 있겠어.”
“분명 이리공은 에스터리츠 양을 감안해서 최대한 넓게 병력을 포진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싸움 중에 적들이 밀집하는 때가 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망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테니까요.”
문득 카리나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 혹시··· 망자들의 경우엔, 아군 오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
토드는 태연히 답했다.
“어차피 뼈도 못 추리고 제대로 화장된다면 고인들도 만족할 겁니다.”
도저히 카리나의 머리로는 따라가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말을 말자···.”
고개를 내저은 카리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리공이 순순히 속아 넘어갈까?”
“누군가를 속이려면 속이는 쪽도 혼신의 열연을 할 수밖에요. 불가피한 손실은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카리나는 무어라 항변하려다, 마땅한 방책이 없었는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열세에 놓인 자가 짜낼 수 있는 꾀는 마땅히 많지 않다.
애초에 꾀가 있는 자였다면 상황을 여기까지 몰고 오지도 않았겠지만, 중간에 끼어든 셈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둘 사이의 암묵적 합의가 끝나자, 경청하고 있던 크뤼거가 입을 열었다.
“이건, 두 분이 각하와 참모들 앞에서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군영의 분위기를 떠올린 카리나가 한숨을 흘렸다.
“···다들 쉽게 납득하진 않을 거야.”
“이럴 때일수록 마지스터라는 칭호의 권위가 필요한 법이죠. 에스터리츠 양이 거든다면 저들도 한 번쯤 생각해볼 겁니다.”
은근히 부추기는 듯한 말투에 카리나는 인상을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꼬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뭐라 하면 능구렁이같이 발뺌을 해대니 자기만 불리해지고.
이를 간 카리나가 발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토드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뒤따랐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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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리공의 병력을 성채 내부로 끌어들이고, 저와 사령술사가 더불어 적병을 타격하여 적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아군이 치고 나가 격멸하는 게 대략적인 작전의 개요입니다.”
앞선 모의의 내용을 설명하는 건 카리나의 역할이었다.
차분한 어조에 직관적인 설명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대개 근본 없는 떠돌이 마법사들이 언변과 거리가 먼 걸 생각해보면, 마탑의 교육 과정에도 발표 강연이 포함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토드의 망자들이 동원된다는 대목에서 거센 반발이 있었다. 특히 토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하인리히의 수하들이 항변했다.
“저 악독한 작자를 전장에서 어떻게 믿습니까?”
이에 반대편에서 깍지를 끼고 있던 사내가 대꾸했다.
“이미 각하께서 그를 등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지금 와서 신뢰를 따지는 게 의미 있나?”
저자가 크리슈토프. 변경백 휘하의 가신 중 하인리히 다음으로 입김이 센 인물이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자들과 더불어 싸우라뇨! 이건 신앙과 명예의 문제요!”
하인리히 쪽 가신의 발언에 크리슈토프가 명예에 관하여 꼬집고 나섰다.
“명예? 우리와 싸우는 이리놈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던가? 여태 진군 방향에 있는 마을은 닥치는 대로 불태우며 물자를 수탈해대고, 일체의 협상 없이 공격 명령부터 내리는, 짐승 같은 놈이? 명예도 상대를 가려가며 따지는 걸세!”
여태 제 부하들이 떠들기만 내버려 두던 하인리히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설령 여기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후일이 두렵지 않소? 크리슈토프. 흑마법사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교회에 고발당할 테고, 즉시 모든 게 끝장이오.”
“흐, 하인리히. 자네는 벌써부터 전투 이후를 상정하고 있는 건가? 당장 승패가 어떨지도 모르는 마당에.”
“평원에서 후퇴했던 일은 모를까, 함께 전투를 벌였다간 변명의 여지도 없소.”
“이리공은 우릴 살려둘 생각도 없는 거로 보이네만, 그럼 우린 알아서 목 내민 채 죽잔 말인가? 명예롭게? 글쎄. 모두가 그걸 바랄 것 같진 않네만.”
“말조심하시오, 크리슈토프 경!”
다시 집무실의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두 파벌로 갈라진 가신들은 서로 언성을 높이고, 카리나가 어떻게든 중재해보려 애쓰지만 내몰린 자들의 고함에 어쩔 도리없이 표류했다.
개판이군. 이러니까 계속 야전에서 패배했지.
혀를 찬 토드는 대접에 놓인 오리고기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성채의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뭔가 시큼하면서 구리구리한 냄새가 입안에서 진동했다. 대체 어떻게 보관을 한 건진 몰라도, 질겅질겅 씹히는 육질이 고무 같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일단 맛은 매우 안정적이다.
토드는 손가락을 빨며 느긋하게 집무실을 관망했다.
결국 종지부를 찍은 건 변경백이었다.
그가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럼 더 나은 수를 강구할 놈이 여기 있나? 그 빌어먹을 휴그나 게을러빠진 요코프 놈이 정말 좆빠지게 달려오고 있긴 한 건지, 이 몸을 배신하고 이리공에게 붙어먹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거친 언사를 섞은 변경백의 일갈에 회담장이 수그러든다. 손수건으로 수염을 닦은 변경백이 소리쳤다.
“교회의 문책에 대해선 내가 추후 어떻게든 수단을 강구해 볼 테니! 지금은 마지스터 에스터리츠와 토드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
역시. 변경백 정도의 세속 제후는 교회로부터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만한 급이었다. 물론 사면을 위해 나중에 많은 기부금을 요구받고, 사령술사를 들였다는 이유로 대외적인 평판도 깎이겠지만, 지금 그게 대수인가?
이리공을 막지 못하면, 다 죽을 텐데.
토드가 대꾸했다.
“각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이리공의 무리는 각하께 자비를 간청하게 될 겁니다.”
승리를 안겨주겠다는 토드의 자신만만한 선언.
이에 변경백이 코웃음 치며 화답했다.
“부디 그러길 빌지. 사령술사. 그 잔악한 놈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패배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사령술사의 삶을 영위하는 게 불가능했을 테니.
토드는 사과를 베어 물었다.
이빨 자국이 난 단면을 자세히 보니 통통한 애벌레가 꿈틀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물질 중에서도 애교 수준이지. 적어도 파이에서 살아있는 생쥐가 튀어나오는 것보다야 나으니.
보너스로 단백질도 섭취한다 생각하고 마저 씹어 먹었다.
음, 과즙인지, 육즙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즙이 풍부하구만.
척후병이 예상한 이리공의 도착 시기는 내일.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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