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22
222
안톤은 망치·방패 성전사다.
가장 기본적인 무장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이다.
철벽에 준하는 견고한 방어력과 상대를 부수는 높은 계수의 충격력. 전위를 맡는 선봉장으로서 요건은 훌륭히 충족한다.
‘굳이 단점을 꼽아본다면 둔기의 특성상 절삭력이 약해.’
그 말인즉슨 맷집으로 탱킹하는 피돼지를 잡는 게 수월하진 않다.
【우워어어!!】
나동그라졌던 거인이 안톤을 강타했다. 체중이 실린 일격치곤 거뜬히 막아냈으나, 정면에선 이스라의 장검이 그를 예리하게 노린다.
“음.”
안톤은 가까스로 측면에서 들어온 찌르기를 튕겨냈다. 그는 망치를 비틀어 자루로 이스라를 타격하곤, 방패에 모인 빛을 방출해 거인을 튕겨냈다.
거인이 잠시 밀려난 사이, 성전사는 발을 구르며 재차 내려베기를 막아냈다.
검과 망치가 교차할 때마다 금속음이 아닌, 묵직한 공명음이 네크로폴리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성전사의 무구에 맺힌 정순한 섬광관 대조적으로 파멸의 기사가 쥔 장검엔 혼탁한 휘광이 흘러내렸다.
상이한 색채의 불빛은 섞여들길 거부하고, 격하게 반발했다.
둘 다 기교로 겨루는 성향은 아니라 그런지 동작 하나하나가 둔탁하다. 묵직하나, 느릿하진 않다. 매 충돌은 평범한 인간의 인지력으론 따라잡을 수 없었다.
눈꺼풀이 깜빡이는 찰나에 이미 이스라의 장검은 불티를 일으키며 방패를 긁어낸다. 동시에 안톤은 완고하게 웅크린 채 관절 부위를 노리며 수차례 응수했다.
쩌억!!
망치가 팔꿈치에 작렬한다.
【······!!】
유효타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이스라가 안광을 부릅떴다. 지켜보던 토드조차 눈을 찡그릴 정도였다.
‘워낙 망치가 중갑 상대로 뛰어난 무기라지만.’
괜히 성전사로 고위 언데드만 때려잡는 날먹 빌드를 개발한 게 아니다.
유저 포럼에선 느려터진 공격 속도와 모션 때문에 성전사의 수동성이 과소평가되었지만, 둔기 계통은 중무장한 개체에게 쥐약이다.
안톤은 소위 ‘깡통 따개’로 특화하여 육성한 캐릭터의 정점이었다.
【으아아아!!】
격노에 찬 외침을 쏟아낸 파멸의 기사가 음산한 투기를 발산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갈래갈래 뻗어 나간 서릿발이 성전사의 앞에 이르러 사그라든다.
흔들림 없이 열의를 발산하는 안톤의 모습은 요새와 같았다.
과연 쓰러트릴 수나 있을지 의문마저 들었지만, 이스라는 주눅 들지 않고 장검을 내질렀다.
【강적이군! 강적이야!】
날붙이를 맞부딪치며 이스라가 중얼거렸다.
【네놈만 한 강자를 쓰러트린다면, 이보다 더한 명예도 없겠지.】
안톤이 눈살을 찌푸린다.
“죽은 잔재에 영광 따위 없다.”
【대사가 식상하군!】
쩡!
사선으로 부딪친 병장기들이 무형의 충격파를 일으킨다. 어느 쪽도 밀려나진 않았으나, 무게 중심은 흔들렸다.
안광을 번뜩인 이스라는 즉각 뒷날로 손목을 타격했다. 비록 손에 쥔 망치를 떨구진 못했지만, 틈이 벌어졌다.
잽싸게 궤적을 비튼 칼날이 성전사의 갑옷을 내리긋는다.
카가가각―!!
예리하게 판갑을 절단한 칼날은 옆구리를 긁으며 빠져나갔다.
유동적인 검로에 따른 방향 전환과 쉬지 않는 공세. 양손 무기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흠!”
신음을 삼킨 안톤이 방패로 이스라를 후려쳤다. 급히 밀어내긴 했으나, 회복할 여유는 없다. 파멸의 기사는 금세 자세를 다잡은 뒤였다.
