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65
165
상대적으로 산지나 구릉이 많아 땅의 모양이 울퉁불퉁한 제국 동부에 비하면 서부는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뵐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네.’
지평선이 아득한 하늘 끝자락 너머와 맞닿아 있다. 인상적인 점이라면 서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높이가 낮은 울타리를 쳐놓고 양을 키운다는 것이었다.
황소대공의 부가 남쪽 바다를 통한 교역으로부터 비롯된다면, 사자대공의 원천은 이 풍요로운 대지에 있다.
‘왜 대공가 정도의 자제가 습격당했는지 알만도 하군.’
서부는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토드 일행은 아직 헤젤슈마흐 대공령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하물며 변경백령의 제후조차 자신의 봉역 전체를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보다 광활한 영역을 다스리는 대제후가 봉역 밖까지 영향력을 미치는덴 한계가 있었다.
말을 구한 마을을 떠나온 지 3일이 지났는데, 그 뒤로도 아이터 강을 따라 작은 촌락 다부흐, 벌꿀로 유명한 가슬라우를 경유하여, 소도시 알렌슈타트에서 말을 갈아치웠다.
알레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 인원이 움직이는데, 정말 이것밖에 안 든다고?”
여기까지 다다르는데 일행의 경비로 지불한 금액은 금화 단 2닢.
그마저도 알렌슈타트에서 말 6필을 구매하는 데 쓴 은화가 120닢이었으니, 정확히 예산의 절반이었다.
토드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어차피 먹을 입은 셋뿐이니까요.”
식사하지 않고, 잠을 잘 필요가 없는 하수인들이 이스라를 포함하여 26구.
그야말로 이 땅의 제후라면 누구나 꿈꿀만한 이상적인 고용인들이었다.
파멸의 기사가 안광을 가늘게 뜬 채 중얼거렸다.
【청빈은 기사도 전집에서도 강조하는 덕목이다만··· 본인이 보기에 자네는 드워프들보다도 더한 구두쇠일세.】
헛기침한 토드가 점잖게 말했다.
“어허, 이스라. 식비를 절약했으니 그 덕택에 제가 무일푼으로 성채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에잉, 그렇다고 가판대에 있는 서적 한 권 구매하는 것에 그리 인색하게 굴 필요가 있나?】
토드는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이스라. 그 자리에서 10분 만에 다 읽어버렸잖습니까. 그러면 구태여 살 필요도 없는 게 아닙니까?”
고삐를 거머쥔 파멸의 기사가 턱을 치켜들었다.
【아, 물론 순수한 기사도 문학이었다면 소장 가치가 있었을걸세! 허나 괘씸하게도 중간에 주인공이 마법을 깨우치더군!】
쇠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평소에 책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닌데, 요즘은 누구나 마법사를 선망하잖소. 그편이 출세하기엔 제일이니까.”
【현 세태가 개탄스러운지고! 무릇 사내라면 누구나 무인을 꿈꾸지 않던가!】
답답해하는 이스라를 향해 쇠렌이 답했다.
“엘프들도 총기를 들고 다니는 마당에, 무인으로 출세하는 건 글러 먹었지. 그에 비하면 마법사는 싸움질 외에 유용한 구석이 많고.”
【흠! 그깟 유약한 요술쟁이들이 뭘 할 수 있다고! 그치들이 하는 것이라곤 군주들 옆에서 아첨을 떨거나 같잖은 요술이나 피우는 게 아닌가?】
키득거린 쇠렌은 어깨에 멘 손도끼를 가리켰다.
“오죽하면 내가 후스카를 노릇도 때려치우고 제국으로 내려왔겠나. 이제 칼잡이들의 시대는 저물고 있소.”
쇠렌은 회한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천공을 가르는 붉은 궤적이 중년의 눈동자에 맺혀 희미한 불꽃처럼 아른거린다.
“스칼바냐르인들은 더 이상 도끼와 작살로 용을 사냥하던 전사들의 노래를 부르지 않소. 아낙들은 차라리 부동항에서 고래 기름을 건져오거나, 제국 쪽에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내를 신랑으로 원하지. 그건 제국도 마찬가지 아니요?”
토드 역시 깊이 동감했다.
막상 죽음의 기사가 10 레벨에 해금되었음에도, 오랫동안 일으켜 세울 인재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성전사를 플레이할 때만 하더라도 이 땅엔 기사들과 고명한 칼잡이들이 많았다. 제국에 이름 높은 무구의 달인들만 수십 명이 넘었다.
그러나 토드가 이 땅에 떨어지고, 사령술사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나서야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판타지 RPG라면 주축을 이루는 대표 직업군, 전사 계열에 해당하는 강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남은 이들이라곤 기량도 미약하고, 한탕이나 해 먹으려는 파락호들뿐.
