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64
164
육신은 그 자체만으로 생애가 담긴 기록이다. 토드는 숱하게 시신을 부검하면서 생전에 그가 어떤 삶을 향유했는지 유추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진 알 수 없다. 부검만으론 정신까지 꿰뚫어 볼 순 없으니까.
‘생전과 사후의 괴리감이 극심한데.’
망자들은 생전의 모습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있다. 단지 육신의 부패로 인해 발생한 손실이나 외형 변화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
그에 비하면 알레시아가 증언하는 생전의 모습은 별개의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파멸의 기사는 여태껏 토드가 만나본 이들 중 가장 호전적인 인물이다. 저돌적인 성미 탓에 매번 토드도 설득하는 데 애먹을 정도였으니까.
상상력이 풍부한 토드조차 이스라가 고상하게 앉아서 책장을 넘기는 장면은 좀처럼 연상이 되질 않았다.
‘이스라는 분명 생전의 편린을 조금씩 떠올리고 있어.’
일찍이 그녀는 세르지오 경 앞에선 자신이 대공녀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일축했었다.
‘···어쩌면 대공녀 일라리스와 자신이 별개의 인물일 거라 진심으로 믿고 있는 걸지도.’
자아가 강한 망자들은 사후의 자신을 경멸하기 마련이다. 대체로 제정신이라면 부패하고 쇠락한 망자로서의 상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이를 반박하는 대표적인 반례가 이스라다.
결투 재판 때도 그랬지만, 이스라는 특히나 자신의 나약함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공가에서 자라난 영애. 명예를 추구하는 파멸의 기사.’
이 땅에 있는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겠지. 여태껏 이스라의 행적을 지켜봐 온 토드다. 거기에 알레시아로부터 자초지종까지 듣고 보니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살아있다는 건 결국 언젠간 끝난다는 걸 의미하지. 이스라는 영원히 깨지 않을 기사의 꿈을 꾸고 싶었던 걸까.’
찰랑.
예의 쇠사슬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칭 기사]: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미친 것인가? 직접 겨뤄보겠다!’◆선행 조건: 기사로서의 자신을 자각할 것. [달성]
◇선행 조건: 기사로서의 자신을 가족에게 인정받을 것. [미달성]
─해당 망자의 서사를 완료하면 ‘사령 기사단’의 설립과 그들을 지휘할 단장을 임명할 수 있다. 죽음의 기사 수용량이 7명 증가하며, 관련 은혜가 경지 상승 시 포함된다. 이는 네크로폴리스에서 추가로 연구할 수 있노라.
전말을 파악한 덕분인지 그간 두리뭉술하게 서술되어 있던 문구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이스라의 숨겨진 미련은 가족들에게 기사로서 자신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녀의 신분과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절대 녹록지 않은 시련이다.
하지만 고유 서사의 보상이 토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죽음의 기사를 본격적으로 확보할 가능성이 열릴뿐더러, 그들로 이뤄진 기사단까지 설립할 수 있다니!
‘이건 해야지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어머니.’
원작에서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퀘스트 같은 건 없었다. 모든 서사는 오롯이 플레이어의 선택이 자아내는 대로 흐른다.
토드가 이스라를 죽음의 기사로 일으킨 순간부터 서사는 촉발된 셈이다.
이 복잡하게 얽힌 퍼즐을 풀어내려면, 지금의 상황을 유기적으로 이용해야만 한다.
더욱이 수렵제를 앞두고 대공가의 차녀와 마주치지 않았는가.
“허면 자매분께선 책을 더 읽고 싶으신 마음에 가문을 나서신 걸까요?”
알레시아가 얼굴을 찡그린 채 답했다.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야. 궁중백한테 시집을 가더라도 책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을 테니까.”
알레시아는 입술을 곱씹었다.
“언니는 누구보다도 똑똑한 사람이었어. 자신의 위치나 책무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텐데. 그래서 더욱 모르겠어. 정말 그 자랑 죽어도 결혼하기 싫었다면 평소에 내색이라도 했을 거 아냐? 적어도 내가 보기에 언니가 그런 티를 낸 적은 없었어!”
아무래도 이스라는 생전에 내숭의 달인이었던 것 같다. 기사도 전집의 구절을 달달 외울 정도로 광적인 추종자인데, 친자매 앞에선 감쪽같이 신학 서적을 탐독하는 교양인을 가장했으니.
간신히 웃음을 억누른 토드가 턱을 문질렀다.
“그것참 수수께끼로군요. 그토록 현숙하신 분이 어쩌다 그랬는진.”
“전날 밤까지 아무런 전조가 없었단 말이야. 정말 누구보다도 내가 언니한테 물어보고 싶어. 하다못해 나한테라도 본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거 아냐?”