초월자도 피를 흘린다.
이스라는 칼끝으로 지면을 가리켰다.
【본인 앞에서 그런 망발을 지껄인 놈들은 모두 땅 밑에 있거늘.】
이스라는 토드가 심혈을 기울여 벼려낸 검이었다. 오로지 1:1 대인전을 상정하고 육성한 최강의 역작.
내내 무미건조하던 안톤의 눈매가 점점 일그러진다. 역정 어린 표정으로 물들어가는 것이 한결 생동감 있었다.
“오만하구나. 사령술사의 인형아!”
선공을 방패로 막아내고 역습으로 일관하던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 먼저 거리를 좁히고, 적극적으로 맞붙는다.
방패를 부딪쳐온 안톤이 위팔을 후려갈겼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상완골이 으스러지고, 뼛조각들은 살 밑에서 노닌다.
그럼에도 파멸의 기사는 광인처럼 웃었다.
콰직.
성전사의 흉갑 한가운데가 일그러진다. 부서진 파편이 폐부를 압박했다.
【하, 하! 하.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전법이다!】
거칠게 헐떡인 성전사가 빛 가닥을 뽑아냈다.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칼날이 옆구리를 찢어발겼다.
【기사도 전집에서 아픈 곳은 두 번 찌르라 일렀으니!】
망치 자루가 넓적다리를 찍었으나, 이스라는 개의치 않았다. 안톤이 상체를 방어하는데 급급한 사이, 그녀는 집요하게 하단을 노렸다. 기어코 칼날이 무릎을 쑤시자 안톤의 자세가 무너졌다.
퍼멀을 쥐곤 강하게 투구를 후려갈겼다.
쩌억!!
두개골이 울리는 충격에 안톤이 허덕였다.
자신의 안위 따윈 내던지고 오로지 공격에만 매진하는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벌어진 내장을 주워 담을 새도 없이, 목덜미를 노리고 서늘한 예기가 맞닿는다.
본능적으로 어깨를 틀어 목이 찔리는 건 피했지만, 칼날이 갑옷과 더불어 등뼈를 도려냈다.
세상이 하얗게 질리는 격통에도 불구하고 안톤이 읊조렸다.
“솔마르는 태양이요, 발하는 자이라.”
전신에 맺힌 신성이 명멸하며 이스라를 튕겨냈다. 빛이 살갗 위의 상흔들은 메꿨지만, 육신에 드리워진 내세의 그림자까진 걷어내지 못했다.
망자의 검에 맺힌 찬기는 필멸자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늘이 서서히 그를 삼키고 있다.
죽음?
아직 자신에겐 못다 한 사명이 남아 있다.
죽어가는 이 땅을 구원할 인간은 나뿐이다.
놈의 목숨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자신이 안배한 과실에 지나지 않았다.
취하기 위해 불러들였고, 수확할 정도로 영글 때까지 인내했다.
그런데도 고작 그놈의 소환수 따위한테 고전하고 있다니!
안톤이 이를 악물었다.
“구주의 광명은 오롯이 현세를 살아가는 이들만을 비추노니.”
그가 망치를 치켜들자 세찬 광휘가 모여든다. 식겁한 이스라는 검날을 비켜 세웠다.
【제길! 그놈의 성가신 빛!】
망치는 이스라를 내리치는 대신, 지면을 두드렸다.
쩌저적!!
벌겋게 융용된 표면에 이스라는 발목을 잡혔다. 그녀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린 틈을 노려 안톤은 마르커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마르커스의 보조 덕분에 엇비슷하게 우위를 점하던 구도다. 토드가 급히 호명했다.
‘대작!’
【우오오아!!】
도약한 거인이 몸을 날려 진로를 막아 세웠으나, 섬광이 번쩍였다. 순식간에 안톤의 신형이 마르커스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쩌엉!!
마르커스는 가까스로 성검을 세워 일격을 막아냈다. 심문관 출신이라 대인전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기량에 있어선 명백히 열세였다.
“구주께선 이교도보다도 배교자를 가증스러워하신다.”