‘지금 배경은 말로만 듣던 후반부 시나리오겠지.’
오래전 커뮤니티에서 보았던 글이 떠오른다.
게임 출시부터 한 캐릭터만 붙잡고 수만 시간 가까이 자동으로 진행을 해보니, 자신과 더불어 뛰놀던 검사, 사제, 오크, 다양한 괴물들, 판타지의 신비로운 요소들은 온데간데없어졌다던 괴담 같은 이야기.
원작은 오픈월드를 표방하다 보니, 실질적인 엔딩이 전무하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캐릭터의 성장이 한계에 이르면 다른 캐릭터를 잡거나, 아예 접어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누구도 이 세상의 종막이 어떤 형태인진 모른다.
신화와 영웅들마저 사그라들어 망각 속으로 묻히는 때. 이런 흐름 속에 빛의 신이 침묵을 지키는 것마저 과연 우연일까.
토드는 쓴웃음을 흘렸다.
‘···현실적이라 오히려 무섭네.’
낡은 세계는 고요하게 죽어간다.
그리고 죽은 거목의 유해를 양분 삼아 새싹이 피어나듯이 죽음으로부터 생소한 질서가 탄생한다.
새로운 세계는 변덕스러운 봄기운처럼 미처 피조물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성큼 앞서오기 마련.
옛 세계를 그리워하기만 하는 자들은 새로운 토양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말라간다.
살아남기 위해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엄한 순리다.
이에 파멸의 기사는 노을녘을 등진 채 읊조렸다.
【설령 전장에서 기사의 가치가 다하는 때가 오더라도, 분명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최후의 한 명은 남아있을 테지!】
천천히 땅거미가 지상을 뒤덮는 가운데, 망자의 안광만큼은 횃불처럼 밝게 타올랐다.
【본인은 그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진 본인의 사명은 끝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흐, 어련하시겠소. 기사 양반. 난 그런 숭고한 위인이 못 되는 놈이라.”
이스라도 딱히 반박하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에겐 본인의 사명이, 그대에겐 그대의 사명이 있는 법이지.】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알레시아가 작게 툴툴거렸다.
“무식한 놈들끼리 괜히 석양을 보곤 폼이나 잡아대긴. 대체 저런 기사를 어디서 찾아낸 거야? 사령술사라니 어디 수백 년 된 무덤이라도 들쑤셨어?”
알레시아도 며칠간 동행하면서 이스라도 망자라는 걸 눈치챘다. 여전히 갑주 속 인물이 누구인진 알지 못했지만.
토드는 가늘게 미소 지었다.
“의외로 제가 발견했을 당시엔, 비교적 신선한 상태였다고 해두죠.”
순수한 진실을 고했을 뿐인데, 알레시아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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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하게도 바퀴살이 빠져 마차가 전복되는 일이 있었다. 급한 대로 엘프 망자의 갈빗대를 하나 빼내 보강했다.
“이게 맞아?”
비록 알레시아가 좋지 못한 시선을 보냈지만, 불가피한 조치였다. 토드 일행 중엔 제대로 마차를 수리할 기술자도 없을뿐더러, 드넓은 평원에 꼼짝없이 고립될 순 없었다.
“늑골 정도면 튼튼한 축에 속합니다. 적어도 이틀은 더 달릴 수 있을 겁니다.”
“······.”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토드 일행은 헤젤슈마흐 대공령의 수도, 루벤부르크에 도달했다.
‘수렵제까지 하루 남았나. 아슬아슬했네.’
사자대공이 다스리는 도시답게 사방에 붉은 군기가 나부꼈다. 방어용 성벽은 구릉진 경사를 따라 동쪽의 강굽까지 이어졌는데, 곳곳에 설치된 성채와 별채는 예스러운 인상을 풍긴다.
사실상 방어적 기능보단 화려함과 편의에 신경 쓴 느낌이었다.
누가 감히 이곳을 공성할 엄두나 내겠냐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도리어 지나오는 길에 있던 요새들이 더 철통같았지.’
대공령의 상속권을 두고 개최된다는 소식 탓인지 성문 앞으로 구불구불한 줄이 이어져 있었다. 아예 천막까지 펼친 잡상인들은 대공령까지 찾아온 이들을 상대로 장사까지 벌이고 있었다.
사방에 다채로운 냄새가 가득하다. 향신료의 매캐한 향과 소금기 짙은 강물 내음, 민물고기 비린내, 석쇠에 피운 불에 지글거리는 기름이 익어가는 냄새까지.
고개를 두리번대던 쇠렌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크으, 냄새 한 번 쥑여주는구만.”
알레시아도 시장한 참이었는지 연신 침을 꼴깍거리며 눈을 굴렸다.
행렬이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토드 일행 역시 마차는 하수인들에게 맡겨두고 김이 오르는 부어스트와 빵 세 덩이를 구매했다.
