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75
175
대공의 집무실.
사제의 손끝을 바라보는 리케르트와 알레시아, 두 부녀의 눈빛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기도문을 되풀이하던 사제가 광륜표를 거둬들였다.
“···이분에게선 정신에 행해진 어떠한 마법적 간섭이나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마를 짓누른 리케르트가 깊게 탄식을 흘리는 가운데, 파멸의 기사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마침내! 사령술사. 이제 이곳의 용무는 끝난 것인가?!】
어지간한 신성으론 타격조차 받지 않는 고위 망자라 하더라도, 1시간씩이나 의자에 앉아서 사제의 경건한 목소리를 듣는 게 꽤 고역이었던 모양이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뚜벅뚜벅 알레시아 앞으로 걸어간 파멸의 기사는 절도있게 손을 내밀었다.
척!
【알레시아 양! 아무리 숭고한 의식을 거쳐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필경 여인의 몸으로 대공령을 다스리는 데엔 적지 않은 고난이 따르겠지! 그대의 앞길에 고귀한 선조들의 용기와 신들의 보우가 있길 바라네!】
알레시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았다.
“내 앞에서까지 그 말투로 말하는 걸 보면, 언니··· 정말 진심인 모양이네.”
급격히 헛기침을 흘린 파멸의 기사가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알레시아는 건틀렛을 꼭 잡아줬다.
말없이 제 자매를 바라보던 알레시아는 이내 그녀를 놓아줬다.
고귀한 영애, 이젠 대공령의 상속자가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집어 들었다.
“용맹한 기사님. 제 목숨을 구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와 대공령을 둘러싼 곤경을 도와주신 공로에 감사드립니다. 천부 솔마르께서 그대를 돕기를.”
망자의 안광이 흡족한 빛으로 일렁인다.
【별말씀을. 숙녀분.】
애써 쓴웃음을 삼킨 알레시아가 속삭였다.
“혹여 헤젤슈마흐 가문의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방문해주세요. 그대에겐 적색궁의 문을 열어두겠습니다.”
넌지시 가문으로 돌아올 여지를 시사하는 말에 파멸의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사양하리다. 단지 본인은 투쟁을 갈구할 뿐이오. 무릇 기사에겐 자신의 맹위를 떨칠 싸움터가 필요한 법이외다!】
집무실을 둘러본 파멸의 기사가 나직이 말했다.
【이곳에서 본인이 구할 명예는 더 없는 듯하군.】
빙긋 웃은 상속녀는 기사를 향해 묵례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잠시 리케르트를 곁눈질하던 이스라는 이내 몸을 돌려 거침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씁쓸한 미소를 흘린 대공이 사제를 향해 손짓했다.
“수고했네. 호프만. 이만 자리를 비워주겠나?”
사제까지 자리를 비우고, 집무실엔 대공과 알레시아, 토드만이 남겨졌다.
리케르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가 쾨흘링에서 저 아이를 찾아냈을 때, 정녕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던가.”
대공의 눈동자에 미련이 묻어난다.
“근래엔 저런 갑주가 점차 도태되는 추세이나, 자체적인 방호력은 갖췄네. 가늘게라도 숨이 붙어있었을 수도 있지 않나.”
혹여 사령술로 일으키는 게 아닌, 살릴 수도 있지 않았냐는 물음.
“제가 이스라를 발견했을 당시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쾨흘링에서의 일은 당장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다. 토드는 패주하던 슈테판 변경백의 군세, 그들을 가축처럼 도살하던 이리공의 병사들을 설명해줬다.
종래엔 드워프 포병대를 저지하기 위해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던 이스라의 행보까지도.
대공이 탄식을 흘렸다.
“···그만한 유물을 입고도 끝끝내 납탄에 쓰러졌단 말인가. 분명 그 갑주엔 착용자를 보호하는 주문들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스라는 생전에 검기를 사용하는 경지까진 도달하지 못했잖습니까. 성취가 미진한 자로선 유물에 담긴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지요.”
알레시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에. 그럼 언니는 유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집안을 뛰쳐나간 거야? 무모함에도 정도가 있지···”
“알레시아.”