이스라는 여전히 마그마 지대로 변한 토양을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살점 거인이 가세하긴 했어도, 안톤은 우월한 힘으로 둘을 몰아붙였다.
“네게 그 검을 들 자격은 없다. 수도회의 탕아여!”
【옳고 그름의 겨를을 가르는 게 필멸자들의 몫이라 보는가?】
힘겹게 맹타를 받아낸 마르커스가 속삭였다.
【너는 순전히 천상의 뜻을 곡해하고 있을 뿐.】
안톤은 거인의 주먹을 후려치며 답했다.
“교단은 이단에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붉게 달궈진 신성 문자가 마르커스의 이마에 새겨진다. 표식을 찍었다는 건, 작정하고 배제하겠다는 뜻.
‘저걸 마르커스가 버티진 못해.’
여기서 다른 하수인들을 투입해봤자 1초도 견디지 못한다. 네크로폴리스에서 101 레벨의 성전사를 저지할 만한 존재는 그나마 저 셋이다.
그렇다고 마력을 사용하여 개입했다간 즉각 위치가 발각된다. 신성에 통달한 고위 성전사라면 찰나의 틈이 나는 즉시, 자신을 죽이러 달려들 거다.
당초 살점 거인이 묵직한 공격을 받아내고, 마르커스는 축도문으로 보조, 이스라가 결정타를 넣는 구도를 그렸었다.
하지만 상식 밖의 힘은 언제나 계산 범주를 어그러트린다.
토드의 하수인 가운데 육체적 기량만큼은 가장 우수한 셋이 합공을 펼쳐도 안톤은 대등하게 맞붙고 있었다. 성전사가 본격적으로 신성을 발휘하자 점차 힘의 축이 기울어진다.
불운하게도 망치가 투구째로 마르커스의 머리를 짓뭉갰다.
【심문관!】
토드의 동공이 바삐 전황을 살폈다.
‘머리가 날아갔어도 계약이 끊어진 건 아냐.’
둘라한의 장기를 살려 완전히 무력화되진 않았다. 그러나 거인과 이스라를 뒷받침하던 축복이 끊겼다.
동시에 안톤의 입이 열렸다.
“보아라.”
한마디에 창공이 요동친다. 토드 역시 즉각 마력을 끌어올려 일대에 흩어진 뼛조각들을 일깨웠다.
‘대작, 이스라! 막아!’
놈은 지독하게도 권능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하수인들의 공세를 막아냈다. 방패를 앞세워 굳히기에 들어간 성전사는 뚫어낼 도리가 없었다.
“구주께선 언제나 지상을 굽어···”
콰득.
뾰족하게 깎은 뼈마디가 아래턱을 헤집었다.
‘목을 노렸는데.’
저 정도면 인지를 넘어선 반응이다. 이스라와 살점 거인을 상대하면서 권능에 집중하는 와중, 무의식중에 불의의 암습까지 재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성전사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놈의 시선은 정확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
“···보신다. 한결같이.”
쿠구궁!!
천사가 내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레보다 요란한 소음이 하늘에 울렸다.
그들 외에 치열하게 맞붙던 성전군과 네크로폴리스의 하수인들도 일제히 머리 위를 응시했다.
태양에 이상이 생겼다.
환하게 명멸하던 광구 주변에 옅은 띠가 실타래처럼 풀어지더니, 점차 주변이 어둑해졌다.
넋 놓고 천공의 이적을 지켜보던 병사가 중얼거렸다.
“구, 구주께서 눈을 뜨셨다.”
새하얀 구체 안에 흐릿한 얼룩이 요동치는 광경은 눈알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닮아 있었다.
이윽고 그림자가 광구를 완전히 뒤덮고, 음영진 윤곽 너머로 광관(光冠)이 어둠 속에서 밝게 타올랐다.
토드는 입술을 곱씹었다.
‘반대야. 멍청이들아.’
사방에 만연한 어둠과 대조적으로 유독 성전사의 광채가 도드라진다.
“이제 주께선 지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침묵하시니, 대행자가 마땅히 그 뜻을 대신하리라.”
배후에서 일렁이던 빛무리들이 안톤에게로 모인다. 육안으로 보기 힘들 지경이었던 광채가 종래에는 왜곡되어 동시에 여러 겹의 잔상처럼 신형을 비춘다.
