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겨울의 소식(2)
‘차라리 그림을 그리라면 그리겠는데.’
수현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스티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어?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너 오늘 제대로 집중 못 하잖아. 계속 한숨만 쉬고. 무슨 일이야? 말해. 함께 나눠질 수 있는 거면 나눠지자고.”
제법 의젓하게 수현을 위로하려 들던 스티브는 잠시 후, 아주 난처한 얼굴이 됐다.
“하아. 졸업생 대표 연설이라고? 떨릴 만하네.”
“그렇지? 아, 나는 말재주 같은 거 없단 말이야.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게. 나도 수현이 네가 단상에 서서 연설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는다.”
“그런 거 잘하는 애들은 따로 있어. 그런 애들한테 부탁하는 게 좋았을 건데.”
수현이 괴로워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걸 본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어쩌면 연설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해서 부담스러운 거 아닐까?”
“어?”
“그냥 편하게 생각하면 어때?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이야기쯤으로.”
“마지막으로 나누는 이야기?”
“고등학교를 떠나면서 느끼는 감상을 편하게 말한다고 생각하라고.”
“그래도 될까?”
“뭐 어때. 대통령 담화문도 아니고, 신년 연설 같은 것도 아니잖아. 누가 그걸 기록했다가 두고두고 말할 것도 아닌데, 눈치 보지 말고 네 감정에 따라서 해. 그게 너다워.”
그 말에 어쩐지 수현은 마음이 편해졌다.
맞지 않는 옷을 입지 말란 이야기. 스티브의 말처럼 친구들에게 건네는 감상 정도라면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후우. 알겠어. 고마워, 스티브.”
“그래. 졸업식 날짜가 언제라고 했지?”
“13일이야. 돌아오는 금요일.”
“13일의 금요일? 잊을 수가 없겠네. 그날 나도 간다?”
“어?”
“제일 친한 친구의 졸업식인데 당연히 가야지. 네 연설도 궁금하고 말이야.”
“아. 연설은 끝나고 와줬음 좋겠는데.”
“하하. 알겠어. 어쨌든 졸업, 미리 축하한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수현은 일찍 방으로 올라와 책상에 앉았다.
창밖으로는 어제 내린 눈이 아직 그대로 남아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그걸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수현이 심호흡하고는 쓱쓱- 졸업식에서 읽을 연설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건 내가 정말 아끼던 붓이야. 입시장에도 들고 갔던 거고.”
“와아.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는 이거 줄게. 앞치마랑 화구박스.”
“헐. 진짜요?”
“근데 앞치마는 세탁 한 번 해야 할 거야. 흙냄새 장난 아니라.”
“에이. 선배님의 피, 땀, 눈물이 깃든 앞치만데 세탁하면 의미가 없죠.”
그러나 차윤희의 앞치마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던 후배는 바로 미간을 찡그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손빨래는 살짝 해도 될 것 같네요. 하하.”
“그치? 그래도 뭐, 내가 내내 쓰던 거니까 내 기운은 듬뿍 남을 거야. 하하핫.”
작년과 똑같은 풍경.
세현예고의 전통대로 졸업식 날, 졸업을 앞둔 선배들은 자신이 아껴 쓰던 물건들을 하나씩 후배에게 물려주었다.
수현도 몇몇 후배들에게 덕담과 함께 자신이 쓰던 화구를 선물로 건네주었다.
“졸업생 여러분과 내빈들은 강당으로 모여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이어지는 안내 방송에 다시 잠잠해졌다.
“시작인가 봐.”
“그러게. 들어가자.”
“와, 기분 이상해.”
“우리 진짜 졸업이야?”
정들었던 친구들은 오늘이 고교생활의 마지막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단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곧 졸업식이 시작됐다.
“다음은 우등상입니다.”
개근상, 정근상, 우등상, 공로상, 학교장상, 이사장상…… 상의 종류도 상장의 개수도 어마어마했다.