대공의 꾸지람에 영애가 입을 다물었다.
“추후 이스라의 상태를 살펴봤을 때, 정말 처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그녀는 납탄 세례를 맞아 낙마한 뒤에도 처절하게 항전했었다. 창칼에 맞고, 추가 사격으로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
넝마나 다름없었던 육신을 기워 맞췄던 건 상당한 고행이었다.
당시의 참상을 전해 들은 대공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내 딸, 일라리스는. 그렇게 전사했군.”
“예, 전하. 본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고들 하지요. 허나 저는 분명 쓰러진 잔해로부터 외마디 함성을 들었습니다.”
사령술사가 또렷한 미소를 흘렸다.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을 거부하고, 피조물들의 숙명에 분노하던 목소리가 생생했지요.”
“···막연히 사령술사들은 죽은 자라면 멋대로 일으켜 수족으로 부리는 족속들이라 알고 있었거늘. 언제부터 그들이 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단 말인가?”
토드는 향로를 거머쥔 채 답했다.
“과거, 저희 일파가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젠 사령술의 명맥을 잇는 계파는 저와 제자들뿐입니다. 제가 흑색 학파의 수장으로 있는 이상, 이전의 과오는 반복되지 않을 겁니다.”
“허면 일라리스를, 계속 수하로 두겠단 말이더냐.”
대공의 음성에 은은한 분노가 묻어났으나, 토드는 개의치 않았다.
“이스라는 제 기사입니다. 그의 소명이 무위를 널리 떨치는 것이니만큼, 숙원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의 동행은 계속되겠지요.”
“누구 멋대로 데려간다고···”
눈자위를 번뜩인 대공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콘라트를 대적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콘라트는 장차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황위를 탐내는 놈이지. 네놈은 그 아이를 두 번 죽일 셈이냐?!”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콘라트가 황금 옥좌에 대한 야욕을 천명한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흑마법사들까지 끌어들였음에도, 서부 대교구가 눈감아주고 있지요. 장차 몰아닥칠 전화는 제국 전역에 미치리란 건 명백합니다.”
사방에서 들끓는 도적. 역병과 기근의 징조들.
온갖 불온한 소식들은 이 땅을 충분히 달궜다.
지상을 쓸어버릴 폭풍을 잉태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은 진작에 배양되었다.
단지 도화선을 당길 자만이 남았을 뿐.
“설령 놈의 탐욕이 내전으로 비화된다 하더라도, 대공령은 안전하다. 적어도 네놈의 곁보다는!”
아마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권세를 갖춘 대영주들의 권역령은 안전하겠지. 하지만 문제는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하면 고삐가 풀릴 흑마법사 놈들이 문제다.
“콘라트는 수하의 흑마법사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뒤, 그들을 축출하려는 속셈일 겁니다. 허나 황소대공은 황위에만 매몰된 나머지, 사교도들의 해악성을 낮잡아 보고 있습니다.”
토드는 평온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흑마술 행위는 필연적으로 무저갱의 존재들을 부릅니다. 아득한 편린만으로도 물질계가 위태로워질 놈들이죠. 대공의 방조는 생명의 절멸을 도래할 겁니다.”
그때 가선 대공령마저 안전할 수 없다.
이 땅의 어디도 목숨을 담보 받지 못한다.
아무래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는지 부녀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죽음을 겪었던 아이를 다시 전쟁터로 이끌겠다니. 이걸 나더러 납득하라고.”
대공의 탄식에 알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언니에겐 명예가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가치라고 생각해. 아빠가 일찍이 황제의 부름을 저버리지 않고 동방 원정에 참전했던 것처럼.”
“······.”
대공이 고개를 떨궜다.
“언니가 생각하기엔, 그게 이상적인 기사의 모범이고, 그토록 닮고 싶어 했던 아빠의 모습이었잖아.”
영애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말했다.
“언니를 보내줘. 아빠가 진정 언니를 존중한다면.”
그럼에도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토드가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전하, 이스라에게 직접 의중을 여쭤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일라리스의 의사를···?”
사령술사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걸렸다.
“예. 유감스럽게도 전하완 대화를 나누려는 의사가 없는 듯하니, 하인을 보내 직접 물어보시지요.”
