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76
176
버려진 땅에는 각기 다른 사연이 있기 마련이나, 오래된 신화나 전설마저 퇴색된 시대에 인간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금역은 많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발을 들인 섬은 유별난 장소였다.
라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용케 이런 곳을 찾아냈네.”
앞서 걷던 콘라트가 답했다.
“나 이외엔 존재를 아는 이들이 드물지.”
기묘하다. 공기 중엔 구름처럼 희미한 수증기들이 떠다니는데, 발을 디딜 때마다 지르밟힌 토양은 바스락대며 부서졌다.
습윤한 대기와 황량한 토양이 공존하는 지대라니. 모종의 권능이 간섭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얼굴을 찡그린 라노가 되물었다.
“어떻게 너 말고 다른 놈들이 모를 수 있어?”
하물며 이 섬은 무수한 상선들이 오가는 팔색조 군도의 교차점에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자취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다못해 배가 난파해서 해안가에 밀려올 수도 있는 거잖아. 칼리고 해적 놈들이 소굴로 삼기에 딱 좋아 보이는데.”
“여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허락되지 않은 자들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불운하게 들어선 놈들은 해류에 선박이 갈기갈기 찢겨나가지.”
그의 답변은 도리어 모호함을 가중했다.
“말이 돼? 아무리 좆만한 섬이라도 이곳 전체를 보자기 뒤집어 씌워놓듯 감추는 거로도 모자라, 주변의 물결까지 비틀었다고?”
콘라트 옆에 따라붙은 라노가 비웃음을 흘렸다.
“여태껏 내가 수없이 요술쟁이들 멱을 따봤는데, 그런 놈들 수천 명을 데려와도 이만한 대단위 주문은 상시 유지할 수 없어. 헛소리 말고, 그냥 네 비밀 별장이라 얼씬도 안 하는 거 아냐?”
대공이 코웃음쳤다.
“내가 이런 벽지에 살 거라 생각하나? 더욱이 여긴 내 소유의 영토가 아니다.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지.”
대화할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워낙 팔색조 군도에 널린 섬이 많은 까닭에 해적 나부랭이 따위가 일시적으로 점거할 순 있어도, 감히 소유권을 주장하진 못한다.
남부 대양은 황소대공의 연못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힘이 닿지 않는 해역은 없었으니까.
루오폴트 가문은 일찌감치 남부 대양의 패권을 장악했고, 항로를 점거한 부로 지금의 권세를 축적한 셈인데, 그 이외에 타자가 소유한 사유지가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슬쩍 행렬의 뒤를 돌아본 라노가 낮게 중얼거렸다.
“네가 여기서 무슨 별난 애완동물을 키우는진 모르겠는데···”
으레 타지에 행차할 때마다 대동하던 고지대 용병들은 없고, 대신 송아지 수십 마리와 보석이 가득 담긴 수레를 하인들이 끌고 있었다.
“아주 상전처럼 떠받들어 모실 기세네. 너랑 1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도, 아직도 내가 놀랄 구석이 남아있을 줄이야.”
감히 대공의 면전에서 빈정거렸음에도, 콘라트를 보필하는 호위들은 제 주인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젠 익숙한 일이었다.
피식 웃은 콘라트가 낮게 속삭였다.
“이런, 아직 놀라기엔 이른데. 지금부턴 언동에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라노. 그가 사소한 변덕이라도 부렸다간 우린 잿가루조차 남기지 못할 테니까.”
라노는 사납게 눈매를 구겼다.
“지랄. 내가 맘만 먹으면 죽이지 못하는 놈은 없어. 보아하니 두 마리씩이나 애지중지 보살피는 건 아니잖아?”
“흠, 그럼 어찌 그 사령술사 놈은 처리하지 못했을까.”
콘라트의 역공에 라노는 급히 숨을 들이켜곤 바득바득 이를 갈아붙였다.
“그 새끼가 카타콤에 숨어있지만 않았어도 진작 모가지를 날렸을 거라고! 씨발, 해골 무더기는 사방에서 튀어나오지. 신성 때문에 은신은 사용할 수 없어. 난 대부분의 권능을 봉쇄당한 채 싸워야만 했다고.”
툴툴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즐거운지, 대공의 입가가 가늘게 씰룩거렸다.
“네 변명이 구차한 건 네가 잘 아리라 믿는다.”
라노는 중지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대단하신 존재를 만나러 가면서, 왜 호위는 최소한으로 데려가는 건데? 평소엔 별 대단하지 않은 일 가지고도 하인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시더니.”
“어차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소란 일으키는 걸 질색한다.”
