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23
223
빛은 드러내고, 어둠께선 감추신다.
허나 부재 속에 비로소 임재가 있었다.
명멸하는 광채 너머로 시시각각 사내의 형상이 녹아내린다.
육안으론 담기 어려울 정도의 신성을 제 몸에 투과할 줄이야. 무모하나 제법 날카로운 수였다.
하지만 무모함만으론 이쪽도 밀리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빛도 일부에 지나지 않던가.’
거추장스러운 부속물을 제거한 대가로 사방에 산란하던 광채가 집광된다.
보인다면 읽어낼 수 있다.
동시에 시선을 인지한 성전사 역시 곧바로 고개를 틀었다.
‘찾았다.’
제법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빛을 흘린다면 단숨에 좁힐 만한 거리. 발자국을 내디디려던 찰나, 왜소한 인영이 안톤 앞에 마주 섰다.
“정녕 그게 네 뜻이냐.”
수도녀는 단지 미소지어 보일 뿐.
상호 간의 대화는 그걸로 족했다.
벼락처럼 쏟아지는 기세는 눈앞의 여인을 단숨에 짓뭉갤 것만 같았다.
차앙-!
그에 못지않은 속도로 지면을 지탱하던 지팡이에서 칼날이 뽑혀 나온다.
철화가 녹아내린 지면을 지르밟으며 사부작대는 소리. 익을듯한 열기에 배어 나오는 거친 날숨. 그녀는 무구 너머로 짓눌린 공기를 어림했다.
기어코 잔광에 버려진 칼날은 망치를 튕겨냈다.
투웅!!
안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일전에 상대했던 기사와 비교하면 무게감은 부족하다.
칼끝으로 지면을 두들기는 모습에 안톤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 꼴로 내게 대적하려 들다니!”
안톤의 목소리가 겹치듯 울렸다. 고막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포효와 더불어 짧게 끊어치는 연타가 엄습한다.
무자비하게 수도녀를 두들긴 성전사는 방패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바닥을 구른 기젤라가 재빨리 검을 다잡았으나, 망치에서 갈라져 나온 섬광이 상반신을 비스듬히 꿰뚫었다.
“아···.”
그녀가 짧게 탄식했다.
지난 세월 그녀와 더불어 교회의 적들을 부수던 망치가 내리 닥친다. 피에 젖은 머리칼이 흩날리다가 힘없이 가라앉았다.
차라리 일어나지 않길 바랐는데. 수도녀는 칼로 힘겹게 몸뚱이를 지탱했다.
잡아 비틀면 나뭇가지처럼 부러질 위태로운 인간. 안톤이 읊조렸다.
“조용히 수도원에서 여생이나 부지할 것을.”
성전사는 낡은 천 쪼가리 너머 드리운 맹인 수녀의 눈을 응시했다.
“강제로 눈을 열어젖힌다 하더라도 놈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기젤라.”
빛은 언제나 올곧게 나아간다.
이를 대변하는 성전사 역시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않는다.
오로지 정도를 고집한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잠시 놈의 죽음을 유예시키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아.”
인간의 마음은 어찌나 나약한지.
“헛수고에 네 목숨을 던지지 마라.”
단 하나의 예외만은 남겨두고 싶었다.
“토드는···”
핏기를 훔친 기젤라가 속삭였다.
“한때 당신이었어요. 안톤.”
망치를 쥔 손아귀가 흔들린다.
“당신을 닮았죠. 지금은 당신이 잃어버린 모습이지만.”
“안타깝구나.”
“진정 안타까운 건··· 당신이에요.”
지독하다. 망자가 뼛속 깊이 새겨넣은 상흔보다도 예리하고 고통스럽다.
“저는 여전히··· 당신을 위해 기도한답니다.”
안톤이 어깨를 들썩였다.
“변함없이 우둔하구나. 말괄량이 수녀.”
빛과 빛이 부딪친다. 뇌성이 울려 퍼지고, 이따금 빛줄기가 성전사를 스치기도 했다. 끝내 자루를 걸친 성전사는 그대로 칼날을 부러뜨렸다.
“수도원에서 너를 건져냈을 때부터 그랬었지. 이틀 넘게 걸어도 경전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며 팔팔하게 설교를 늘어놓질 않나.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저녁 기도는 챙겨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고. 오죽하면 그 성깔머리 때문에 수도원에서 쫓겨나기 직전이었으니.”
완숙한 지금관 달리, 열정으로 가득하던 순례 초행길.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무뎌진 생애에 그나마 추억으로 남아있던 상념을 제 손으로 부수는 날이 올 줄이야.