판을 깔아보자.
대공과의 질 자신이 없는 내기를.
“저는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만약 이스라가 대공령에 남겠다면, 기꺼이 저는 승복하고 그녀와의 서약을 해지하겠습니다. 허나, 저를 따르겠다면 전하께선 추후 개최될 라이히슈타크에서 베르나드 공왕 전하에 대한 지지를 천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자리를 박찬 대공의 눈동자가 이글거린다.
“······좋다. 만약 네놈이 이 자리에서 한 발언을 번복한다면, 그땐 내가 직접 네놈을 베고, 고위 성직자로 하여금 내 딸에게 걸린 주문을 완전히 풀어내마.”
토드는 히죽 웃었다.
“바라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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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내려앉은 숲의 잔영이 시야 너머에서 너울쳤다. 파멸의 기사는 허리를 숙이며 가지들 밑을 거닐었다.
비록 한기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지만 짧게 숨을 들이쉬며 밤공기를 만끽해본다.
생전에 검을 쥐고 휘두르던 시간은 언제나 해가 저문 뒤였다. 복작거리고 소란스러운 낮과 달리, 밤의 고요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달래주곤 했었다.
잠들 시간이 되면 책을 읽어주곤 하셨던 어머니가 자신을 감싸듯 손을 펼치고 계신 것 같았다.
【······흐흠.】
퍽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린 이스라는 이파리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달빛에 반짝거리는 꽃들을 훑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이런 벌판의 꽃들을 참 좋아하셨지. 자신에게 화환을 만들어 걸어주시기도 하셨는데.
멀리서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를 뒤로하고, 이스라는 단호한 걸음으로 숲을 걸었다.
한때 신록의 기사가 권능으로 자아냈던 호랑가시나무 숲은 온데간데없고, 잘 단장된 초목들과 더불어 고즈넉한 헤젤슈마흐 가문의 영묘가 드러났다.
여느 묘비 앞에 다다른 망자는 투구를 벗곤, 자신이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헤쳤다.
【······.】
한참 동안 비석을 들여다보던 중, 가지가 바삭대며 부러지는 소리에 이스라가 안광을 번뜩였다. 자신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걸음걸이가 가상하긴 하다만, 무구의 달인에 도달한 이후론 섬세해진 감각마저 속일 수 없었다.
【···누구냐!】
이스라의 고함에 전나무 가지가 들썩거린다. 이파리를 털어낸 인영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말에서 훌쩍 내린 이가 고개를 숙였다.
“그간 강녕하셨소? 아가씨.”
백발이 성한 사내. 비록 등은 굽었으나, 강직해 보이는 체격은 한때 그 역시 무인이였음을 드러냈다.
【···에크하르트 경.】
사자대공뿐만 아니라, 선대까지 보필했던 노장. 이젠 검을 내려놓고 집사장을 맡은 에크하르트였다.
“리케르트와 한마디도 섞지 않으셨다 들었소이다. 아무래도 저희 사이엔 비밀이 있으니, 아가씨가 이를 지키려는 의도였다고 믿겠습니다.”
능청스럽게 눈썹을 깜빡이는 태도에 이스라는 쓴웃음을 흘렸다.
에크하르트에겐 마음의 빚이 있는 탓에, 그녀 역시 정중하게 대했다.
【······그걸 누설했다간, 경의 목이 날아갈 테니까요.】
그가 맞장구를 쳤다.
“아무렴요. 아무리 리케르트라고 하더라도, 용서받진 못하겠지요. 아무리 소인이 명줄이 다해가는 뒷방 늙은이라 하더라도 편안히 침상에서 죽는 게 유일한 소망이지, 열 받은 리케르트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기는 건 사양이외다. 죽어서도 꿈에 나올라.”
진저리를 치는 모습에 이스라가 쓴웃음을 흘렸다.
가문을 뛰쳐나갔던 날, 자신을 위해 본궁의 문을 열어줬던 건 에크하르트였다.
그는 틈틈이 자상함으로 자신과 알레시아를 보살폈으며, 자신이 수련할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었다.
이스라를 바라보던 에크하르트는 옛 기억을 회상하며 운을 뗐다.