뒷머리를 양손으로 받친 채 그녀가 투덜거렸다.
“호위가 무의미할 정도라면, 구태여 날 끌고 올 이유는 더 없어지는 것 같은데.”
“그는 주기적으로 긴 잠을 잔다. 지금 절기엔 한창 잠들어있을 시기지.”
얼굴을 일그러트린 암살자는 자신의 목에 걸린 것을 흔들어 보였다.
“아, 그러셔? 누군 이 거지 같은 물건 때문에 잠도 못 잔다는데, 팔자 좋게 늘어져 있다니 잘됐네. 칼침이라도 놓아주면 깨어나려나?”
“명줄을 재촉하고 싶다면야.”
그 뒤로도 30분가량 걸은 뒤 일당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응달이 짙게 드리운 동굴이었다. 기묘하게도 동굴 주변엔 연못에 가까운 깊은 웅덩이들이 드문드문 섬처럼 흩어져 있었는데, 선명한 노란빛이 눈에 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라노는 눈을 감고 일대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토탄 특유의 냄새가 일대에 배어있다. 의외로 여긴 오래된 땅이었다.
골똘히 감각에 집중하던 라노는 황무지의 마른 흙먼지 냄새 속에서 이질적인 향을 맡았다.
지독한 비린내.
라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날생선이나 썩은 고기 따위가 풍기는 악취와는 사뭇 다르다.
“···뱀. 그것도 큰 뱀이나 풍길 체취잖아. 바실리스크나 와이번처럼.”
대공은 단호히 입술에 손을 올렸다.
“감은 좋군. 하지만 네가 방금 언급한 세 짐승을 그 앞에서 언급하지 않는 게 나을 거다. 특히 뱀이라는 말은 더더욱.”
문득 라노는 동굴 너머로부터 시선을 느꼈다.
완전한 암흑. 한참 범인을 초월한 자신의 신체로도 감히 들여다볼 수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시야 끝자락에 희미한 빛이 일렁인다.
아득한 저편에 닿은 광구의 편린이었다.
그걸 인지한 순간, 라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씨발, 뭐야. 저게···.”
그녀의 창백한 낯빛을 응시하던 대공이 입을 열었다.
“내 협력자들에 따르면 외곽선이 통째로 분철된 공간이라 하더군.”
슬쩍 품에서 와이어를 꺼내든 라노는 끝에 단검을 걸어두곤 동굴의 어둠 너머로 던졌다.
“······.”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질 않는다. 천천히 철사를 당겨보니, 정확히 어둠에 걸쳤던 칼날면이 예리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단검을 집어 든 라노의 표정이 굳었다.
“이거, 니힐다르가 직접 내려준 단검인데.”
“엄연히 저 너머는 신들의 권좌가 있는 곳과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은 자신의 안식처에 들어오는 통로를 비틀어버린 정도에 불과하지만.”
철사를 갈무리한 라노는 손가락을 곱씹었다.
“···저거, 진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거 맞아?”
히죽 웃은 대공은 무릎을 굽혀 무성하게 자라난 골풀을 걷어냈다.
“여긴 그의 영토라서 가능한 현상이다. 저만한 권능을 밖에서도 부릴 수 있었다면 이 땅이 온통 용암으로 끓어오르지 않았겠나.”
대공은 발치에 드러난 석판을 가리켰다.
“이 봉인은 특정한 요건을 갖춘 이들의 피에만 응답한다. 너라면 필히 열 수 있을 거다.”
“거기까지 네 따까리 흑마법사들이 밝혀낸 거야?”
그가 비틀린 미소를 흘렸다.
“나름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가며 알아냈지.”
자신들이 만나려는 존재가 누구인진 명확해졌다. 왜 콘라트가 그를 받들어 모시기까지 하는 지도.
라노는 침을 삼켰다.
‘유클에 나오던가? ···아냐. 아니지.’
원작, 유어 크로니클에서 출현하는 개체 중 비슷한 아종들이 널리긴 했어도, 대부분 지성이 저열한 야수에 가까웠다.
사령술사라는 반례를 생각해보면 원작에서 구현되지 않았거나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던 요소들이 실존하는 경우는 이따금 있다.
그러나 설정에도 없으면서 절대자에 가까운 존재가 등장하는 경우는 전무했다. 슬쩍 석판을 훑어본 라노의 눈앞에 글귀가 떠올랐다.
「 입장 요건: 레벨 99. 」
원작에선 보통 90 레벨을 전후로 컨텐츠가 없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그 시점에서 현타를 느끼고 다른 클래스로 갈아타거나, 게임을 삭제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엔 만렙 컨텐츠가 준비되어 있다.