호명을 받은 대표 학생이 나와 차례로 상을 받고 자리에 들어갔고, 양진우 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2학년 대표의 송사와 졸업식 대표 학생의 답사, 즉 수현의 차례가 되었다.
“세현고등학교 졸업생을 대표해 먼저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강단에 선 수현이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실기동 4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교정을 참 좋아했습니다. 꽃나무들이 봄을 터트리고, 쨍쨍한 햇볕이 이글거리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단풍 사이를 지나고, 다시 하얀 겨울이 오는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거든요. 그 모습을 넋 놓고 볼 때가 많았는데, 세 번을 구경하고 나니, 졸업의 시간이 됐습니다.”
수현이 졸업생과 후배들, 졸업식에 참석한 가족들과 선생님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말했다.
“풍경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던 건, 그 안에 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모두가 다른 재능을 품었지만 같은 열망을 안고 예술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는 건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습니다.”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졸업을 앞둔 지금, 아이들은 입학 때보다 몇 뼘씩 성장해있었다. 그 모습이 참 기특하고, 감동스럽고, 보기 좋았다.
더욱이 수현의 입장에선 두 번째 졸업식.
전보다 성숙해서일까? 아니면 예전과 다르게 기대될 미래들이 앞에 펼쳐져 있어서일까.
수현은 첫 번째 졸업 때 느낄 수 없었던 수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수현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같은 시간을 지나며 각기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주었던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풍경을 경험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터전을 내어주신 선생님들과 부모님들, 모교에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현은 진심을 담아 모두에게 감사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헤어짐은 아쉽지만, 예술이란 세계에 머무는 동안 앞으로도 끊임없이 교류하고 영향받으며 성장하게 될 거란 희망도 함께.
“……이상으로 답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와아아-.
짝짝짝.
마지막 인사까지 모두 마치자 따뜻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휴, 수현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우리 마지막 아닌 거지?”
“그래. 수현이 말대로 계속 예술가로 남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거잖아.”
“맞아. 작품으로도 서로 영향받을 거고.”
“그래. 점점 성장하는 걸 보게 되겠네.”
감동하며 작별의 시간을 아쉬워하는 아이들.
교가를 부르고 마지막 순서까지 모두 마친 후엔 다시 우르르 흩어져 졸업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기 바빴다.
“한수현! 우리도 사진 찍자!”
“그래, 같이 찍자. 여기로 와!”
수현도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얼굴에 경련이 일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축하하러 와준 가족들과 먼저, 다음은 미술과 애들과, 그다음은 제법 친해졌던 다른 과 애들까지 몰려들었다. 그리고,
“한수현!”
몇 달 사이, 스타일이 확 바뀐 연영과 이희찬이 수현에게 다가왔다.
“와. 너 뭔가 달라졌다?”
“그래?”
어쩐지 뿌듯해 보이는 얼굴.
“연예인 티가 좀 나나?”
“어. 정말. 뭔가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열심히 노력하긴 했지.”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이희찬은 좋은 매니지먼트와 계약을 마쳤고, 지난가을. 1세대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암만 생각해도 기특해. 무려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거야, 내가.”
외모는 화려해졌지만, 성격은 아직 그대로인 이희찬. 어쩐지 수현의 칭찬을 기대하는 투로 자기 자랑을 수줍게 늘어놓았다.
수현이 모른 척 그걸 받아주었다.
“암암. 근데 네 춤 실력이면 1,000대 10,000대 1이어도 충분히 뚫었을 거야.”
“흠흠. 그치? 근데 수현아, 나 춤만 잘 추는 건 아니야. 노래도 곧잘 해. 너도 들어봤잖아.”
이희찬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 그렇지. 노래도 잘하지. 어쨌든 성공적인 데뷔, 축하해. 오래오래 많이 사랑받는 가수가 돼라!”
그렇게 수현이 싱긋 웃으며 자리를 뜨려할 때,
“어, 수현아!”
이희찬이 다급하게 수현을 붙잡았다.
