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3)
13화. 방학
-세현예고 가을 미술 전시회 전담반 신청.
실기동 1층 로비엔 전지 사이즈의 종이가 줄줄이 붙어 있었다.
맨 위에는 실기 선생님들의 이름이 간격을 두고 적혀있었고, 그 이름 아래로 1번부터 10번까지 열 명의 이름을 채울 수 있는 자리가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 신청자 이름을 쓰면 자동으로 반 배정이 되는 식이었던 거다.
칸이 모두 채워진 선생님 반에는 더 신청할 수 없고, 남은 자리를 찾아 이름을 써야 하니 경쟁은 벌써 치열했다.
“와, 애들 진짜 영악하다.”
벌써 1/3쯤 이름이 채워진 전지를 둘러보며 차윤희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세상은 권력과 돈이구만. 방귀 좀 뀐다는 선생님들 반은 벌써 거의 다 찼어.”
차윤희의 말대로 최형욱이나 실기동에서 목에 힘 좀 준다는 선생들의 전담반엔 신청자가 물밀듯 몰려들고 있었다.
“넌 어느 반으로 갈 거야?”
남은 자리를 가늠하던 박선화가 수현에게 물었다.
“글쎄. 어디로 가지?”
고민하는 척 했지만 수현의 시선이 꽂힌 종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김윤수 선생님의 실기반.
‘와, 이 선생님 실력 진짜 좋았는데, 애들이 아직 뭘 모르는구나. 신청자가 한 명도 없다니.’
수현이 준비한 펜을 들고 전지 앞으로 성큼 다가설 때였다.
“한수현?”
“……?”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김윤수 선생이 수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만났다. 안 그래도 한 번 봤으면 했는데.”
“저를요?”
수현이 눈을 끔뻑이자 김윤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담반 신청하러 온 거지? 수현이 너, 이왕이면 우리 반으로 신청하지 않을래?”
“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수현이 당황하며 머뭇거리자 김윤수가 민망한 얼굴로 껄껄 웃었다.
“아, 혹시 따로 생각해둔 반이 있었니?”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우리 반으로 와. 사실 야외스케치에서 수현이 네가 제출한 그림을 꽤 흥미롭게 봤거든. 완성해가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확실한 증인이 되어주고 싶기도 하고.”
“……증인이요?”
“미술 전시회까지 네가 혼자 힘으로 온전히 작품을 완성했다는 걸 증명할 사람이 필요할 거야. 그러려면 그림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할 거고.”
설마, 김윤수 선생님이었나? 이 공문이 내려온 이유가?
수현이 눈을 빛내는 김윤수를 보며 과거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김윤수는 예전에도 열의가 넘치고 정의로운 선생이긴 했다. 그러나 수현과는 딱히 접점이 없던 인물.
‘크게 튀는 사람은 아니었어. 실력은 좋았지만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고. 거기다 무슨 일인지 2학년 2학기에 접어들 무렵에 학교를 떠났었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많은 게 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엔 김윤수 선생의 미래도, 그와 수현의 관계도 새롭게 그려질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김윤수 같은 선생님이 아군이 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수현이 슬쩍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김윤수를 전담 선생님으로 신청할 생각이었는데, 그가 먼저 자기 그림에 관심이 있다며 다가오다니 반가운 일이었다.
“사실 안 그래도 선생님 반에 이름 쓰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아, 그랬어? 하하. 그래, 잘해보자. 수현아.”
김윤수가 입을 활짝 벌리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수현에 이어 차윤희와 박선화도 김윤수 선생의 반에 차례로 이름을 적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텅 비어 있던 신청서가 신청자들의 이름으로 꽉 메워졌다. 그렇게 미술 전시회 전담반 배정이 모두 끝났다.
***
야외스케치 사건이 일단락되었고, 10월 미술 전시회까지는 각자 심도 있는 작업을 이어 가야 하는 일정.
하지만 잠시 숨 돌릴 틈이 있었으니, 바로 여름 방학이었다.
사건 사고가 많던 1학년 1학기가 마무리되고 바야흐로 37일간의 여름 방학이 시작될 참이었다.