그녀의 입가가 삐뚤어졌다.
“···하.”
이 땅에서만 30년 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을 줄이야.
천부적인 호기심이 자신을 강하게 충동질한다.
평소엔 통제가 원활하던 맥박이 의사와 상관없이 가쁘게 뛰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도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이 빌어먹을 놈의 세계는 계속 파내도 밑천이 드러나질 않잖아.’
구역질 나는 몸뚱이에 갇혀있지만 않았어도, 온전히 이 세상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입술을 훑은 라노는 넌지시 콘라트를 돌아봤다.
“콘라트, 너 내가 이럴 줄 알고 그동안 꽁꽁 숨겨둔 거구나?”
대공이 짙은 미소를 흘렸다.
“아이들에겐 내용물을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보다, 직접 꾸러미를 풀어보도록 유도하는 게 낫지 않나.”
히죽 웃은 라노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흐흐, 이 기특한 씹새끼. 넌 날 너무 잘 알아.”
거침없이 손바닥을 그은 암살자는 석판 위에 핏방울을 떨궜다.
암살자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아무렴. 난 영원한 애새끼 같은 놈이지.”
드래곤이 있다는데 이걸 어떻게 참아.
다 뒤지건 말건, 그 잘난 쌍판떼기라도 봐야 성미가 풀리게 생겼는데.
그그긍─
라노의 혈액이 스며든 비석 아래로 지면이 들썩이더니, 동굴 입구에 드리워졌던 어둠이 거품을 일으키며 녹아내렸다.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별조각들의 광채에 라노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리고 손을 뗀 찰나.
전신의 솜털이 곤두선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고, 발을 디딘 땅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라노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한발 물러섰다.
어느새 모두의 위로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
무릎을 굽힌 콘라트가 낮게 읊조렸다.
“마지막 불티, 아즈-트룽엔이다.”
영락없는 파충류 계통의 쭉 찢어진 눈동자가 오연히 지면을 굽어살핀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비늘 아래로 피보다 붉은 외피는 단단한 갑주처럼 짐승의 몸체를 감싸고 있었다.
작은 산이 서 있는 것만 같은 장중함보다도, 라노는 짐승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글귀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 0 」
하찮은 필멸자의 육신이 잘게 떨렸다.
젖혀진 턱이 다물어질 줄 모르고, 통제를 벗어난 육신이 절로 짐승처럼 허덕이는 소리를 흘린다.
“흐, 흐흐. 흐흐···.”
뱀 앞에 놓인 생쥐.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또한 이 세상이 미력한 피조물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곳인지도.
여태껏 자신이 누리던 위세는 허상에 불과하다. 언제라도 일거에 붕괴할 수 있는,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세워져 있던 셈이다.
순전히 저 생물체의 변덕만으로.
‘이 좆망겜. 저딴 게 왜 있는 거야.’
육신을 지탱하던 무릎이 휘청였으나, 라노는 가까스로 자세를 다잡았다.
짐승 앞에서 몸을 숙이지 않은 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슬쩍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모양새가 조소를 흘리는 것 같았으나, 라노는 꿋꿋이 시선을 마주쳤다.
“강맹한 아즈트룽엔.”
콘라트의 부름에 드래곤은 앞발을 들어 올리며 화답했다.
─루오폴트. 나의 친우여.
얼씨구. 친우? 흑마법사들이랑도 짝짜꿍하더니, 드래곤이랑은 언제 친목질까지 해뒀대.
만약 자신이 드래곤이랑 안면을 텄다면 분명 하루도 못 참고 여기저기 떠벌렸을 텐데, 여태껏 자신뿐만 아니라 측근들에게도 숨겨뒀던 콘라트의 인내심이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간 잠을 청하셨더라도, 당신이라면 의식을 초월하여 물질계의 정세를 관조하셨겠지요.”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보아하니 본녀가 그대의 전쟁에 참전하길 바라는 듯하군.
짐승의 지칭어에 라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진상할 공물들은 선수금입니다. 칼리고에서 수입한 패옥들과 쾨니디툼의 평원에서 살찌운 송아지들이죠.”
대번에 팔을 뻗은 짐승이 송아지를 낚아채 갔다. 어린 소가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드래곤은 주둥이를 다물었다.
콰직. 콰작. 으직.
느긋하게 입가에 묻은 선혈을 훔친 드래곤이 만족스러운 듯 혓바닥을 날름댔다.
─한 해를 넘기지 않은 것들인가. 육질이 썩 훌륭하도다.
