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19
219
그 순간, 토드는 생경한 조짐을 느꼈다.
의식계에 동요가 밀어닥치는 거로 모자라, 통째로 개변했다. 단순히 경지가 상승했을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격렬한 변혁이다.
곧장 의식을 가라앉힌 토드는 자신의 층계를 어림했다.
‘99층.’
여태껏 올라선 족적이 선연하다.
처음으로 받아들었던 대접은 ‘재현’과 연관된 진청색. 기존에 의학 지식이 전무했던 지라 시체를 일으켜도 제자리에서 꿈틀대는 데 그쳤었다. 혈액만 보고도 경기를 일으키는 애송이더러 끊어진 근육과 신경을 이으라니. 터무니없는 요구에 적잖게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젠 뇌 신경 잇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데.’
잔으로 죽음의 기사가 제안되길래 냉큼 골랐더니, 정작 기사 계층이 몰락한 뒤라 눈물을 삼키며 손가락만 빨았던 적도. 최대한 마력의 자취를 감추기 위해 빈약한 어휘력을 쥐어짜 낭송문을 비밀스럽고 고풍스러운 문구로 수식하던 시절까지.
잔잔히 머릿속 일대기를 돌아보는 와중, 토드는 다른 빛깔로 서술된 내력을 발견했다.
자신이 독창적으로 일궈낸 성취가 아니었다. 칙칙하고 음험한 색이 아닌, 열정적인 색으로 발갛게 도드라지는 형태였다.
‘돌이켜보면 카리나의 빌드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마력 운용을 참조한 덕분에 고위 주문을 낭송할 수 있었어.’
줄곧 마력을 절제하는 방식을 고수했다면 여전히 「대규모 호령」이나 「백귀야행」처럼 폼나는 주문들은 터득하지도 못했으리라.
오드람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살덩이로 이뤄진 하수인들만 굴려야 했을 테고,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직진을 외치는 이스라의 행보는 깊은 감흥을 남겼다.
셈에 능한 피에트가 수완을 발휘한 덕에 노획품들을 적절한 값에 처분하고, 방부제를 비롯한 물자를 충당할 수 있었다. 임기응변에 능한 쇠렌은 시급한 일에 소방수 역할로 곧잘 작용했고, 그의 인맥은 판가우와 원활한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수인으로 들인 마르커스는 태양 교단으로 하여금 우리의 진정성을 검증하는 표상이 되었고, 클라우스가 흑마법사들을 교화하는 선봉장으로 자리매김했지.’
거두지 않고, 내치는 방향으로 선택했다면 엇갈릴 서사들이었다.
새삼 자신의 여로는 무수한 선택과 타자들의 서사가 뿌리처럼 얽혀 이뤄낸 총체였다.
차근차근 지난날을 거슬러 오른 사령술사의 시선은 앞을 향했다.
‘이제 올라갈 곳은 없다.’
토드의 눈앞에 더는 올라설 층계도, 대접이나 잔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천장이 그와 맞닿아 있었다.
‘사령술사 캐릭터에게 할당된 서사는··· 마무리했다는 건가.’
원작은 이렇다 할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 비선형적 게임이었다. 필멸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러서도 그 대전제는 변함이 없었다.
‘만렙을 찍어도 크게 체감되는 건 없네.’
경천동지를 끌어낼 힘과 지식이 나에게 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한없이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의외로 성취감보단 허탈하기까지 했다.
토드의 눈앞에 앞서 지나쳐나간 이들의 잔상이 흐릿한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아무개는 애써 다른 사명을 지침 삼아 좌절감을 회피했고, 어떤 이는 하염없이 묵상하며 자신의 번뇌를 가라앉히려 애썼고, 끝내 부러진 채 배회하던 혹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남겨진 유산을 지키는 데 의미를 두었다.
그들은 토드의 과거요, 다른 미래였다.
‘······안톤은?’
다른 이들과 달리, 누군가는 제자리에 묵묵히 선 채 수평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겁게 침묵을 지키던 성전사의 입이 떼였다.