땅바닥에 수도녀가 내리꽂혔다. 여태껏 무수한 이들의 피를 밟아온 철인의 얼굴 위로 음울한 기색이 어렸다. 무릎을 굽힌 성전사의 손에 희미한 빛무리가 맴돌았다.
“···네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도, 내 원죄겠지.”
불완전한 성취로 천상을 넘본 대가는 참혹했다. 그와 더불어 사명을 완수했던 전우들은 미쳐버렸고, 승천 의식에서 살아남은 건 자신과 수도녀 뿐이었다. 그마저도 온전한 꼴은 아니었다.
그녀는 눈을 잃었고, 이제 자신은 무엇을 상실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가만히 누워 있어. 눈을 감고 있으면 곧 끝날 거야.”
안톤이 신성을 거둬들였다.
“이 이상 내게 맞서지 마. 넌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아. 기젤.”
꿈틀거리던 수도녀는 가까스로 부러진 칼자루를 집어 들었다.
“자상, 하시군요. 변, 함없이.”
사적인 행복을 추구했다면 이 길을 택하지 않았으리라. 천공에 닿으려면 거기 기거하는 존재들과 눈높이를 맞춰야만 한다.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지식이다.
“애초에 제가 당신과··· 맞설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잡념은 잦아든다. 안톤은 등 뒤에서 강렬한 신성의 발현을 느꼈다.
“저는 보여주려고 했을 뿐.”
“······!”
머리 잃은 사체가 멀쩡히 선 채로 광륜표를 쥐고 있었다.
콰직!!
재차 망치를 집어 든 성전사의 오른손엔 핏물과 잿빛 머리칼이 묻어났다.
“놈······.”
토드는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 마르커스의 몸뚱이를 조종했다.
‘시각만 교란하는 눈속임이 아니었어. 버프가 유지되는 동안 공격이 삼중으로 들어간다.’
신성이 실린 일격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타격하는 양상을 보였다.
섬광이 번쩍이자 성전사가 백 보 앞에서 나타났다. 마음속의 초침이 넘어가기 전, 오십 보.
야수처럼 낮게 으르렁대는 숨결이 가까워진다.
무릇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선 제 목숨을 건 줄타기를 마다해선 안 된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 쟀다.
신성으로 뻥튀기된 주력, 갑옷의 무게, 망치와 팔의 길이까지.
‘이스라!’
토드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콰앙!!
【검은색은 무적의 상징!!】
사령술사를 짓이기려던 망치가 칼날에 가로막혔다. 가까스로 벗어난 토드는 무릎을 벌벌 기며 물러섰다.
【따라서 본인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
투구 속 안광은 감겨 있었다. 그럼에도 파멸의 기사가 거침없이 장검을 내질렀다.
‘사선베기 후에 좌상단 공격 쳐내세요.’
뒷걸음질 치는 와중에도 토드는 안톤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방패 사용에 능숙한 적수를 상대로 번번이 애를 먹던 이스라였으나, 매 일격 중 유효타를 먹이는 빈도가 늘어났다.
‘두 걸음 물러선 뒤 하단 찌르기.’
망치를 피한 이스라는 안톤의 무릎을 타격했다. 체중을 실어 내리누르는 방패는 체격으로 받아내고, 칼자루를 들어 안톤의 머리를 후려쳤다.
터엉!
깡통 울리는 듯한 청명한 공명음이 울려 퍼진다. 맑고 고운 소리에 절로 사령술사의 입가가 씰룩였다.
‘우하단 찍기, 정면 올려치기 막고, 내려베기로 밀어내세요.’
사거리 차이에 따른 양손 무기의 이점을 개괄적인 설명이 아닌, 디테일한 동작으로 체득시킨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아는 상대였다.
성전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익었다.
모니터 너머로만 보던 모션을 이토록 생생한 물리 엔진으로 체감하고 있자니 모공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하이엔드 상영관에 앉아 있는 듯한 체험 같았다.
‘안톤이 성전사로서 이곳에 지내면서 새롭게 익히고, 보강한 기술이 있을진 몰라도 결은 크게 다르지 않아.’
기젤 덕분에 기존에 축적된 데이터와 현재의 움직임을 충분히 대조할 수 있었다.
너무나 무거운 핏값이다.
【백색은 항복한 놈들이나 쓰는 색!】
전투가 가져다주는 희열에 망자의 음성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네놈은 패배자의 색을 하고 있구나! 성전사여!】
순수 완력은 여전히 안톤이 우세하다.