푸념을 늘어놓는 알레시아의 표정엔 섭섭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작 본심을 물어볼 당사자가 코앞에 서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지극히 역설적이었다.
“어쨌거나 자매분의 일탈이 작금의 상황으로 이어졌군요. 원래대로 혼약이 성사됐다면, 후계 문제가 불거지진 않았을 테니까요.”
알레시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래.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을 두고 고민할 겨를은 없지. 중요한 건 당장 닥친 상황이니. 난 대공가의 일원으로서 내게 주어진 책무를 외면하고 도망치진 않을 거야. 언니와는 다르게.”
과연.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딸이라 하더라도, 알레시아의 눈빛엔 사자의 후예라 불릴 만한 기개가 서려 있었다.
“결국 수렵제에서 승리한 자가 대공가의 후계권을 쥘 테니, 자연히 원활한 통치를 위해 아가씨와 혼약이 성사되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용맹과 힘을 갖춘 자라면 자격은 충분하다고 보는데요.”
이빨을 드러낸 알레시아가 사납게 웃었다.
“내가 계집이라도 사자의 후예야. 배필을 고르는 게 사자의 특권이지. 간택 받길 바라며 기다리는 건 내 성격상 용납 못 해. 난 당당히 수렵제에서 우승하고, 잘난 척하는 가신들 앞에서 짝을 고를 권리를 공언 받겠어.”
명문가의 후예답게 그녀는 야심으로 가득했다.
이런 성미가 혈통의 내력인진 모르겠으나, 이렇게 보면 이스라가 생전에 가출했던 내력이 기행까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토드는 공손히 손을 모았다.
“소인이 감히 아뢰건대, 어쩌면 아가씨께선 저희와 뜻이 합치할 수도 있겠군요.”
눈썹을 까딱인 알레시아가 이스라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 무뢰한. 당신은 대공위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
파멸의 기사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우둔한 아녀자여! 본인이 너그럽게 이해할 수밖에! 계집들이란 기사도 정신의 숭고함을 알지 못하는 족속들이니 말이다!】
이를 갈아붙인 알레시아는 말을 섞는 것도 불쾌한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으! 하여간 기사랍시고 뻗대는 놈들이란. 어쨌거나 난 계승권을 확보하는 게 목표지만, 너희 목적은 수렵제에 참가해서 명예를 얻는 거네?”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저희로서 대공위는 부담스러운 직위이지요. 저희는 다른 사례를 원합니다.”
침음을 흘린 알레시아는 머리를 기울인 채 중얼거렸다.
“뭐··· 너희 같은 떠돌이들이 바라는 사례라면 내가 얼마든지 보상해줄 수 있어.”
오, 역시 대공가의 자제답게 화통한 배포.
눈을 가늘게 뜬 알레시아가 일행을 돌아봤다.
“하지만 너희 실력이 대단한 것과 별개로, 세 명은 인원이 너무 부족해. 신록의 기사가 피워낸 숲은 영산 전체를 뒤덮었어. 대충 수렵제의 규모가 어떨지 짐작이 되지? 그만큼 다른 경쟁자들은 수행단을 단단히 꾸려서 올 거야. 일단 너희 말고도 다른 이들을 고용해야 하니 보수는 그 뒤에 협상하자고.”
토드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구태여 다른 용병들을 고용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입술을 뾰족하게 모은 알레시아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확신해? 어떤 시련이 내릴지도 모르고, 하물며 그 넓은 숲을 고작 너희 셋이서 맡을 수 있겠어?”
“어차피 수렵제까지 남은 기한이 촉박하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뜨내기들로 인원수를 채우느니, 성가시기만 할 겁니다. 장담컨대 제 권능으로 충분합니다.”
눈살을 찌푸린 알레시아는 재차 토드를 훑어내렸다.
“권능? 네가? 기껏해야 의사라더니.”
향로를 꺼내든 토드가 불길한 미소를 흘렸다.
“제가 아가씨께 원하는 사례는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보여드릴 주문에 대해서 함구할 것.”
알레시아는 가볍게 코웃음쳤다.
“그래 봐야 얼마나 대단하다고. 눈앞에서 조악한 요술 좀 부릴 줄 안다고 날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난 그런 사기꾼들을 숱하게 봐왔어.”
서서히 마력을 일으킨 토드가 향로를 흔들며 읊조렸다.
“토드 셰우드가 부른다. 일족의 계율을 위배한 축출자들. 그대들의 칼날에 숱하게 묻혀온 피로 호명하나니.”