“이 땅에 태어난 성직자가 잠시나마 이방 세계의 꿈을 꾸었을 뿐이다.”
토드가 조소했다.
그러자 안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섭리를 넘어, 두 화신의 시선이 교차한다.
“무엇이 그리도 우습지?”
어깨를 들썩이던 사령술사가 답했다.
“왜들 그리 힘들어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가서요.”
고개를 기울인 성전사는 맹렬한 어조로 그를 힐난했다.
“네겐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다. 순전히 흥미와 변덕이 이끄는 대로 소요에 끌려다니기만 할 뿐.”
성전사의 눈동자는 결연하다. 그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을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여전히 이 땅을 유희쯤으로 여기는 놈이, 어찌 앞서 나아갔던 사사(士師)들의 좌절을 이해할 수 있으리오. 적어도 난 내가 쓰러트렸던 상대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이해하시는 분이 플레이어들 간의 협력을 도모하지 않고, 살해하셨나요?”
“맞물리지 않는 조각들끼리 빗대어봤자 효용이 떨어진다. 난 사명을 잃고 떠도는 자들의 여정을 친히 끝맺어주고, 진정 이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지상에서 악마들이 활개 치고, 다수가 고통에 얼룩진 세태가 올바른 방향이라. 과연 구세주다운 안목이십니다.”
토드의 빈정거림에 안톤이 낮게 뇌까렸다.
“넌 아무것도 모른다. 사령술사. 이 땅은 죽어가고 있어. 사람들은 신에 대한 공경을 잃었지. 신비로운 이야기와 노래들이 그치고 있단 말이다.”
그는 견디기 어렵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하물며 판타지 세상에 화약이라니··· 이런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기술과 제도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풍요롭고, 윤택해졌습니다. 기존의 질서를 지탱하던 신앙이나 사상이 도전받는 건 어쩔 수 없지요.”
괴물이나 도적이 들끓던 산길은 하루에도 수십 개의 상행이 오가는 교차로가 되었다. 당장 토드가 제자들에게 염습을 행할 때마다 소독과 위생을 신경 쓰도록 당부하니 시체독이 악마의 저주라는 미신도 사라졌다.
불가해한 영역으로 여겨졌던 이 세상의 신비들이 걷혀나갈수록, 불안한 미래의 존속을 약속해주던 절대자의 필요성도 옅어진다.
“신에 대한 외경이 잦아드는 건 장성한 자식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듯, 신앙의 쇠락 또한 항거할 수 없는 흐름이다.
“새로운 시대에 신앙이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자립할 가능성을 도모하는 게 온당한 처사가 아닐는지요.”
친히 토드가 정정해줬음에도 안톤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니. 이 땅을 지탱하던 숭고한 가치들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구주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낸 사명이라 의심치 않는다.”
잠시 그를 굽어보던 토드는 혀를 찼다.
“가만 보니 아직 이 세상을 게임쯤으로 치부하는 건 당신 같네요.”
안톤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뭐라?”
토드는 히죽 웃으며 반문했다.
“왜 꼭 주어진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산다는 건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연속인데.”
-너에겐 생물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생리 욕구들이 없어.
-지금 네가 정말 살아있는 인간이긴 할까?
욕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라노의 물음. 달리 말하자면 목적성이 없다는 안톤의 비난과도 맥락이 부합된다.
‘내가 가진 욕망.’
돌이켜보면 유달리 오픈 월드 게임을 좋아했던 건, 삶의 단면을 빼다 닮았기에 그런 게 아닐까.
원작의 이름 그대로, 유어 크로니클. 오롯이 내가 만들어가는 서사. 라노는 구닥다리 작명이라며 까대곤 했지만, 자신은 그럭저럭 본질을 잘 투영한 이름이라 생각했다.
층계의 끝자락에서 토드의 눈가가 휘어졌다.
“여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것을.”
흔히 엔드 컨텐츠는 스토리가 끝난 뒤부터 펼쳐진다고 하지 않던가.