“박준영, 앞으로!”
“네!”
“차윤희, 최미현. 최승호 쭉쭉 나오고.”
“네!”
“네에-”
“예에-!”
“자, 한수현, 한아름까지 다 나와라!”
“네!”
방학식 날 아침.
기말고사 성적이 담긴 성적표와 2학기 교과서가 배부되었다.
성적표를 손에 든 아이들은 울상을 짓기도 했지만 1학년 1학기가 끝났다는 걸 실감하며 들뜬 얼굴로 떠드느라 바빴다. 그런 애들을 담임인 송민식이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학 중에도 실기 수업이 이루어지겠지만, 내일부터 2주간은 아무 수업이 없다. 다들 알고 있지? 2주라도 확실하고 즐겁게 방학을 즐기도록 해라. 그리고 방학 과제도 꼭 해오고.”
“네에!”
“쌤 보고 싶을 거예요!”
“아, 말도 안 돼!”
“2주는 너무 짧아요, 쌤! 우리 아직 1학년인데에!”
“과제하고 나면 방학 끝나있다구요!”
애들이 아우성을 치며 요란한 리액션들을 했지만 송민식은 담담하게 종례를 이어갔다.
“혹시 해외여행이나 다른 일정이 계획된 사람 있으면, 증명서류 가지고 따로 교무실로 찾아오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2주 후부터 실기 수업에 참여하도록. 수업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진행될 거고. 에, 실기도 실기지만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니까 계획표들 잘 짜보고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는 방학이 되길 바란다!”
“으아아아! 스트레스 주지 마세요!”
“오전엔 실기하고 오후엔 공부하고 그게 무슨 방학이에요!”
진저리치며 발을 구르는 아이들. 수현은 그런 애들의 모습에 피식 웃다가 좀 전에 받은 성적표로 시선을 옮겼다.
‘실기 한 과목이야 직접 치렀지만, 다른 시험은 이미 끝난 후였지.’
수현이 과거로 돌아온 시점은 기말고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덕분에 학과 성적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2학기에도 이 성적을 유지하려면 고생은 좀 해야겠지만.
‘장학금은 안정권이긴 한데…… 다음 학기에도 받으려면 엄청 빡세겠네.’
수현이 콧등을 찡그렸다.
과거엔 장학금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형편이라 실기뿐 아니라 학과 공부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성적은 늘 우수했고 이번에도 반 석차 1등. 미술과 전체 138명 중엔 2등을 기록했다.
일선화랑의 후원을 받게 됐으니 믿는 구석이 생기긴 했지만, 그걸로 해이해질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대입을 고려하면 미친 듯이 고삐를 잡고 달려야 할 시간.
‘암기 과목이야 단기간에 따라잡겠지만, 이해 과목은 얼마나 걸릴지 다시 공부해봐야 알겠지…… 어쨌든 뜨거운 여름이 되겠어.’
수현이 착착 새 교과서를 가방에 넣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몇 시간 후.
“좀 시원해지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방학식 후 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학교엔 제법 센 바람이 불었다.
기숙사의 좋은 점이 또 이런 거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요한 학교를 둘러봤다.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기숙사 애들은 다른 학생들이 볼 수 없는 학교 풍경을 살필 수 있다. 실기실과 교실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고.
물론 늦은 밤까지 작업을 하려면 미리 허락을 구해야 하고 외출이 번거로운 단점도 있다. 그래도 집에서 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하지만 내일 아침부터 2주간, 세현예고는 본격적인 방학.
실기 수업이 다시 열리기 전까진 기숙사 학생들도 모두 퇴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현은 붕 뜨는 2주를 일선화랑에서 머물 계획이었지만, 잠깐은 집에 들러야 했다.
하필 방학 과제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란 주제 그리기가 나와 어린 시절 사진이 필요해진 거다. 앨범에서 사진을 몇 장 꺼내야 했다.
‘집이라…….’
수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써 외면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장소. 집.
잠깐 들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수현은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왔다.
애초에 수현이 왜 기숙사에 오게 됐던가.