향로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시체들에 스며든다. 사방에 깃든 요사스러운 기운에 알레시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젠 나를 위해 그 칼을 휘두르라.”
이들은 피의 업이 짙다. 대공가 영애를 노리고 습격할 정도면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살수 집단이겠지.
‘드디어 신속한 발걸음 특성을 얻는구나.’
아쉽게도 판가우 때 키레가 죽지 않았던 탓에 엘프 시신을 일으킬 기회는 없었다.
사령술사로서 하수인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움도 없다. 엘프 망자들은 비틀거리는 기색 없이 스프링처럼 유연하게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
‘과연. 섬유 구조 자체가 인간보다 월등한 건가? 탄성이 비교도 안 되게 좋네.’
알레시아는 시체들이 일어나는 모습에 다소 놀란 눈빛이었으나, 의외로 토드를 향해 멸시 어린 시선을 보내진 않았다.
“당신, 사령술사였구나. 성 힐데가르트 수녀원을 도왔다던.”
“서부까지 그 소식이 퍼졌을 줄은 몰랐군요.”
수녀원이 있는 아덴티아 포스텔룸과 헤젤슈마흐 대공령도 제법 거리가 있는데, 설마 알레시아가 그 일을 알고 있을 줄이야.
“우리 외가가 레흐만 백령에 있어서, 아덴티아 포스텔룸과 가까워. 이따금 그쪽 소식을 전해 듣는데, 덕분에 당신 이야기도 들어봤어. 그때도 수녀원을 습격한 무리를 퇴치했다며?”
“이거 부끄럽군요. 실상 제가 기여한 바는 미미합니다. 거길 지키는 성전사들이 의무를 다했지요.”
콧대를 치켜든 알레시아가 얄미운 미소를 흘렸다.
“미미하긴. 당신이 거기 잠든 성인분들을 죄다 일으켰다며? 그분들로 침입자들을 제압했고.”
머쓱한 미소를 흘린 토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건 분명 비밀에 부쳐진 일일 텐데, 어째 아가씨께선 자세히 알고 계시군요.”
자칫 외부로 새어나갔다간 수도원의 명예 실추나 토드도 모독죄로 기소되는 등의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는 탓에 아는 이가 몇 없을 텐데.
“잘 알 수밖에. 레흐만 백작가는 대대로 명망 높은 성전사들을 배출해온 가문이다? 그중에 2차 성전군에서 영웅으로 활약하신 분이 거기 잠들어 계셨거든. 너라면 만나봤을 것 같은데.”
성전군이라니 대번에 떠올랐다. 예의 철퇴를 휘두르던 백골의 망자. 성 알베르투스였던가.
어찌 보면 먼 조상님을 깨운 셈이니 토드가 재빨리 고개 숙였다.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응? 아니. 당신이 사과할 필요까지야. 오히려 아덴티아 포스텔룸에선 잠들어있던 성인들이 깨어나 기적을 발현한 거라며 당신을 추앙하는 여론도 있다던데? 주교단이 간신히 억누르고 있긴 하지만.”
아덴티아 포스텔룸에서 떠나온 지 꽤 시일이 흘렀으니, 그 뒤의 동향이 어떤진 토드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토드는 온전히 스물다섯 명의 엘프 망자들을 마차 앞에 세웠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숙련된 용병보다 월등한 기량을 갖추고 있지요. 더욱이 숲에선 기민하게 움직일 테니, 수렵제에서 활약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을 돌아보던 알레시아는 그래도 비위가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표정을 구겼다.
“그래도 이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나름 신성한 수렵제인데, 시체들을 끌고 참가한다면 형평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내 평판에도 오명을 끼칠 것 같은데.”
토드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엘프들은 시취가 잘 나지 않지요. 평소에 망토를 눌러 씌우고, 얼굴에 방부 처리만 잘 해둔다면 들킬 일은 없을 겁니다.”
낯빛이 창백한 거야, 깊은 숲 출신이라 둘러대면 그만이고. 더욱이 엘프의 시신은 잘 부패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태생부터 망자에 최적화된 인재들이라 볼 수 있었다.
‘이리 아까운 몸뚱이들을 수목장으로 낭비한다니. 수십 년 동안 썩지도 않고 비료로 고통받는 것보다 차라리 망자로 일어나는 게 낫지.’
물론 지금 같은 경우엔 당사자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악인들에겐 가차 없죠.
알레시아는 조금 껄끄럽긴 해도 추방자들의 강함을 직접 체감했던 덕에 수긍했다.
