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
1화. 프리뷰
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낯익었다.
[조우>.제목까지도 그대로였다.
하나였으면 애써 실수라고 여겼겠건만…… [운명>, [발아>, [꿈>.
이어지는 모든 그림이 생생한 것이었다.
‘성실하게도 가져다 썼네.’
수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풍과 아이디어를 도둑맞았다는 건 벌써 오래전에 알았다. 그런데도 굳이 전시장을 찾은 건 기사 속 작은 사진으론 알 수 없는 디테일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작품의 본질은 늘 현장에서 가장 잘 두드러지는 법이니까.
이제는 세계적인 화가가 된 김민준.
그는 수현의 것을 그대로 카피해 모두에게 극찬받는 자리에 올라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김민준이 내 포트폴리오를 훔쳐 RISA에 입학하고, 그걸 완성해 뉴욕 화랑의 러브콜을 받아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는 걸.’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전시 첫날은 피했다. 오프닝 리셉션엔 거장이 된 김민준과 그를 축하하는 동기, 선후배들이 모일 테니 한적할 다른 날을 고른 거다.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두렵기도, 자기 편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을 또 경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괜한 걱정이었지.
수현이 피식 웃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지 않더라도 부스스하게 관리되지 않은 머리, 꺼칠한 피부, 투실투실 보기 싫게 불어난 몸집. 누구와 마주쳤더라도 자신을 알아보진 못했을 거다.
이름이나 기억할까.
미술계를 떠난 지 15년.
화려한 그쪽 세계에선 충분히 지워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저벅.
수현이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아선 다음 섹션에도 잃어버린 포트폴리오들이 그럴듯하게 완성돼 걸려있으면 어쩌지. 김민준이 내 빛나던 시절을 훔쳐 영광을 가로챈 거라고 폭로라도 해야 하나.
불쑥 치미는 생각에 이번엔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증거는 사라졌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스스로 버린 재능이었다.
그런데-.
“하아.”
수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미쳤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그림.
고치를 벗고 날개를 활짝 편 나비처럼, 김민준은 아예 다른 세계로 넘어가 있었다.
[도약>.근사한 작품이었다.
쿵쿵.
수현의 심장이 두근거리더니 스르륵.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왈칵. 눈물이 맺혔다.
‘어느새 여기까지 갔구나. 내가 가졌던 것들을 끌어다 썼지만, 결국 여기까지 올라섰어.’
이어지는 그림들엔 점점 수현의 색채가 옅어지더니 아예 사라졌다.
대신 작가 김민준의 존재가 뭉텅뭉텅 자라나 보는 이를 집어삼킬 듯 이글거렸다.
초창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
강렬한 터치엔 숨 막힐 듯한 감정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그림이었다.
수현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모든 작품 옆에 솔드아웃을 의미하는 둥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수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세계를 개척해 움켜쥔 김민준에게 자신은 착실한 거름에 불과했다는 것을.
***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데?”
“그냥, 어나더레벨. 그 자식을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한다, 이 말이지.”
동네 단골 호프집.
수현이 고교 동창 윤희를 불러내 시작한 낮술이 세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지랄. 야, 한수현. 그 새끼한테 아이디어고 작품이고 홀라당 도둑맞고 팽 당한 주제에 이젠 김민준을 실력 있는 작가라 인정까지 하겠다고? 어이없네, 진짜. 보살 나셨어, 아주. 니가 인류의 희망이다, 희망.”
“뭐, 내가 인정하든 안 하든 김민준이 세계적인 작가가 된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아, 짜증나. 술이나 마셔.”
시원하게 감정을 폭발시킨 윤희가 소주와 맥주를 번갈아들더니 빈 잔에 사납게 채웠다.
“비율이 너무 무식한 거 아니냐? 거의 1대 1인데?”
“덜 취했네. 일단 마셔라. 오늘은 잡생각 말고 푹 자란 언니의 배려니까.”
달달달달.
오래된 선풍기가 고개를 떨며 불안하게 회전했다.
위이이잉-.