광명 속에 안톤이 있었다. 초점이 부서진다. 파편화된 시야 너머로 성전사가 셋, 넷, 그 이상씩 보였다.
편린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눈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 망막이 익어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을 부여잡은 토드는 의념을 보냈다.
‘이스라, 물러서요! 위험합니다! 여기선 전략적 후퇴를···!’
파멸의 기사는 바이저에 한 손을 올린 채 태연히 외쳤다.
【눈이 좀 따가울 뿐이네!】
육안이 아닌, 망자의 시야에 맺힌 상은 더욱 뒤틀렸다. 온 세상이 조각난 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백염 속에서 필멸자들의 염원이 떠돈다.
맹목적 추앙으로 쌓아 올린 광신의 총체.
안톤은 광채를 번뜩이며 이스라를 굽어봤다.
“이토록 거센 빛은 지상의 피조물들조차 견디지 못하지. 하물며 너처럼 그림자에서 비롯된 허깨비들은.”
어깨에 장검을 걸친 이스라가 으스댔다.
【하, 하! 하. 무릇 기사란 주인의 안위가 위협받는다면 물러섬 없이 임하는 게 마땅한 의무인지라!】
“미련하구나.”
【이깟 잔재주로 본인의 눈을 간질여봤자, 네놈은 본인을 지나갈 수 없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갑주가 끓어오른다.
이젠 생김새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교란된 인지 범위 내에서 단지 어렴풋한 형상만 간신히 흔들릴 뿐.
상대가 제자리서 태연히 서 있는 모습과 발을 떼는 동작, 망치를 내지르는 형상이 비쳤다가 사라진다.
카앙!!
이스라가 기적적으로 망치를 튕겨냈다. 하지만 어깨를 내리치는 일격에 견갑이 주저앉는다.
일견 환상처럼 보이는 잔상들은 모두 실체가 있었다. 이스라는 순전히 본능에 의존해 맞서고 있지만, 예측이 빗나갔을 때 치를 대가가 가혹했다.
으직!
【절대로!】
갑주가 깨지고, 관절이 뒤틀린다.
【보내지 않겠다!】
여전히 토드의 눈엔 상황이 읽히질 않았다.
그럼에도 결속 너머로 격렬한 감정의 격류를 느낄 수 있었다.
‘이스라의 존재가 옅어지고 있어.’
쩍! 쩍! 쩍!
주인의 동요에 감응한 하수인들이 눈앞의 상대는 무시하고 올곧이 안톤을 향해 쏟아졌다.
죽은 자들의 격랑 속에서 백광은 고고히 번쩍였다.
‘내가 너무 과신했던 건가.’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화신다웠다.
주신의 대전사가 지닌 권세는 섭리와 이해를 뛰어넘었다.
네크로폴리스에 모인 성전군은 단지 그의 기적을 각인시키기 위한 제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뇌리가 타들어 가면서도 영도자를 추앙했다. 그의 빛이 불결한 무리를 쓸어내길 기원하며.
광란 속에서 누군가가 토드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은회색 갈기가 엿보였다.
“스승님···!”
“산시아?”
“피신하셔야 해요···. 저자도 태양의 광채를 받아내는 게 적지 않은 부담일 테니, 일단 여길 벗어나서 재정비를···!”
힘겨운 목소리에 드문드문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숨이 섞인다. 늑대인간으로 화한 산시아조차 버거울 정도로 광채가 강렬했다.
또 도망치라고?
토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기서까지 도망칠 순, 없습니다.”
“하수인들과 네크로폴리스는 언젠가 다시 세우면 그만이에요. 하지만 스승님이 여기서 쓰러지시면, 모든 게 끝장이잖아요!”
성채야 다시 축조하면 그만이다. 군단의 묘역도 더 있을 테고, 전란으로 뒤덮인 이 땅에서 시신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스라는?’
토드가 자문했다.
‘이스라는 나한테 뭐지?’
번쩍이는 섬광 너머에 파멸의 기사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계약은 끊어지지 않았다.
토드의 갈등을 짐작한 산시아가 낮게 속삭였다.
“이스라 경은 스승님을 위해 시간을 벌고 계신 걸 거에요.”
