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4)
14화. 집으로
다음 날 아침.
“수현, 넌 언제 가?”
기숙사 애들이 하나둘 방을 나서며 부산을 떨 때, 박선화가 아직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수현을 보고 다가와 물었다.
“아, 나는 오후에 나가려고.”
“……그래?”
머뭇거리던 박선화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집까진 어떻게 갈 거야? 버스로?”
“아마도?”
“음. 같이 갈래?”
“너도 버스로 가려고?”
“아니, 내려줄게. 좀 있다 엄마가 오기로 했거든.”
“아…….”
수현이 멀뚱히 박선화를 바라보았다. 기숙사라고 하면 통학이 불편한 거리의 학생을 우선으로 받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세현예고 기숙사는 집중관리를 원하는 학생들을 우선 선발했다.
학과나 실기 성적 중 하나는 1등급에 들어가야 입소 자격이 주어졌고. 그러니 극성 부모를 둔 아이들이 기숙사에 몰린 건 당연한 일.
주말이나 방학이면 애들을 태우러 오는 고급 세단이 학교 정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수현은 항상 그사이를 무감하게 지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는데, 오늘은 박선화가 자신의 호의를 받아주길 조심스럽게 청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경계했겠지만, 친절을 받아들이고 필요할 땐 부탁을 하는 연습도 이번 생엔 필요할 일.
수현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나야 고맙지. 근데 너희 집은 어느 쪽인데?”
“어, 우리 집, 네 집이랑 가까워! 너 명진동 살지? 우리 집은 한진동이거든.”
“아, 한진동.”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네 집은 중산층들이 모인 아파트 단지와 다세대 주택들이 밀집된 명진동. 그리고 길 하나를 건너 시작되는 한진동은 높은 언덕에 드문드문 조성된 고급 빌라와 단독주택들이 뒤로는 남산을, 앞으로는 한강을 바라보는 부촌이었다.
한진동이라니, 수현은 일선화랑 관장 강유진과 박선화의 분위기와 퍽 어울리는 동네라 생각하면서 한편 박선화가 어떻게 자기 집을 알았는지 궁금해졌다.
“근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아, 너 본 적 있어. 기숙사 들어오기 전에 통학했잖아. 동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거 봤었거든. 주말에도 몇 번 스치듯 봤었고.”
“아, 그랬구나.”
“어쨌든 바로 옆 동네니까 부담 갖지 마. 같이 가자.”
“그래. 그러자.”
수현이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1시. 원래 출발하려던 시간보단 일렀지만, 집에 들어가는 게 정 불편하면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대충 때워도 될 일이라 생각하면서.
***
“조심해서 다녀오렴!”
“네, 감사합니다, 관장님!”
“잘 가, 한수현! 이따가 삐삐칠게! 꼭 확인해”
“어, 너도 잘 가!”
처음 강유진 관장을 만나 후원을 약속받은 날에도 축하 겸 저녁을 먹자고 한 바람에 박선화네 차를 탄 일이 있었다. 그땐 흰색 고급 세단이었는데, 오늘은 검은색 RV차량. 심지어 이 시기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급 수입차였다.
‘어마어마하네. 차도 몇 대씩 굴리고 있었구나.’
자신을 내려주고 힘차게 언덕을 올라가는 박선화네 차를 보면서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나더레벨. 이런 아이들과 한 학교에 다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집 앞이었다.
“어쩌지.”
삐삐로 확인해보니 정오에 가까운 시각. 8살 터울인 동생 유나는 이제 9살, 초등학교 2학년이고 방학식 시기야 고등학교보다 늦을 리 없을 테니 지금쯤 엄마와 집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늦게 가는 게 좋겠지.
수현이 휙휙 주변을 둘러보다 상가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시간이면 문을 여는 백반집이 갑자기 떠올랐던 거다.
잠시 후.