무식하게 큰 에어컨은 가스가 다 됐는지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한여름까지 떼지 않은 크리스마스 전구. 매직으로 여러 번 덧칠해 가격을 알려면 한참 인상 써야 하는 메뉴판. 끈적끈적한 테이블과 집요하게 치킨을 향해 달려드는 파리떼.
‘그래, 나는 이런 데가 어울리지.’
미지근한 술을 가득 삼키며 수현이 쓰게 웃었다.
낮의 전시장은 깔끔하고 품격있었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전을 차례로 치른 국내 최고의 갤러리답게 수려하고 은은했고.
또각또각.
거길 거닐며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한여름에도 격식 있는 정장 차림이었다.
고급스러운 세단을 타거나 카페나 전시장 같은 델 다닐 테니 더위에 시달릴 걱정 없이 충분히 예의를 차렸을 거다.
반면 수현은 초라했다.
언덕을 오르느라 땀범벅이 된 티셔츠. 낡은 단화는 달그락거렸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쾌 지수가 높아졌다. 유행이 지난 헐렁한 치마 속에서 끈적한 허벅지가 자꾸만 부딪쳤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 꼴을 하고 도둑고양이처럼 전 남친의 그림을 훔쳐보는 처지가 되다니.
콸콸콸.
수현이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 윤희가 소주와 맥주를 또 무섭게 들이부었다.
“너, 이따가 나 업을 수 있냐?”
“내가? 갑자기?”
“이렇게 마시면 오늘 감당 못할 것 같은데…….”
“정신 바짝 차려. 한수현. 술은 정신력이야.”
윤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엔 자기 잔에도 소주와 맥주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사장님! 여기 소주랑 맥주 한 병씩 더요!”
손을 번쩍 들어 주문하는 윤희를 보며 수현이 피식 웃었다.
윤희는 자신과 무척 닮은 친구였다.
한때 천재니 영재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예술가. 갑작스럽게 추락해버린 것까지도 똑같았다.
그림을 잘 그리고 조각을 잘하던 예고 시절 모습은 이제 서로의 기억에만 흐릿하게 남았을 뿐.
그래도 이런 날 함께 할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수현이 물끄러미 윤희의 얼굴을 바라볼 때였다.
“저건 뭐야?”
윤희가 건너편에 놓인 수현의 가방을 가리켰다. 불룩한 가방 끝으로 작은 상자가 뾰족하게 모서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민준 전시회 기념품.”
“어?”
“나오는데 주더라고.”
수현이 윤희에게 전시장 이야길 더 들려주었다. 전부 팔린 건 작품뿐 아니라 포스터와 도록(전시 내용을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도 매진이었다고.
“……도록도 사려고 했어?”
“그냥, 이제 다시는 김민준 전시는 안 가볼 것 같아서.”
“허. 어이는 없는데 아깝긴 하네. 그 그림들 네 그림을 얼마나 베껴놨는지 한번 보고 싶긴 했거든. 그렇다고 전시장까지 가긴 싫고.”
“어쨌든 다 팔려서 그냥 가려는데, 담당 직원이 주더라.”
오일파스텔이었다.
김민준의 사인과 대표작 이미지로 패키지 디자인을 한 고급스러운 화구.
“도록이 매진인 데에 죄송한 마음으로 준비한 거래.”
“한번 보자.”
가방에서 오일파스텔을 꺼내자 윤희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감정하듯 찬찬히 살폈다.
“와, 진짜 출세하긴 했구나, 김민준이.”
“그렇지?”
“자기 이름을 단 화구 브랜드까지 내는 걸 보면 뭐 거의 홀바인이나 렘브란트급 아니야?”
“그 정돈 아니고.”
고개를 젓는 수현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던 윤희가 말했다.
“너 이거 여기서 다 써버려. 아니다. 그냥 버리자.”
“어?”
“모셔다 놓고 볼 때마다 속 끓일 게 눈에 선해서 그래. 내 말이 틀려?”
“그럴 생각 없었는데?”
“귀신을 속여라.”
열을 올리는 윤희를 보며 수현이 작게 웃었다.