사령술사가 나아갈 길은 앞선 화신들의 족적과는 사뭇 상이했다. 이를 지켜보던 성전사가 눈동자를 부릅떴다.
“너······.”
세이브나 로드가 전무한 철인 플레이 하엔 선택의 기로에서 성공보다도 실패를 빈번하게 마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때로 실패가 성공보다도 흥미로운 서사를 촉발한다. 손해를 감수하길 두려워 효율적이기만 한 선택지만 고른다면, 천편일률적인 결과물만 낳을 뿐이다.
‘그건 재미없어.’
이미 그렇게 살다가 실패했었다.
선택에 따른 인과를 오롯이 감내하며, 축적되는 실패를 디딤돌 삼아 나아가는 것.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령술사는 불확실한 모호함 너머로 주사위를 던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성전사가 신음했다.
“넌··· 누구냐?”
천공의 무수한 이들이 놈을 주시한다. 아득한 세월 동안 별에만 쏠려있던 시선들이 드물게 필멸자의 의식에 따라붙다니.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저는 토드입니다.”
사령술사는 층계가 아닌, 한없이 펼쳐진 거미줄 너머에서 조소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물에 얽혀 옴짝달싹 못 하는 자신과 달리, 놈은 팽팽하게 뒤엉킨 줄 위에서 광대처럼 자유자재로 노닐고 있었다.
그는 영락없는 악동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령술사, 토드.”
짙은 이끼 같은 시선이 성전사의 영혼에 들러붙는다.
“혐오스런 거미의 종자야! 난 네 진실된 모습을 안다! 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짓으로 치장된 존재! 네 말 한마디마다 위선이며, 행동거지는 순 기만이니!”
다급해진 성전사는 은연중에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러나 거미줄이 그를 사로잡았다.
“보통 사람들은 욕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투영한다고 하더라고요.”
유려하게 끌어올려진 토드의 입꼬리와 대조적으로, 안톤의 낯빛은 딱딱하게 굳었다.
“좀 더 역할극에 몰입해보는 건 어때요?”
인간의 형상을 띤 죽음이 속삭였다.
“그럼 진짜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환상은 거기서 그쳤다.
몸을 뒤튼 안톤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의 군막이었다.
새벽녘, 어둠이 내려앉은 천막 내부는 고요했다.
단지 촛불 만이 서글거리며 성상과 광륜표를 밝히고 있었다.
초월자의 반열에 등극한 이후로, 성전사의 육신은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찰나의 묵상이었는데, 끔찍할 정도로 참혹한 악몽이 그의 뇌리에 끊임없이 파고든다.
흔들리던 성전사의 눈동자가 광륜표를 향했다.
‘아버지. 진정 제가 나아갈 길을 비춰주소서.’
구주께선 지엄하시다.
변함없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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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상 강의 지류, 그중 물살이 가장 가파른 유역엔 온통 안개가 짙게 드리웠다.
흐릿한 장막 너머로 불결한 도시가 뼈대처럼 앙상한 윤곽을 엿보인다. 전열을 지키는 옆자리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변은 고요했다. 이따금 희미하게 울리는 신음이 필멸자의 불온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광신으로 무장한 성전사들조차 침을 삼킬 정도로 죽은 자들의 성채에 감도는 음산함은 웅혼했다. 분명 출전을 앞두고 갑옷과 무기에 축도문과 성수를 빠짐없이 둘렀음에도, 특유의 스산함이 뼈마디를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면갑을 뒤집어쓴 성전사장이 접근해왔다.
“성하, 적의 동태는 별다른 조짐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아군의 진입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각 교구 단장들의 배치는 마무리되었나?”
안톤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다소 망설이는가 싶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 헌데, 휘하 성전사들에게서 동요하는 조짐이 엿보입니다.”
“······.”
여긴 사령술사의 영향력이 짙게 깔린 영묘.
아무리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한 자들이라도 어쩔 수 없는 필멸의 본성이 껍질을 까고 튀어나오려 약동한다.