“언젠가 본궁에서 열린 무도회장에서 아가씨를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아가씨는 단연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소. 헌데 드레스를 입은 숙녀의 눈동자가 강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 그 자태가 마치 인간의 형상을 취한 안개꽃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오.”
【그랬던가요?】
죽음의 기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지금의 아가씨는 죽은 몸이기에, 혈색이 없고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보이오. 다만 내가 보기에 아가씨께선 살아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서야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구려!”
달빛을 받은 이스라의 모습은 특유의 창백함이 도드라졌다.
“비록 그때와 달리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사내처럼 잘라냈지만, 눈빛은 또렷해졌으며, 움츠러든 몸을 편 모습에선 당당함이 느껴지는군.”
망자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나는 언제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어요. 나는 허리를 조이는 드레스는 불편할지라도, 몸통을 감싼 아마포 위에 철갑조끼를 덧대는 걸 마다하지 않았죠. 숙녀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예절을 배우는 것보다 장검을 휘두르고 대인 격투술을 연마하는 게 즐거웠어요.】
껄껄 웃은 에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선 줄곧 그러셨지요.”
【전 좋은 아내가 되어 가문의 평판을 드높이는 일보다 무인으로서 무용을 떨치는 것에 관해 관심이 있었어요. 비록 아버지는 말괄량이 같았던 저를 누구보다도 증오하셨지만요.”
“전하께선 아가씨가 출타하셨을 때, 누구보다도 그대의 행방을 찾는 데 열중이셨소. 열흘 내내 예배당에 칩거하시며 그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기도 하셨지. 이 늙은이마저 리케르트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오.”
씁쓸한 미소를 흘린 이스라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저를 생각하실 줄은 몰랐네요.】
“리케르트가 가문에선 곧잘 속내를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만, 아가씨를 정말 아꼈소.”
안광을 일렁이던 망자는 낮게 속삭였다.
【한평생을 제게 엄하게 대하셨던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정말 아버지가 가혹한 분이셨다면, 애초에 틈만 나면 뒤뜰에 나가 칼을 휘두르던 저를 절대 내버려 두지 않으셨겠죠.】
에크하르트는 애석하다는 듯 혀를 찼다.
“리케르트 놈도 참 안목이 부족한 게, 제 아들놈보다도 어엿한 기사로 성장하셨는데. 어린 아가씨의 마음을 그리 무참히 짓밟다니! 그놈도 대공위를 물려주고 나처럼 뒤뜰이나 가꾸라고 해야 할 텐데.”
은근한 뒷담화에 이스라가 키득거렸다.
【그래도 도나투스 경도 어엿한 호위기사로 거듭나셨잖아요.】
“에이, 그래도 아가씨껜 못 미치지.”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에크하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아가씨. 가문으로 돌아가시지요.”
서서히 미소를 그친 이스라는 팔짱을 낀 채 코웃음 쳤다.
【결국 당신도 제게 그 말을 하러 온 건가요?】
“그대가 비록 영락한 망자라고 하더라도, 분명 전하라면 아가씨의 상태에 대한 해결책을 충분히 수소문할 수 있을 거요. 더군다나 이미 아가씨께서 세운 무위는 동부 변경뿐만 아니라, 제국에 널리 알려졌잖소.”
이스라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에크하르트가 덧붙였다.
“당초에 셰우드와의 계약은 이제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아가씨의 성취가 높아지지 않으셨소이까. 누가 뭐래도 아가씨는 일라리스 폰 헤젤슈마흐요.”
눈살을 찌푸린 이스라는 조금 격앙된 어조로 대꾸했다.
【에크하르트 경. 나를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나는 가문을 나설 때 이미 헤젤슈마흐의 이름을 버린 바 있었죠. 그때 헤젤슈마흐 가문의 장녀는 죽은 셈이에요.】
그를 손가락질한 이스라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린 채 외쳤다.
【그리고 쾨흘링 땅에서 전사한 날,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갑옷을 훔쳐 기사 행세를 했던 일라리스는 죽어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요. 이미 당신이 기억하던 일라리스는 완전히 죽어서 없어진 거나 다름없어요.】
기사의 눈동자에 맺힌 안광이 세차게 타오른다.