그러나 결투의 성패는 한 발자국 차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
이스라는 능수능란하게 손목을 비틀며 족족 망치를 흘려보내는 한편, 자신은 일방적으로 성전사를 타격했다.
【기사도 전집 가라사대, 정의는 승리한다!】
‘정의?’
왈칵 표정을 구긴 성전사가 고함쳤다.
“죽어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선!”
거리를 벌렸음에도 솜털이 곤두선다. 일찍이 전격 마법사를 상대하면서 느껴봤던 감각이다. 슬금슬금 반경에서 벗어난 토드가 의념을 흘렸다.
‘머리 위에서 벼락 다발 3줄기. 후방 11시, 1시, 3시에서 내리치니 쳐내고, 뒤돌아 하단 찌른 뒤 칼등으로 손목 후리세요.’
‘알겠네!!’
쩌렁!
파멸의 기사는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토드가 판단하고, 자신은 이행한다.
결투재판을 비롯해 그간 여러 싸움에서 검증된 바 있는 조합이었다.
연거푸 뇌전을 찢어발기는 순발력을 선보인 이스라는 몸을 뒤틀어 방패가 가리지 못하는 틈으로 검날을 밀어 넣었다.
“크악!”
정강이를 찔린 성전사가 비명을 질렀다. 칼날을 바짝 세운 이스라는 지시대로 손목을 찍었다. 아쉽게도 팔을 말아 방어한 탓에 망치를 떨구진 못했으나, 손가락은 착실히 부러트렸다.
사령술사의 정교한 상황 판단과 파멸의 기사가 지닌 막강한 신체 능력이 결부되니 수 싸움에서 승기가 잡힌다.
【슬슬 한기가 느껴지나? 성전사!】
망자는 칼자루를 휘어잡으며 조소했다.
【죽음은 차갑다네!】
또 어디서 요상한 책 한 권 주워듣곤 감명 깊은 구절을 읊는 모양이었다. 괜스레 자신까지 싸늘해지는 기분이다.
‘이스라, 집중.’
비틀거린 안톤이 이스라를 노려봤다.
“그릇된 길일지라도.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기에 싸우는 거다.”
으깨진 손가락뼈가 불쾌한 소음을 내며 맞물릴지언정, 성전사는 무기를 놓지 않았다.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정의를 입에 담아?”
그러자 투구에 안광이 또렷이 맺힌다.
【하, 하! 하. 본인을 규정짓는 건 명예와 투쟁뿐이라!】
탕, 탕!
거세게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린 이스라가 뇌까렸다.
【본인은 단지 토드를 위해 싸운다!】
안톤의 눈에 횃불처럼 타오르는 영혼이 보였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숙적이 자신의 목숨을 노려왔던가.
“사령술사 놈의 맹목적 추종자 주제에···!”
【토드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오, 그릇되었다 이르면 잘못된 것이니!】
망치를 튕겨낸 장검이 궤적을 비틀어 위로 상승했다. 머리끝까지 검을 치켜든 파멸의 기사가 쩌렁쩌렁 외쳤다.
【응당 기사다운 태도 아닌가!】
온 힘을 실은 분노의 베기.
안톤은 급히 방패를 내세웠지만, 그토록 굳건하던 교회의 성유물조차 견디지 못하고 쩍쩍 균열이 갈라졌다.
콰콰콱――!!
끝내 요란하게 박살 난 방패가 안톤의 손을 떠났지만, 동시에 장검 역시 깨지고 말았다.
‘이런.’
돌발상황에 당황한 토드가 지시를 내리기 전에 이스라가 한발 앞서 행동했다.
【맨손 박투 역시 기사의 덕목!】
자세가 무너진 안톤이 망치를 다잡기 전에 건틀렛이 작렬했다. 투구에 묵직하게 꽂힌 정타가 그치기 전, 파멸의 기사가 다리를 걸어 성전사를 넘어뜨렸다. 바닥을 뒹군 둘은 연신 주먹을 내지르며 치열하게 맞붙었다.
‘육박전에선 내가 손쓸 구석이 없는걸.’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여도 주먹이 꽂힐 때마다 철판이 우그러지고, 발길질에 일대의 지반이 넘실거렸다. 발을 구른 이스라는 안톤이 망치를 집어 들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허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한 움큼 흙을 움켜쥔 파멸의 기사가 턱 보호대를 잡아 뜯었다. 그녀는 젖혀진 바이저 틈새로 힘껏 흙먼지를 쑤셔 넣었다.