“당신께 바치는 진상품은 오로지 최상급만을 선별했답니다.”
수레 앞으로 나아간 드래곤은 앞발로 보석을 움켜쥐곤, 옅게 날숨을 흘렸다.
유선형의 비강에서 흐릿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섬광이 튀기며 새파란 불꽃이 짐승의 손아귀에 잡힌 보석 더미를 통째로 녹여버렸다.
마치 고양이과 짐승들이 그루밍을 하듯, 느긋하게 손바닥을 핥아 올렸다.
라노는 속으로 짐승의 터무니없는 식성을 욕했다.
‘저저, 미친년. 사파이어 한 알이면 광대 놈 뽑기를 3번이나 돌릴 수 있는 값인데. 저걸 생크림 처먹듯 핥고 자빠졌네.’
보석을 음미하던 드래곤이 눈동자를 가늘게 치켜떴다.
─···뭐어, 좋다. 다만 모든 교전에 나설 필요는 없겠지. 하찮은 조무래기들이야 본녀가 상대하기엔 격이 맞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입니다.”
─더욱이 전장이 될 곳은 제국일 테니, 불가피하게 처소를 떠나야 할 터. 언제나 본녀가 머무를 곳은 지열이 충만한 양지여야만 하고, 충분한 카펫을 깔아두거라. 가급적 비늘이 쓸리지 않도록 다크 엘프 직조공들이 짠 것이면 좋겠군.
‘지랄한다. 진짜.’
꼴값도 저만한 난리가 없었다.
“하명하신 대로 행하겠나이다.”
그래도 드래곤이 아군으로 참전한다면, 전쟁에 변수가 없으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라노가 보기에 포탄을 쏟아부어도 저 비늘이 뚫릴 일은 요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협상이 수월하게 풀리는가 싶었는데, 짐승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저 계집.
드래곤의 눈동자를 뒤덮는 피막이 가늘게 뜨여 있었다. 으레 사람이 교묘하게 눈웃음을 흘릴 때처럼.
─너는 니힐다르의 무희로구나. 미물치곤 드물게 성위(星位)의 반열에 가까워져 있고. 나름 미물들 사이에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겠지···
위아래로 라노를 훑어내린 호박색 동공에 탐욕이 어렸다.
─가지고 놀기엔 이만한 인형도 없겠구나. 본녀가 출전하기 전까지, 저 계집을 노리개로 부리겠다.
언제나 냉철했던 콘라트는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라노 역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반발했다.
“뭐? 누굴 노리개로 부려? 지금 가져온 뇌물만 하더라도 일개 왕국의 예산에 맞먹는 값인데! 이건 양심이 터져도 정도가 있지···!”
이빨을 드러낸 드래곤이 고개를 들썩였다.
─벌써부터 반응이 재미나군. 저 계집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대의 요청은 거절하겠다.
그간 안면을 트여온 콘라트로선 저 오만한 생물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라노. 아즈트룽엔님께선 포악한 성정을 지닌 분이 아니시다.”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라노가 속삭였다.
“씨발. 아무리 그래도 나더러 드래곤 수청을 들라고? 개새끼야. 이건 아니잖아···!”
그녀가 거부했다간 모든 대계가 어그러진다.
드래곤의 합류는 자신의 당위성을 입증하기에 내세울 선전용 도구에 가까웠다.
“···비록 저래 보여도, 엄연히 여성체이시다. 네 원칙에는 어긋나지 않잖나.”
대공의 간곡한 속삭임에 라노는 곁눈질로 드래곤을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좀.
“개썅, 이건 내 범위 밖인데···.”
라노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드래곤이라면 외형 변화 주문도 사용할 수 있겠지.”
“나도 어떤 권능까지 부리시는진 알 수 없다. 피조물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니까.”
짐승은 어김없이 손아귀에 보석을 움켜쥐곤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입가에 묻은 부산물은 틈틈이 핥으면서.
라노가 깊게 한숨을 흘렸다.
“···3배로 입금해라.”
“황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니힐다르가 네게 요구하는 무게의 금을 한 번에 갖다 주지.”
그럼 불꽃 가능.
“까짓것, 씨발. 그럼 해보지. 뭐.”
어차피 돌아가겠다는 일념만으로 무수한 이들의 피를 이 손에 묻혀왔다. 이 땅에서 암살자가 겪어온 일대기는 투쟁의 생애. 이제 와서 가릴 겨를이 더 있기나 하던가.
혹여 저 도마뱀이 선을 넘는다면 콧구멍에 단검이라도 꽂아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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