알레시아는 입술에 기름기가 묻은 줄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마, 맛있다···.”
“노점상에서 이런 걸 드셔본 적 없으십니까?”
그녀는 부어스트를 재차 베어 물며 대꾸했다.
“어렸을 때, 언니가 시장에 데려가서 사줬던 뒤론 오랜만에야.”
생전에 자매의 관계는 돈독했던 모양이다. 알레시아는 시끌벅적한 시장을 돌아보며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도 이렇게 사람이 많았지. 언니는 어려서부터 키가 커서 나를 지켜주곤 했었어.”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거릴 뿐 아니라, 수레와 화물 상자까지 널려있어 일대가 비좁았다. 미처 앞을 보지 못한 사내가 돌연 알레시아 앞으로 끼어들었다.
‘이런.’
그보다 한발 앞서 파멸의 기사가 알레시아를 재빨리 잡아끌었다. 난입한 사내는 이스라의 어깨에 부딪혀 밀려났다.
【이보게! 앞에 사람 지나가고 있지 않나! 눈 좀 제대로 뜨고 다니시게!】
이스라의 항의에 통나무를 짊어지고 가던 사내가 인상을 구겼다. 뭐라 대꾸하려던 사내는 상대적으로 위쪽에 있는 이스라의 머리를 보곤 황급히 꼬리를 말았다.
“시, 실례했소.”
코웃음을 흘린 이스라는 알레시아를 놓아줬다.
【아가씨. 그대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은 그대를 지켜줄 하인들도 없지 않나.】
파멸의 기사는 망토 자락을 가다듬곤 먼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영애는 이스라의 충고에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토드의 물음에 알레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 어. 아무것도 아냐.”
시장에서의 소동을 뒤로하고, 토드 일행은 대공의 궁전에 들어섰다. 입구의 좌우로 늘어선 선대 황제들의 석상과 고개를 쳐들고 포효하는 사자 조각상은 지나가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선사했다.
그야말로 사자의 소굴에 들어온 셈이다.
침을 삼킨 토드는 목을 매만졌다.
‘침착하자. 태연함이 관건이다.’
그는 넌지시 하수인을 향해 속삭였다.
“이스라, 대공 앞에서 지켜야 할 품위. 제 기사로서 잘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가 엄지를 들어 올렸다.
【걱정 말게!】
전날 미리 갑주에 새겨진 문양은 모두 마력을 흘려 꺼트렸다. 최대한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상시 유지되는 아우라는 모두 정지시켰고, 육신을 잇는 마력은 섬세하게 은폐해뒀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남은 건 오롯이 어머니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마차가 멈췄다.
먼저 뛰어내린 알레시아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거구의 인영이 있었다.
“내 딸!! 무사했더냐!!”
내성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고함에 이스라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성량이군. 과연 드넓은 봉역을 다스릴 만한 배포에 어울리는 목청이네.】
‘목소리 큰 거론 당신도 밀리지 않아요.’
이스라가 외치는 기합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 지금 보니 그녀의 우렁찬 목청은 역시 가족력과 관련 있는 모양이었다.
“아! 아빠, 좀! 외빈도 있는 앞에서 이래도 돼?”
“하마터면 너마저 잃는 줄 알았다!! 이 아비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줄 아느냐?! 마음 같아선 기사단과 모든 병력을 출정시켜서라도 인근과 외곽을 샅샅이 뒤지려고 했는데, 수렵제만 아니었어도···!!”
이미 장녀를 잃었던 경험 탓인진 몰라도, 대공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체통도 모르고 알레시아를 부둥켜안은 사자대공은 영락없는 철부지 아빠에 가까웠다.
얼핏 저 광경이 우스꽝스러워 보일진 몰라도, 오히려 토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저 남자가 사자대공, 리케르트.’
2m에 육박하는 거구, 거기에 가벼운 예장용 갑옷을 입고 있어도 육신의 윤곽을 숨길 순 없다.
정말 인간이 아니라, 사자가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일찍이 조우했던 무구의 달인, 세르지오 경이 노쇠하여 황혼기에 접어든 검객이라면, 사자대공은 기량이 절정에 달한 전사였다.
타고난 혈통이 우수한 건지,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는 것인지 몰라도 평상시에 흐르는 기운 자체가 남다르다.
더욱이 저 정도로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할 줄이야. 숨이 더욱 막힌다.
한창 부녀는 회포를 나누더니, 돌연 사자대공이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알레시아가 자신이 습격당했다는 걸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유형화된 살기를 마차에 있는 토드조차 느낄 정도였다.
맹수 앞에 놓인 피식자처럼 온몸을 꼼짝할 수도 없었다.
【오호, 이건 본인도 생소한 느낌이로군. 실로 저 사내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네.】
방금 자신은 압박감에 정말 죽을 뻔했다. 토드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겨우 숨을 헐떡였다.