【네크로폴리스 흙 맛이 어떻더냐!?】
“크으!!”
치졸한 술수에 몸부림치던 성전사는 무릎을 세워 힘껏 깔고 앉은 상대의 고간을 후려쳤다.
사슬이 절그럭거릴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고통스러워하는 조짐은 전무했다.
변함없이 투구 속 안광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 하! 하. 어리석군! 본인은 이미 약점을 거세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덥석 목덜미를 죄여오는 손길에 눈앞이 하얘진다. 필사적으로 내뻗은 손이 턱을 후려쳤는데, 덕분에 파멸의 기사를 감싸던 투구가 허공에 휘날렸다.
그제서야 상대방의 민낯을 목격한 안톤이 허망하게 신음했다.
“계집, 이었나···.”
옅게 창백한 빛을 띤 얼굴이 갸름하다. 코앞에서 녹색 눈동자가 선명히 이글거렸다.
【계집이면 어떻고, 사내면 어떤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은 망자가 단단히 성전사를 틀어쥐었다.
【결국 승리하면 그만인 것을!】
어찌나 악력이 거센지 입에서 한 구절도 떼지 못할 지경이었다. 바둥대던 성전사는 좁아지는 시야 너머로 사령술사를 목격했다.
이대로.
모든 걸 그르치더라도.
저놈만은.
눈자위에 핏발을 세운 안톤이 고했다.
‘사마엘. 올려라.’
부름에 응한 천사는 착실히 나팔을 울렸다.
그 대가로 죽음의 전령과 접전을 벌이던 중 목을 내줬지만, 어차피 물질계에 빌릴 육신은 구하면 그만.
붙들린 의식이 끌어올려진다. 겨우 거친 숨을 뱉은 성전사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역시. 같은 영혼에서 갈라져 나와서 그런지, 동일한 장소에 있으면 덩달아 불려지는군.”
귀가 먹먹하다.
느닷없이 생경한 장소에 발을 들인 토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음···.”
기묘한 곳이다. 바닥이 보이질 않는데, 천장의 경계도 모호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끝인지 인지하기 어렵다.
괜히 누군가 귓가에 속닥이는 듯한 느낌 탓에 온몸이 간질거리고.
마치 식물원에 들어온 것처럼 적당히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반쯤 죽어가는 몰골이었음에도 안톤이 비척대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나?”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토드가 대꾸했다.
“어느 정도는요.”
“원래라면 파편을 한데 모은 뒤에 도달했어야 할 곳이다.”
안톤은 이를 갈아붙이며 중얼거렸다.
“더욱이 네놈처럼 불결한 놈일수록 허락되지 않은 장소.”
대략 온실의 정체를 짐작한 토드는 자세를 숙여 가장자리를 살피다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여기가··· 천상이군요.”
“그래. 그중에서도 고요의 회당이라 불리는 권역이다.”
성한 구석이 없어서 그런지, 걸어오는 와중에도 안톤은 연신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였다.
“아무리 내가 성치 않은 몸이라도, 널 때려죽이기엔 충분하지.”
토드를 굽어보는 성전사의 눈이 번들거렸다.
“여긴 산 자도, 죽은 자도 없는 거룩한 공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려면 어마어마한 성결이 필요하겠지만, 사령술사를 끝장낼 수 있다면 족하다. 놈은 사망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래도 무저갱과의 일전을 대비해 축적한 자원을 허망하게 날린 꼴이니 여전히 배알이 뒤틀렸다.
“전적으로 소환수들에게만 의존하는 사령술사 따위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째서인지 놈에게서 다급한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네가 수족으로 부릴 시체도 없지.”
언뜻 시선을 마주친 토드가 가늘게 웃었다.
“정말 그럴까요?”
설마 이 지경까지 몰렸음에도 허세를 부리는 건가? 아니, 충분히 그럴 만한 놈이다.
품에서 방울을 끄집어낸 사령술사는 낮게 속삭였다.
“여기 와보니 사정을 알겠네요. 왜 그간 조물주께서 피조물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아주 강대한 영이 여기 잠들어 있었다.
딸랑, 딸랑···.
‘설마.’
사령술사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걸렸다.
“한없이 미천한 제가. 위대한 당신을 부릅니다.”
눈알을 뽑는 게 광명교단의 통과 의례라니 어쨌거나 자격은 충족된 게 아닐까.
이 뒤로 벌어질 일은 정작 초래할 토드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
“아버지. 내게로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