거칠게 입술을 곱씹은 안톤은 망치를 치켜든 채 선두로 나섰다. 성유물에 맺힌 섬광이 일대를 환히 밝혔다. 위치가 고스란히 탄로 나는 걸 감수하더라도, 아군의 사기를 고양시킬 필요가 있었다.
“형제들이여! 보라! 비로소 우리는 저주받은 피조물들이 기거하는 소굴에 이르렀노라!”
권능이 실린 힘찬 음성은 성전사들 뿐만 아니라 성곽 너머 도사리고 있을 놈들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우리가 여태껏 거둬온 승리에 구주께서 함께하셨듯이, 이번 전투도 그리되리다!”
밝게 타오르는 열의가 차차 강기슭에 너저분하던 물기를 몰아낸다.
“가증스러운 이교의 요술사가 지상의 질서를 도탄에 빠트리고 있는데, 이를 묵인하는 건 교회의 서약자로서 의무를 저버린 행태라!”
성전사들은 일제히 흉갑을 두드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쇠붙이들이 절그럭대며 부딪치는 소리가 무시무시한 고요를 깨트리며 장엄한 파형을 이뤘다.
“섭리를 거스르는 삿된 행태를 멸하는 것이야말로 주께서 우리에게 내린 사명이라 의심치 않는다! 헌데 거기 동조하는 배교자들도 있으니, 어찌 타락한 자들을 우리의 형제로 일컬을 수 있겠는가!”
-구주께서 바라신다!
백색 물결 위로 성전 기사단의 군기가 형형색색의 이끼처럼 흩날린다.
“여기서 사령술사와 그 잔당들을 소탕하더라도, 우리의 사명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마귀들이 들끓어 오르는 건 이 땅에 만연한 타락과 배도의 징조가 아니겠는가! 우린 앞서 혹세무민의 본산을 소거한 뒤, 장차 모든 악을 제거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구주의 뜻······”
【듣자 하니 못 참겠구마! 이게 뭔 귀신 밀알 까먹는 개소리여!】
돌연 성벽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청연을 해치고 푸르스름한 형체가 나타났다. 대뜸 안톤을 향해 삿대질한 유령이 형형한 눈빛을 발했다.
【야, 이놈! 안톤아! 네놈이 무슨 염치로 구주를 들먹이느냐! 진정 네놈에게 태양의 뜻이 미치고 있다고 보느냐!】
노발대발 성을 내는 성전군 기사의 혼령 옆으로 홀연히 주교관을 쓴 유령이 나섰다.
【저누마도··· 성사 받은 지, 100년이 넘었담서··· 노망이 들은 게여.】
분명 산 자와 구별되는 흐릿한 윤곽을 띠고 있음에도, 주위에 두른 성광은 명백했다.
유령이 틀림없는데, 신성은 느껴진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간극에 성전사들이 술렁였다.
요란하게 목을 젖힌 성전군 기사가 고함쳤다.
【캬악~ 퉷! 이딴 것들이 성전군이라고! 나 때는 일단 뿔 달린 놈들부터 멱을 치곤 했었어! 내, 관짝 묻힌 노인네들 보기가 부끄럽다! 성인 으르신들 석관에다 똥칠하는, 이 쌍놈의 호로 자식들아!】
【여, 영감······. 너무 상스러운 말은······ 하지 말어. 괜히 호통쳤다가, 피 쏠리면 성불하니께 ···.】
두 성령을 바라보던 안톤은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기젤···!’
저 망령들의 본질은 뼛가루가 담긴 함에 묶여 있다. 아덴티아 포스틸룸에 보관하던 유해를 여기까지 가져온 것이다.
대주교 성령, 라우렌지오가 서책을 들어 올렸다.
【때론··· 성내는 것보담, ···확실한 행동이. 더 나은 훈육이여.】
무덤에서 털어 나온 듯한 과거의 경전은 둔기로 활용하기에 적합할 정도로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