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35)
35화. 가을이라는 계절(2)
“와, 거울 진짜 크다.”
“연영과 연습실이 이렇게 생겼구나.”
그 주 CA 시간.
연영과 실기실로 들어온 미술과 애들이 슬쩍슬쩍 주변을 살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TV에 가끔 나오는 댄스 가수들의 연습실과 비슷한 구조.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전면 거울로 된 한쪽 벽이 곧장 눈에 들어와 실제 공간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실제 공간이 작은 건 또 아니었다. 4-50명쯤 되는 인원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이.
다만 책상이나 의자, 그 밖에 소품들도 없이 그야말로 마룻바닥과 거울뿐이라 썰렁한 인상을 주긴 했다.
“뭘 배우지?”
“발성 같은 거?”
“그러게. 지난번 연영과 애들 돈키호테 공연하는 거 엄청 볼만했잖아. 우리도 비슷한 걸 시켜주려나?”
“꿈 깨셔. 대사며 동선이며, 보기엔 쉬워 보여도 막상 무대에 서라고 하면 벌벌 떨기 십상일 건데 타과생한테 그런 걸 하라고 하겠어?”
“히잉. 근데 쌤은 왜 안 오시지?”
소곤거리던 애들의 떠드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때.
“돈키호테 공연을 봤었니? 어디서? 아, 매점 앞 공터에서 연습하는 걸 본 모양이구나?”
언제 섞였는지 아이들 틈에서 다부진 체격을 한 남자가 고개를 쑥 내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억.”
“으아! 깜짝이야!”
“하하. 놀랐니? 놀랐어? 난 아까부터 여기 앉아있었는데 전혀 눈치를 못 챘나 보네?”
누구지? 이상한 사람인가?
아이들이 의심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남자가 벌떡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내가 키가 작은 편이라 눈에 잘 띄진 않았을 거야. 봐라. 이렇게 일어나도 별 차이가 없잖아? 하하! 어쨌거나 다들 반갑다. 연기 수업을 맡은 강진호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
강진호 선생은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애들과 차례차례 시선을 부딪치며 강렬한 눈빛을 발사했다.
“자, 너희는 오늘을 포함해 총 세 번, 연영과 연기 수업을 경험하게 될 거야. CA 수업은 내신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평가나 과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 부담 없이 대충 때우려는 친구들이 많을 거란 거,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너희 선배들이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아주 대충대충 설렁설렁 흘려보내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거든.”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닌데 똑 부러지는 발성 때문일까. 조곤조곤 던지는 팩트 때문일까.
강진호의 말은 또박또박 아이들의 귓가에 와서 꽂혔다.
“사실 고작 세 시간 동안 뭘 배우겠나 의심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세현예고의 커리큘럼이 허투루 만들어졌을까?”
“어…….”
“아니오.”
강진호의 물음에 애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다는 듯 강진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믿어줘서 고맙다. 자, 너희들이 3주간 나를 잘 따라오기만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 이번 기수는 아주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 열심히 해볼 마음이 있는 사람, 손 들어!”
피시식. 입가에 웃음을 띤 애들이 쭈뼛거리며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고 수현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어쩐지 예전과는 다른 느낌.
‘하기는 그땐 입시에만 몰두하고 있어서 선생님 말씀을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수현의 과거 일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학비를 걱정하고 전공 선택이며 미대 입시를 어떻게 치를지 걱정이 많던 시절. 다른 데 눈길을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목표가 분명해지고 자기만의 그림, 예술세계를 만들 욕심이 생긴 지금은 달랐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비로소 마음에 와닿았고 어쩌면 타과 수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단 긍정적인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자,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워밍업을 해보자. 예술가는 자기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미술, 음악, 무용, 연기, 어느 영역의 예술이든 전부 적용되는 이야기야.”
강진호 선생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몇 가지 방법으로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순 있어. 어때? 궁금한가?”
“네!”
“알려주세요, 쌤!”
시선을 사로잡는 화법.
아이들은 어느새 강진호의 말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예술가에게 필요한 건 자신만의 언어! 그런데 나만의 언어를 만들려면 먼저 소스가 필요하다. 이 소스의 주재료는 바로 관찰과 경험이지!”
쉬운 말로 이루어진 설명.
그러나 깊이 있는 이야기에 어떤 아이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애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신기한 게 똑같은 시기를 지나도 사람은 저마다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같은 경험을 해도 누군 즐거운데 누군 슬프게 느끼고 똑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일도 있지. 그렇지?”
“네, 맞아요.”
“와, 공감. 그거 뭔지 알아요!”
마치 연극무대에 선 배우처럼 적당한 제스추어를 취하며 집중력을 높이는 강진호. 아이들은 편안하게 답하며 수업에 참여했다.
“그러니 일상의 경험과 관찰을 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나만의 언어를 만들 수 있다. 그 감정만큼은 오롯이 나만의 것인 셈이니까. 각자의 지문이 찍힌 감정과 경험! 내 안에 있는 그것들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부터가 자기만의 언어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는 거야.”
“오.”
“와.”