점심 식사를 해결한 수현은 동생에게 줄 과자를 몇 개 사고, 동네를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나 2시쯤 되자 쨍쨍 내리쬐는 여름 해를 더는 견딜 수 없어 터덜터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컹.
수현이 현관문을 슬그머니 밀고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어? 언니?”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반갑게 웃는 동생 유나, 그리고 살짝 당황하며 수현을 바라보던 엄마가 멈칫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학했니?”
“네.”
“그래. 오늘?”
“네. 좀 전에요. 저, 잠깐 방에 찾을 게 있어서요.”
“하아. 미리 연락을 했어야지.”
짜증 섞인 말투. 신경질적인 표정과 목소리를 접하자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맞다. 내가 기숙사에 들어간 후에 내 방이 사라졌었지.’
엄마는 수현이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동생 유나의 방을 공주님 방처럼 꾸미고, 수현이 쓰던 방은 유나의 학습과 아버지가 잔업을 할 수 있는 서재로 용도를 바꾸었다. 그땐 왈칵 서운한 감정이 일었는데 이번엔 알고 있던 일이라선지 크게 놀랄 게 없었다. 기저에 깔린 엄마의 심정도 이해할 만했고.
“언니 방 없어졌어. 엄마가 유나 공부방으로 만들어줬거든. 근데, 엄마. 그럼 언니는 어디서 자?”
유나가 해맑게 웃으며 엄마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언니인 수현의 위치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긴 무리일 어린 나이. 수현이 싱긋 웃으며 유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언닌 괜찮아. 저녁에 다시 나갈 거거든. 잠깐 인사만 하고, 공부하러 가야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유나야.”
수현의 말에 유나가 울상을 지었다.
“언니 또 공부하러 가? 그럼 나랑 못 놀아?”
“너, 2주 동안은 기숙사도 못 간다고 하지 않았니?”
유나의 질문과 엄마의 물음이 동시에 겹쳤다. 수현이 유나에게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다시 엄마 쪽으로 얼굴을 돌려 답했다.
“일선화랑에서 방학 중에 작업실이랑 숙식 제공까지 해주는 후원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해서요. 신청했는데 운 좋게 뽑혔어요.”
거짓말과 진실을 반반 섞은 말.
일선화랑의 후원은 방학뿐 아니라 수현이 성장 가능성을 보이는 한 계속되겠지만 아직 구체적인 규모나 금액을 말하긴 조심스러웠다.
게다가 수현은 앞으로 집에 손을 벌리지 않을 생각이니 후원금은 작가로 성공하기 전까지 작품 활동과 생활에 필요한 자금으로 온전히 쓰여야 했다.
‘어떤 혜택을 받게 됐는지 말한다 해도 그 돈을 탐낼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니까. 괜히 서로에게 불편해질 얘긴 꺼내지 않는 게 좋겠지.’
수현이 적당한 선까지만 밝히며 이야길 마무리했다.
“오늘 저녁부터 2주 동안 화랑에 달린 작업실에서 지날 수 있대요. 인사만 드리려고 잠깐 들린 거예요. 꺼내 갈 물건도 있고요.”
“일선화랑이면 한진동에 있는 거 아니니?”
“네. 맞아요. 거기에 있다가 학교 실기 수업이 시작되면 기숙사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그래.”
엄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수현을 향한 엄마의 감정은 아직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현을 들이고, 키우게 된 모든 상황이 수현의 잘못이 아니란 건 알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아이의 엄마로 살아야 하는 부분은 여전히 끔찍했으니까.
그래서 몇 년이나 시댁과 남편이 보란 듯 유나를 편애하고 수현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현이 한 번씩 서글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애정을 갈구하며 기웃거려도 모른 척했고.
죄책감을 느끼면 지는 거라고, 타인이 개입해 엉망이 된 삶을 보상받으려면 더 독해져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수현이 집으로 돌아올 방학이 되니 겨우 2주라 해도 어떻게 참고 지내야 하나, 껄끄럽고 불편한 마음이었는데, 아이가 먼저 걱정하지 말란 얼굴로 거처를 해결했단 말을 꺼내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처하고 어색했다.