“이따가 할게. 버리고 너한테 인증샷도 보내고. 됐지?”
“퍽이나.”
그러게, 퍽이나.
새벽녘 마른 목을 축이러 일어난 수현은 가방에 그대로 들어있는 오일파스텔을 난감하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버린다는 걸 깜빡했네.”
애초에 받아오는 게 아니었다.
기념품이라 해도 거절하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이라도 치우자.
수현이 가방에 쑥 손을 집어넣어 오일파스텔을 꺼내 들었다.
쿵.
그런데, 취기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들 리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싶다.
나 ……사실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어.
한동안 조금도 들지 않던 생각.
낮의 전시가 자극적이었던 걸까.
오래전 기억을 너무 많이 떠올렸나.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화르륵-.
수현은 아무 종이나 꺼내.
스윽-.
마음에 드는 색깔을 하나 집어.
휙-.
거칠게 선을 그었다.
그러자,
“……!”
신기하게도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모든 풍경이 경이롭던 시절.
아름다운 모든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열망에 가득하던 때.
수현은 바쁘게 많은 것을 그려 나갔다. 밤이고 낮이고 깨어있는 시간은 물론 잠이 밀려오는 순간까지도.
재밌고 행복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마침내 손으로 구현해냈을 때의 희열은 얼마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는지.
수현은 그리고 또 그릴 수밖에 없었다. 오직 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아마 시력을 잃게 될 수 있단 병원의 오진만 아니었어도, 때맞춰 시작된 병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않았더라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드러난 비밀에 자존감이 박살 나지만 않았더라도, 수현은 그림을 계속 그렸을 거다.
그렇게 도망치진 않았을 거다.
“아까워, 진짜. 너라도 그림을 계속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 헤어질 때 윤희가 건넸던 말이 뒤늦게 가슴에 와닿았다.
후두둑.
별말도 아니었는데-.
“어? 나 왜 이래.”
혼자 있는 새벽이라 그랬을까.
서글픈 눈물이 종이 위로 뚝뚝 떨어졌다.
“흐읍.”
굳게 걸어 잠갔던 감정의 빗장이 열리더니 서러운 폭풍을 일으켰다.
하나만으로도 힘든 일이 연달아 터지던 때가 있었다. 열정으로 버티기엔 충격이 컸고 그래서 손을 놓았더니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중 오해가 해결되고 마음을 정리했지만, 제자리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있었다. 수현의 자리는 벌써 다른 이로 채워졌고 새로운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
일찌감치 드러낸 재능 덕분에 이어진 후원으로 겨우 그릴 수 있던 그림이었다. 그걸 팽개치고 도망간 데다가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으니. 게다가 자기 그림마저 잃어버린 후니 누가 관심을 두겠는가.
어떻게든 견디고 참았어야 했어.
그때 다른 병원을 한 번 더 찾아보기라도 했더라면, 부모에게 입은 상처에 매몰되지 않았더라면, 오늘 전시장의 주인은 내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아.”
소용없는 가정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형편없네.”
수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감정적으로 달려들어 그려낸 그림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색채, 형태, 구성. 모든 면이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한.
김민준이 저만치 나아갈 동안 난 오히려 이만큼이나 퇴보했구나. 이게 지금의 나라니.
현실은 무척 비참했다.
“왜. 하아. 왜에.”
결국 수현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림을 놓는 게 아니었다고 엉엉 울며 뜨거운 속엣것을 쏟아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하아. 자자. 그냥 푹 자버리자.”
쓰윽-.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소매를 끌어다가 눈에 남은 물기를 대충 닦아냈는데.
“……?”
눈앞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술이 덜 깼나?
꿈인가?
이게…… 무슨 일이지?
눈앞에 비친 곳은 교실이었다.
반짝이는 햇살이 통창으로 들어오는 한낮.
사각사각.
책상 앞에 앉은 아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연필을 굴리고 있었다.
“한수현. 벌써 다 썼어? 왜 멈추고 멍 때리냐, 어?”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휙-.
뒤돌아본 순간 수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송민식 선생님?’
수현이 있는 곳은 1995년, 세현예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