도리어 호승심을 느꼈는지, 이스라가 어깨를 들썩였다. 최대한 마력을 감춰둔 탓에 안광이 빛나진 않았다.
【한번 붙어보고 싶군!】
그럼에도 강렬한 반향 탓에 이따금 희미한 불빛이 투구에서 새어 나오려 한다.
“···이스라, 상대는 대공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언동에 신중해야 합니다.”
【아쉽도다. 저만한 강자라면 좋은 싸움이 될 것 같거늘.】
연신 대공에게 속삭이던 알레시아는 헛기침하곤 마차 쪽을 향해 손짓했다.
“아버지, 절 습격자들로부터 구해준 이들을 소개할게요.”
“···고명하신 헤젤슈마흐 대공 전하. 소인은 장의사 토드 하워드라고 합니다.”
공손하게 부복하는 토드를 따라, 쇠렌 역시 어색하게 예를 갖췄다.
둘을 살핀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덕분에 내 딸의 안위가 무사했으니. 헌데 내가 듣기론 여느 기사가 그 습격자들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들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토드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혹시라도 들키면?
일단 극적인 부녀상봉이니, 감동의 도가니가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돌아온 장녀의 실상을 알고 나면 사자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할 것이다.
코앞까지 접근한 토드는 손을 벌벌 떨었다.
‘무슨 일개 인간이 대악마보다 강해···. 이게 말이 되는 집안이야?’
확신했다. 비록 레벨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이쪽도 무조건 90 이상이다.
절그럭!
사바톤의 금속성이 요란하게 울린다. 이스라가 마차에서 내렸다. 동시에 파멸의 기사를 향해 따라붙는 사자대공의 시선.
즉각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무인답게 곧장 상대를 가늠하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위아래로 움직이는 눈동자로 보아 특히 체구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를 목격한 토드의 심장이 철렁였다.
‘설마!’
투구는 보수와 염색을 거듭하면서 형태가 달라졌고, 망토를 덮어 갑옷까지 완벽하게 가려놨다. 하지만 신장 자체는 생전과 변함없다.
더욱이 이스라는 180cm에 가까운 장신인 만큼, 아버지인 사자대공이라면 대번에 자신의 장녀와 엇비슷한 키라는 걸 알 것이다.
자신이나 쇠렌을 봤을 때와 달리, 확장된 사자대공의 동공만 보더라도 반응이 상이했다.
사령술사는 천길 낭떠러지 위로 펼쳐진 외줄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스라···.’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 이스라는 당당히 첫발을 내디뎠다.
철컥, 철컥, 철컥!
시야는 15도 위, 늠름하게 정면!
목에는 힘을 빳빳하게 준 채, 걸을 때마다 주먹을 쥔 양팔은 앞으로 12인치, 뒤론 6인치로 힘차게 내젓고, 발과 다리는 곧게 편 채 걷는다!
파멸의 기사는 자신의 주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했고, 고스란히 이행했다.
가뜩이나 이스라는 갑옷에 망토까지 걸친 탓에 특유의 뻣뻣함이 극대화된 상태. 발을 내디딜 때마다 판갑 부위들이 철컥대는 소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
유심히 이스라를 살피던 사자대공은 해괴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직각 보행이라는 게, 열병식처럼 대규모 인원이 발맞추는 거면 모를까, 단독으로 행동하면 그만큼 어색한 광경이 없다.
지켜보던 호위 기사들이나 시중들도 수군거렸으나, 굴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간 파멸의 기사는 대공 앞에 이르렀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일세! 누구냐고 묻는다면, 본인의 이름은 이스라! 명예를 추구하는 편력기사로다!】
비로소 서로를 마주한 부녀.
【본인은 수렵제에 참가하기 위해 왔다!】
찰나의 적막이 흘렀다.
곁에서 지켜보던 토드는 순간적으로 교수대에 목이 내걸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내 이스라를 훑어내리던 사자대공이 피식 미소를 흘렸다.
“하하, 재미난 친구를 데려왔군.”
‘눈치 못 챘다!’
토드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자기가 생각해도 그토록 기품있던 딸이 설마 저런 해괴한 자세로 걷고, 말할 거라곤 상상도 못 하겠지.
나름 실력은 갖췄어도, 어딘가 모자란 인물 정도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잠깐. 이거 지금은 이렇게 무마하긴 했어도, 이러면 나중에 돌아올 반향이 더 커지는 거 아닌가?’
지금은 통과 의례를 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수렵제나, 그 이후의 일정을 생각해보면 대공을 접견할 일은 더 있을 것이다.
분명 사령술사는 어머니의 은혜 덕에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데, 토드는 다한증에 걸린 것처럼 얼굴이 촉촉해졌다.
대공령에서의 숨 막히는 첫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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