“······.”
“냉정히 판단하세요. 스승님. 살아남아서라도 대계를 도모하셔야죠! 이대론 이스라 경을 잃을 뿐 아니라, 스승님까지 개죽음당하신다고요!”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것 같은데.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삼아 가까스로 명줄을 부지했었던.
입술을 곱씹은 토드의 입가에 핏기가 감돌았다.
이스라는 재밌는 인간이다.
기사들의 황혼기에 꿋꿋이 낭만을 외치는 사람.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료?
여태까지의 여로를 함께해온 친우?
잘 모르겠다.
‘추후 다른 기사를 구하더라도 기사도 문학 같은 걸 경전처럼 받들어 모시지도 않을 거고, 괴상하게 웃지도 않겠지.’
매사 진지한 태도로 일관하는 건 마르커스로 족하다고. 이스라의 역할을 누가 대체하냔 말이야.
토드의 시선이 산시아에게로 향했다.
“산시아, 눈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절 찾아냈나요?”
뜬금없는 물음에 당황하던 산시아가 어물쩍 답했다.
“예, 네?”
“시간이 촉박합니다. 정확히 답해주세요.”
섬광이 재차 번뜩인다. 일그러진 상으로 투영된 시야 속에서 산시아의 표정은 보이질 않았다.
“그, 스승님의 체취를 찾아서···.”
‘시각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이용했구나.’
늑대인간은 후각이 뛰어나지. 이 난리 속에서 용케 내 냄새를 추려낼 줄이야.
고민하던 토드는 눈을 감아봤다.
눈꺼풀을 닫아도 요란한 빛무리가 장막 속에서 수시로 부딪치며 일그러졌다.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발등이 보이기까지 했다.
‘눈을 감아도 광자가 시신경을 뚫고 들어오는 건가.’
돌연 다른 인영이 접근했다. 바짝 갈기를 세운 산시아가 으르렁거렸음에도, 여리한 신형은 토드에게 거침없이 다가섰다.
연신 바닥을 두드리며 다가오는 걸음걸이 덕분에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소중한 사람인가 보네요.”
소곤대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맞습니다.”
기젤이 반문했다.
“당신이 안톤이었을 때, 저와 비슷한 느낌인 걸까요?”
“그럴 지도요.”
어째서인지 뭉개진 윤곽임에도 수도녀의 얼굴이 미소를 띠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를 사모하시나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릎을 굽힌 기젤은 손을 뻗어 토드의 얼굴을 매만졌다. 안면 근육을 어림하듯, 섬세한 동작이었다.
“저런. 누구보다도 딱한 표정이에요. 토드.”
“···제가. 말입니까?”
손을 떼어낸 기젤이 속삭였다.
“아주 오래전, 태양을 섬기는 신관들은 모두 맹인이었답니다. 토드. 필멸자가 신의 주시를 감내하기 위한 대가였어요.”
그녀는 지긋이 눈두덩을 짓눌렀다.
“덕분에 그들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다른 피조물들이 우러러보지 못하는 주의 광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답니다.”
그녀는 토드의 손을 이끌었다. 평소 눈을 감싸던 천 아래로 손끝이 움푹 찔러 들어간다.
천 아래는 비어 있었다.
“당신의 기사를 구하기 위해선, 어떤 대가라도 감내하실 수 있나요?”
토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알 정도면 싸게 먹히는 장사죠.”
둘 사이의 대화를 경청하던 산시아가 허둥댔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도녀가 미리 준비해온 첩에서 성수에 적신 천을 꺼냈다. 산시아가 말릴 새도 없이, 기젤은 바늘을 겨눴다.
“조금 따끔할 거에요.”
“제가 산전수전 다 겪어온 몸이라, 안구 적출 정도는 거뜬합니다.”
“어머, 그 기사님이 이리 부러울 줄이야.”
으지직···!!
기젤도 레벨 99에 육박하는 강자라 그런지, 단번에 시신경 가닥까지 깔끔하게 뽑아냈다.
덕분에 눈 어귀가 화끈거렸지만, 따스한 기운에 열기는 곧바로 가라앉는다.
곧바로 고개를 든 사령술사가 히죽 웃었다.
“이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