내성적인 성격이던 수현은 갑갑한 집안 분위기를 참다못해 고등학교 1학기 중간고사 이후 기숙사에 지원한 것이었다.
유독 동생을 편애하던 엄마, 그리고 무뚝뚝한 아버지, 자꾸 비교되는 동생 사이에서 겉도는 것보다 홀로 지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돈이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장학생 전형으로 세현예고에 입학하긴 했지만 기숙사 비용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수현을 따로 불러 기숙사에 넣어주겠단 제안을 했고 수현은 고마우면서도 서운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집을 떠나고 싶으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줬으면 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거다.
‘차라리 그때라도 속 시원하게 사실을 밝혀줬다면 끙끙 앓고 상처받는 시간을 줄였을 텐데.’
수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20대 후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수현은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모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큰아버지, 큰어머니였고, 진짜 부모는 미국에 사는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였단 것을.
‘그 시절이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
수현이 가만히 옛 기억을 더듬었다.
큰아버지네는 결혼 후 8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고 했다.
반면 수현의 진짜 부모는 수현에 이어 연년생 쌍둥이를 낳았고, 마침 사업 실패로 가정형편도 어려워졌다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먼저 나섰고, 큰아버지가 부탁했다던가.
좋지 않은 형편에 아이 셋을 키우긴 힘들 테니 한 명은 형네에 주는 게 어떻겠느냐며 할아버지는 작은아들, 즉 수현의 생부를 설득했다. 대신 재산을 제법 떼어주겠노라고 약속하면서.
모성애나 부성애가 모든 사람에게 절댓값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었던 모양인지, 수현의 부모는 돈을 받고 수현을 넘겨주었고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어쨌거나 수현은 큰아버지네로 입양됐고 몇 년은 그럭저럭 잘 컸다. 일이 복잡해진 건 불임이라 생각했던 큰어머니가 뒤늦게 임신하게 되면서였다.
불행하게도 큰어머니는 처음부터 입양을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집안 어른들이 나서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이니 받아들여라, 몰아붙여 거부하지 못했을 뿐.
그런데 막상 친자식이 생기자 그동안 쌓인 분노와 억울함, 미움이 폭발했고 그 부정적인 감정은 온통 수현을 향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를 부모로 알고 자란 수현은 당시 일곱 살이었다.
원래 부모에게 돌려보내긴 늦은 나이. 억지로 수현을 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원망하며 큰어머니는 수현을 오랜 시간을 미워하고 구박하고 자신의 화를 쏟아냈다.
그 모든 비밀은 한참 가려지다가 수현이 아버지로 알던 큰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밝혀졌다.
아버지, 아니 큰아버지의 장례식장.
가족들을 원망하며 울부짖던 큰어머니. 난처한 얼굴로 미안하단 말만 하던 진짜 부모.
비로소 자기 뿌리를 확인한 수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현실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억울했다.
엄마는 왜 나를 미워할까.
왜 동생만 사랑할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알 수 없던 수현은 학창 시절 내내 우울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진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인생의 설계를 더 빠르게 제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되지도 않을 일에 감정을 소비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수현을 끊임없이 슬프게 만들었던 거다.
아버지로 알았던 큰아버지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집안이 답답했는지 밖으로 도는 일이 많았고 수현에게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현을 도와준 건 딱 한 번.
바로 이 시기, 예고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해준 일뿐이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따로 가족을 찾거나 연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과제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나.’
내일은 진짜 가족으로 알았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아. 답답하네.”
사진 없이 과제를 할 방법은 없을까, 대충 상상으로 그려도 무리는 없을 텐데.
고민하던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쳐야 할 사람들이기도 했다.
과거와 달리 진실을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은 없겠지. 그렇다면 크게 불편할 부분은 없을 거야.
내키진 않지만 언젠간 부딪혀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끝내자는 게 수현의 생각이었다.
‘되도록 빨리 인사만 하고 나오자. 마무리할 것만 확실히 하고…….’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은 오후에 벌써 싸놓은 상태였지만, 한 가지 더 챙길 게 있었다.
저벅저벅. 수현이 석양이 드리워진 미술과 실기동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