“어?”
“너…… PCS 있지?”
가을부터 PCS가 출시됐고, 얼마 전 수현도 개통했던 참이었다.
“어. 있어.”
“번호 알려줄래?”
“내 번호를?”
“나, 가수 활동한다고 PCS는커녕 시티폰도 못 쓰는 처지이긴 한데, 그래도 가끔 너한테 연락하고 싶어서.”
“음. 그래.”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희찬이 내민 수첩에 번호를 적어주었다.
“근데, 전화도 못 쓰게 하는 거면, 아예 이런 연락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에이. 친군데 뭐 어때! 소속사야 연애를 금지하는 거지, 우정까지 금지하는 건 아니거든?”
“아. 그래. 그렇다면야 뭐.”
잘은 몰라도, 이 시기 아이돌들은 엄청난 관리를 받았던 게 아닌가 짚어보던 수현이 이희찬이 정색하는 바람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쨌든 우린 친구잖아. 친구하기로 했잖아.”
“어. 그래. 친구 맞지.”
“그러니까 연락처 받아도 괜찮다고.”
삐죽거리던 이희찬은 수현이 번호를 건네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었다.
“근데 수현이 너, 아직 나 안 좋아하지?”
“어?”
“아냐. 됐어. 어쨌든 또 보자, 친구!”
종잡을 수 없는 감정선에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수현은 다시 애들에게 이끌리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수현!”
반가운 얼굴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스티브!”
“축하해!”
스티브가 커다란 꽃다발을 수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도 축하해줘.”
“어?”
수현의 짧은 물음에 스티브가 활짝 웃었다.
“나 시험 통과했어.”
“정말? 진짜야?”
수현이 입시를 지나던 가을, 스티브는 잠시 캐나다에 다녀왔다.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은 대신,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검정고시 격의 시험을 치르고 온 건데, 뒤늦게 최종 합격했단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결과가 나온 지 좀 됐는데, 하. 케일라가 꽁꽁 숨겼더라고.”
스티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케일라? 네 누나가 왜?”
“그걸 핑계로 또 캐나다에 오게 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 내가 버럭 화를 내니까 그제야 알려줬어.”
“하하. 네가 보고 싶었나 보지. 어쨌든 잘됐네. 그럼 이제 아무 때나 네가 원하기만 해면 대학에 갈 수 있게 된 거잖아?”
“그렇지. 안 가는 거랑 못 가는 거는 느낌이 다르니까. 뭐, 기분은 괜찮아.”
스티브가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쉽게 말했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 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공부했을 스티브였다. 그 노력의 시간이 보답을 받은 게 수현은 기뻤다.
“그래. 잘했어. 정말 축하해, 스티브.”
수현이 격려하자 스티브가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게 끝이 아니야. 나, 축하받을 일이 하나 더 있어.”
“어? 뭔데?”
“전시회 날짜가 잡혔어.”
“정말?”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역시 스티브가 한참 기대하던 소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일선화랑에서 꽤 많이 그렸잖아. 강유진 관장님이 홍콩 전시회를 제안해주셨어. 한참 전부터 조율했는데, 좀 전에 최종적으로 결정난 모양이야. 나, 이거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다?”
“세상에. 진짜 잘됐다!”
수현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했다.
“언제야? 언제쯤 하기로 했어?”
“7월 중순 이후로 예상하고 있어.”
“금방 오겠네.”
“그렇지. 이왕이면 네 여름방학 즈음으로 잡을 테니까…….”
“어?”
“보러와 줄래?”
“당연하지!”
수현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전시회인데 당연히 축하해주러 가야지. 정말 잘됐다. 잘됐어. 스티브.”
좋은 소식을 연달아 듣던 수현은 어쩐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묘한 긴장감이었다.
비단 스티브의 전시회 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수현의 쇼케이스 날짜도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던 거다.
고등학생이라는 신분도 이제는 끝.
수현은 화가로 제대로 발돋움할 본격적인 출발선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