【지금의 나는 사령술사 토드 셰우드에 의해 되살아났으며, 그를 따르는 죽음의 기사, 이스라요.】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발을 디딘 땅이 얼어붙고, 하얗게 서리가 피어났다.
“허나 아가씨. 듣기론 명예를 추종한다 들었는데, 사령술사 셰우드를 섬기는 게 정녕 명예로울진 이 아둔한 늙은이는 잘 모르겠소.”
에크하르트의 의문에 망자가 입가를 비틀었다.
【토드를 섬기는 여정의 꽁무니에는 명성보다는 악명이 주로 따르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소. 그럼에도 나는 비록 망자라는 불경한 몸이라 할지라도, 내 무위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고 싶소!】
망자의 함성에 오한을 느꼈는지, 에크하르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생전에 나는 여인의 나약한 육신으로, 숭고한 기사들을 애써 흉내 내며 과거에 기록된 무인들의 발자취를 좇고자 했었지. 하나 내 성취가 미진하여 전장에서 쓰러졌고, 토드는 그런 부족한 내게 다시 기회를 줬소. 이제는 생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초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지.】
망자는 건틀렛을 쥔 손으로 흉갑을 탕탕 두드렸다.
【이제 본인은 그가 퍼트리는 죽음의 물결에서 가장 앞장선 선봉장이 될 것이오. 토드는 사방에 적이 많고, 사령술사라는 특성상 끊임없이 적들을 만들게 되겠지. 그렇다면 본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내 주인의 적들을 베어버릴 것이오.】
강렬한 원념에 압도된 에크하르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를 향해 안광을 번뜩인 파멸의 기사가 낮게 읊조렸다.
【그 뒤로는 누구나 사령술사 토드의 저주받은 하수인, 이스라의 이름을 장차 모두가 알게 되겠지.】
“···만약 사령술사를 따르는 여정의 끝에 파멸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때는 어떤 심판이 그대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 아니오?”
그 말에 파멸의 기사는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와 내 주인의 파멸을 맞이하겠나이다.】
너무나도 흐드러지게 만개한 미소에 에크하르트는 무어라 목구멍 너머로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홀연히 안개 너머에서 창백한 불꽃에 휩싸인 군마가 다각다각 달려왔다.
묵묵히 말에 올라탄 이스라는 투구를 다시 눌러썼다. 에크라흐트가 재차 입을 떼어 이스라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스라는 그를 향해 큰 소리로 포효했다.
【돌아가라. 에크하르트. 이 이상 헤젤슈마흐에 전할 말은 없다! 사령기사의 앞길을─】
【방-】【해-】【하-】【지-】【 마-】【라-!】
천둥처럼 울려 퍼지듯 터져 나온 기사의 호령에 에크하르트가 타고 왔던 말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어댔다.
이내 이스라는 망설임 없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 하! 하. 달려라! 블루레이!】
혼령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더니, 이내 포탄처럼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하! 하! 하!】
어느새 파멸의 기사는 안개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묘지에는 에크하르트와 그의 겁먹은 말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흐드러진 달빛이 헤젤슈마흐 부인의 묘를 비춘다. 비석 밑에는 이름 없는 들꽃이 한 아름 놓여 있었다. 문득 꽃잎 사이로 반짝거리는 느낌이 있어 무심코 손을 뻗어보니 손아귀 사이로 목걸이가 걸렸다.
“이건···.”
목걸이에는 작은 에메랄드가 고상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일찍이 헤젤슈마흐 부인이 일라리스에게 걸어줬던 것이었다.
달빛을 받은 신록석이 선연히 서글거렸다.
신록석은 5월에 탄생하는 아이에게 주는 선물.
에크하르트는 오랜 세월 헤젤슈마흐 가문에 지내며 그들의 환희와 비탄을 모두 지켜봐왔다.
그중 5월의 말일은, 리케르트와 율리아나가 가장 환희에 찼던 날이었다.
‘오늘이 5월의 마지막 날이던가.’
그는 조심스레 목걸이를 감싸쥐곤, 쓸쓸히 묘지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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