“···하아. 왜 정체를 숨긴 건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듣기론 하워드같이 촌스러운 성씨가 아니라, 다른 이름을 썼던 것 같은데?”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토드 셰우드입니다. 저로선 아가씨가 사령술사에 대한 시선이 어떤지 확신할 수도 없고, 저희와 의견이 부합되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극도로 신중하구나. 하긴, 이런 힘을 다루려면 그렇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조심스럽지 않은 자들은 이미 목이 날아갔다.
“그럼 혹시 이놈들한테 습격을 지시한 배후도 캐낼 수 있어?”
하수인들을 독촉해봤지만, 망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
입맛을 다신 토드는 향로를 거둬들였다.
“망자들은 생전의 기억을 일부 잃습니다. 다만 전원이 침묵하는군요. 아무래도 이들은 중개인을 통해 접선한 식이라 배후자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칫, 철저하게 안배를 해두긴 했네. 그럼 이대로 전모를 밝힐 기회는 영영 없는 건가?”
“만약 대공령으로 돌아갔을 때, 이 엘프들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아가씨에 대한 습격을 주모한 범인이겠지요.”
“좋아. 우선 아버지께 이 소식을 알리고, 당신들을 고용하겠어. 셰우드, 당신의 비밀을 지키는 것 외에 마차로 금화 한 대 분량이면 보수로 충분할까?”
계약 처리가 화끈해서 마음에 드는군. 토드는 죽은 말들을 일으키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더불어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도 수습하겠지만, 관이 없는 탓에 가까운 마을에 들릴 때까진 시취가 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흐응, 난 또 죽은 하인들까지 일으켜서 걷게 할 줄 알았더니. 시체 조종하는 마법사치곤 사자에 대해 최소한의 예우는 지키는 거야?”
“제가 그렇게까지 악독한 놈은 아닙니다. 적어도 저분들은 피로 얼룩진 죄업이 없으니까요.”
알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 정돈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25구의 하수인과 더불어 시신까지 실어야 해서 그런지 마차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결국 알레시아와 더불어 토드 일행은 따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죽은 말에서 올라오는 악취 탓에 알레시아는 시종일관 손수건으로 코를 막은 채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속을 게워내지 않고 꿋꿋이 가는 게 용할 지경이네.’
반나절 가까이 걸려 인근 마을에 들릴 수 있었다. 죽은 말이 움직이는 걸 보고 사람들이 기겁했으나, 두둑한 은화 주머니로 무마할 수 있었다.
말도 죄다 갈아치우고, 마차 한 대를 추가로 구매하여 시신을 운구할 관까지 구비했다.
이제 헤젤슈마흐 대공령에 입성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알레시아는 갑주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자대공이라면 분명 갑주를 파악하겠지.’
일단 임시방편으로 널찍한 망토를 사와 이스라에게 둘러봤다. 촌락에서 파는 가죽답게 감촉이 형편없었지만, 재질이 거친 덕에 무리 없이 견갑의 튀어나온 장식도 가릴 수 있었다.
【하, 하! 하. 이걸 걸치고 있으니 몸집이 2배로 불어난 기분이군! 강력한 장사처럼 보여 마음에 든다!】
파멸의 기사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갑옷은 가렸지만, 사자대공은 특출난 무인이라 눈썰미도 좋을 거야.’
듣기론 숙련된 기사들은 걸음걸이나 몸의 동작을 보고도 상대를 유추해낼 수 있다고 들었다.
평생토록 지켜본 혈육이었으니, 갑옷을 가리더라도 들킬 위험은 충분했다.
물론 현장에서 정체를 들켰을 때를 상정한 계획도 마련되어 있긴 하다. 다만 토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림은 수렵제까지 무난하게 공인받고 상속권이라는 확실한 카드를 쥔 채 협상하는 방향이었다.
“이스라. 듣기론 사자대공은 일신의 무력이 상당한 기사라고 합니다.”
【오, 그런가? 그도 본인과 마찬가지로 명예를 추구하는 자렸다!】
“이미 그는 상당한 명성을 쌓은 자이니만큼, 당신도 대공 앞에서 꿇리지 않으려면 그에 맞게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야겠죠?”
【물론이네!】
대면에 앞서 걸음걸이부터 교정한다.
토드는 앞뒤로 힘차게 팔을 휘저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특히 모서리에서 수직으로 발목을 비틀어 방향을 전환하는 모습이 인상 깊은지, 이스라가 안광을 반짝였다.
【아니, 그 절도있는 보행법은 무엇인가?! 이건 기사도 전집에 실린 궁중 예절편에서도 본 적 없는 것 같다만!】
일단 말투는 따로 교정할 필요 없다. 거기에 이런 식으로 걷는 사람이 설마 자기 딸이라곤 알아보지 못하겠지.
토드는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속삭였다.
“이건 직각 보행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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