어쩐지 멋있게 느껴지는 말에 애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되도록 많은 걸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내가 그걸 어떤 식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그걸 자유자재로 끄집어내고 적당한 농도로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의 새 언어가 인정받게 될 테고. 자, 여기까지 이해되나?”
“네!”
“다는 아닌데 대충은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답하자 강진호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관찰과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열일곱이 된 여러분 안에도 어느 정도 소스가 될 주재료가 있을 거야. 오늘 수업에선 그 경험과 기억을 살피고 끄집어내는 훈련을 해볼 거다.”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거울 끝까지 걸어간 강진호가 바닥에 놓여있던 커다란 가방을 열더니 스피커와 음향 기기를 꺼내 연결했다.
“이제부터 모두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어릴 때 명상 해봤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달칵.
강진호가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고요한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모두 차분하게 음악에 집중해보자.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과 감정들을 뒤로하고 모두 하나에만 집중하는 거야. 먼저 떠올릴 건 외로움이다. 바로 어제여도 좋고, 한 달 전이나 1년 전, 아니 어린 시절로 가도 좋아. 살면서 내가 가장 크게 외로움을 느꼈던 순간. 바로 그때를 차근차근 떠올려보렴.”
실기실엔 한동안 아이들의 숨소리와 작은 기침 소리, 강진호가 틀어둔 피아노 음악 소리만 잔잔히 흘렀다.
‘외로움이라…….’
수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외로움은 수현에게 아주 친숙한 감정이었다.
어린 시절엔 부모의 편애로 따로 떨어진 섬이 된 듯했고 교우관계에서도 한번 적극적인 적이 없었으니까.
수현은 늘 외로웠다.
지극히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관계들이 맺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했다.
웃고 떠드는 무리 안에 있어도 늘 마음을 채우지 못했다.
‘혼자인 시간이 많았지.’
스스로 뭔가를 챙겨 먹을 나이가 되고부터는 집에 혼자일 때가 많았다.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밖에 나가 한참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일이 잦았으니까.
딩동. 딩동. 딩동.
학교에서 돌아오면 빈집인 걸 알면서도 수현은 초인종을 눌렀다.
속으로 열을 센 다음, 열쇠 목걸이를 꺼내 철컥 현관을 열었고.
숙제를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이따금 우편물을 전하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거나 우유와 신문 따윌 들이려는 방문객의 노크가 현관을 쿵쿵 울리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거실에 쥐 죽은 듯 엎드렸다.
다섯 시쯤이 되면 조금 나았다.
TV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 영화를 방영하는 시간.
채널을 맞춰 볼륨을 높이고 밥솥을 열어 공기에 절반쯤 밥을 담았다. 식탁에 놓여있는 얇은 김 봉지를 뜯어 밥을 한 숟가락씩 싸서 먹었다.
좋아하는 만화가 끝나면 여섯 시가 넘었다.
그럼 조금 안심이 됐다.
식구들이 곧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어떤 날은 자꾸만 불안하고 마음이 슬퍼졌는데, 그럴 땐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그 책을 몇 번이나 읽었더라.’
수현이 퍼뜩 떠오른 기억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던 수현은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수현이 좋아한 책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주인공 제제에게 깊이 공감한 수현은 외롭고 무서울 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늘 그 책을 펼쳤다. 서너 페이지만 넘기면 책 속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자신을 괴롭게 한 일들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외로움의 정서엔 한참이나 그 책이 있었어. 상처받고 힘드니 어디에선가는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그 책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반복해 보면서 위안을 얻으려 했던 걸까.’
한참이나 떠올리지 않던 기억이었다. 수현은 마흔에 가까운 나이까지 살았고, 그림을 그만둔 이후엔 오히려 더 거칠고 험한 경험을 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먹고 사는 일이 바쁘고 인생은 지독하게 썼으니 어느 순간 모든 감정에서 둔해졌고.
‘상처받는 일이 많으니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됐지. 감정을 느끼는 게 어느 순간 두려워져서 무감해지려고 노력했어. 아마도 방어기제 같은 거였을 거야.’
그림을 그만뒀기 때문에 감정이 메마른 건지 더는 무엇도 느낄 수 없어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건지, 뭐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지치고 치이며 마음의 문이 닫혔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이 CA 시간 ‘외로움’이란 주제 앞에서 슬쩍 틈을 벌렸던 점이었다.
닫아두었던 기억을 떠올린 수현의 마음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북받쳐 올랐다. 그리고-.
투두득.
주르륵.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이 결국 수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당황한 수현이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을 뜨고 소매로 얼른 눈가를 닦아냈다.
일찍 철이 든 수현은 자신에게마저 냉정하게 굴며 살아왔다.
모든 감정을 일찌감치 거세했다고 생각했는데, 외로운 기억을 떠올린 단 한 번의 시도가 수현의 과거를 빠르게 내달렸고 툭 건드려진 감정은 폭발할 듯 몸집을 부풀렸다.
‘뭐지? 이게 무슨 감정이지?’
잊었던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하나둘 수현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쿵쿵.
어느 때보다 큰 심장 박동을 느끼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수현이 하,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감정의 끝에 기어이 뭔가가 떠올랐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