게다가 수현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애가 달라졌어.’
봄에 봤을 때보다 훌쩍 커진 느낌이었다.
“자, 그리고 이건 유나 선물.”
복잡한 엄마, 아니 큰엄마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수현이 아까 사두었던 과자 꾸러미를 유나에게 내밀었다.
“와! 언니가 유나 주는 거야?”
“응. 대신 밥 먹기 전엔 먹으면 안 돼. 한 번에 먹어도 안 되고. 알았지? 꼭 엄마한테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
“응! 알았어!”
“그리고, 엄마도 선물이요.”
이번엔 수현이 준비한 물건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그림이었다.
“선물?”
“엄마 초상화요. 학교에서 틈틈이 그렸어요.”
“초상화라고? 내 얼굴?”
엄마가 뜻밖이란 표정으로 그림을 펼쳐보았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날 수현이 실기실에 묻혀 그린 그림이었다.
“이때까지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어?”
“제가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갑자기 감사 인사는 무슨.”
“그리고 저, 훌륭한 화가가 될 거예요.”
여전히 어색한 얼굴을 한 엄마에게 수현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이 그림 나중엔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게 될 거니까 버리지 말고 꼭 간직해주세요.”
캔버스에 그린 엄마의 모습은 수현이 늘 보던 얼굴과 사뭇 달랐다. 자신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유나만을 향했던 미소.
거기엔 사랑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수현의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미소를 항상 띠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곱게도 그려줬네.”
“엄마, 미인이시잖아요.”
수현이 어깨를 으쓱 올리며 웃자 엄마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각오했던 것보단 괜찮은 만남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 모습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엄청 젊어.’
수현이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40대 중반의 나이일 테니, 회귀 전 수현과도 비슷할 나이.
예전엔 서운한 행동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다가왔는데, 이젠 괜찮았다.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명의 여자로 보니 그녀가 어떤 풍파를 겪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어떤 혼란을 안고 살았을지 오롯이 다가왔던 거다.
‘저도 이번 생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큰엄마도 행복하게 사세요.’
수현이 마음속으로 엄마의 앞날을 축복했다.
“언제 가니? 아니, 그러니까 빨리 가란 게 아니고 저녁, 먹고 갈래?”
수현의 변화에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엄마가 저녁을 차려준단 이야길 먼저 꺼냈다.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 있어. 어차피 먹는 저녁인데. 오늘 아빠도 일찍 들어와서 식사한다고 하셨어. 삼겹살 구울 테니까 먹고 가라.”
“네, 그럴게요.”
수현이 활짝 웃었다.
어찌 보면 과거에도 수현은 큰엄마와 큰아빠보다 생모와 생부를 더 원망했어야 했다.
재산을 받고 자기 아이를 넘긴 후, 홀랑 미국으로 건너간 수현의 진짜 부모는 수현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민 일이 없었다. 나중 큰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모든 일이 밝혀졌을 때도 들춰봐야 마음만 아플 테니 일부러 찾지 않았던 거란 변명 같지도 않은 소릴 늘어놨었고.
‘부모 복은 없었던 걸로 하자. 그리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엔 많은 에너지를 쏟지 말자.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그림이니까.‘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정리했다. 과제에 필요한 사진을 찾고 집에 둘 것들과 새롭게 가져갈 것들을 챙기자 어쩐지 마음도 환기되는 것 같았다.
몇 시간 후.
어색하긴 했지만 전보단 조금 따뜻해진 식탁에서 식사를 마친 수현은 다시 가방을 들고 일선화랑을 향했다.
일선화랑의 여름방학 후원프로그램은 지난주 강유진 관장의 즉흥적인 제안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강유진은 단순히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을 뿐이지만, 수현에게 그 배려는 더할 나위 없는 피난처이자 안식처, 그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모험의 출발점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