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7)
47화. 깨달음(1)
“잠은 푹 잤어?”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
길을 아는 제임스 리와 준, 강유진 관장이 앞장섰고, 박선화와 차윤희, 수현과 스티브가 그 뒤를 따랐다.
스윽- 골목을 돌며 자연스럽게 수현의 옆자리로 다가온 스티브가 작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감기에 걸린 건가 걱정했거든.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고 땀도 엄청 흘리던데.”
“아, 기절하듯이 자버렸어. 그래도 12시간이나 잘 줄은 몰랐는데 피곤하긴 했나 봐.”
수현이 민망한 얼굴로 답하자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 추위에 꼼짝도 안 하고 몇 시간을 서 있었으니.”
어제 거리에서 그래피티를 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쏘다닐 땐 몰랐는데, 동이 터올 때까지 있었으니 엄청난 시간을 밖에서 보낸 거다.
“나 진짜 놀랐어.”
아직 여운이 남은 표정으로 스티브가 한 번 더 속삭였다.
“어?”
“네가 그런 걸 그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말이야. 평소보다 무척이나 과감하던데? 망설임 없이 쓱쓱.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말이야. 어쨌든 대단했어. 그 그림.”
“아.”
스티브의 칭찬에 수현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두근두근. 새벽까지 심장을 울리게 한 묘한 감정이 다시 가슴을 부풀게 했다.
정신없이 그렸지. 재밌었고.
게다가 합작이라니.
꿈 같은 일이었다.
12시간 전.
“이거 엄청 좋은데?”
“청량해.”
“감성적이야.”
“음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수현이 그린 커다란 창 앞에 선 애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수욘. 너는 이런 걸 그리고 있었구나.”
뱅크시가 수현의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
“알 것 같아. 네 안에 어떤 게 있는지 말이야. 흐음. 그리고 이 창이라는 소재는 아주 괜찮아 보여.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자극이 될 게 분명해.”
“에이. 소재야 흔하지. 창은 워낙 많이 다뤄진 거라.”
“하지만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건 드물잖아.”
“……오리지널리티?”
“그래. 이건 너만의 창이야. 거기에다 영감과 도전정신을 주는 창. 오늘 여기만 해도 적어도 두 명은 제대로 자극을 받았을걸?”
뱅크시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스티브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어때, 스티브. 수욘의 창을 본 소감 말이야. 너도 이런 창을 하나 그려보고 싶지 않아?”
“꼭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네. 뭐, 벽은 아직 길게 남아있기도 하니까.”
스티브와 뱅크시가 들썩이자 눈치 빠른 마크와 토마스도 끼어들었다.
“나도 할래.”
“나도!”
애들이 허락을 구하듯 수현을 바라보았고,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영광이지.”
‘그리고 순식간에 네 개의 창이 더 그려졌지. 크고 작은, 각각의 풍경을 담은 창들이. 엄청 볼만 했어.’
다시 현실로 돌아온 수현이 스티브에게 물었다.
“너, 혹시 거기 다녀온 거야?”
“응?”
“우리가 어제 그린 것들 말이야. 다시 보고 왔느냐고.”
“아, 물론이지. 원래 범인은 현장에 한 번 더 나타나는 법이잖아.”
“하하. 어땠어?”
“뭐가?”
“그냥 낮에 보면 기분이 다를까 해서. 구경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궁금하고.”
“음. 그런 거라면 직접 경험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가보면 알아.”
스티브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근데 수현, 너 길치야?”
“어?”
“이 길 모르겠어?”
수현이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이 제법 눈에 익었다.
어제 애들과 쏘다니던 그 거리랑 비슷한 게. 아니, 그 거리가 맞나?
“헉. 거기네?”
“그래, 저길 봐. 그 공중전화부스잖아.”
스티브가 킥킥 웃으며 뱅크시가 지난 밤 그려놓은 쥐 그림을 가리켰다. 그러자 박선화와 차윤희도 반응했다.
“어? 뭐지? 새로운 그림인가?”
“그러게. 저건 못 보던 것 같은데?”
“너희도 알아? 저 그림?”
“아, 쇼디치는 워낙에 벽화로 유명하잖아. 다니면서 보니까 몇 개는 또 특징이 있더라고. 저 쥐 그림도 그렇고 캐릭터나 자기만의 글씨체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도 전공자라 이건가.
제법 매서운 눈을 한 둘은 뱅크시와 몇몇 거리예술가들의 그림을 구분하고 있었다.
“와, 근데 수준이 엄청나네.”
“맞아. 그냥 거리에서 볼 만한 낙서가 아니야. 몇몇은 아주 프로페셔널하다니까?”
“이게 프로의 향기란 건가. 아! 근데 저 쥐 그림 그린 작가는 꽤 유명하다던데?”
“응. 뱅크시라고 그래피티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엄청난 스타래. 그래서 눈여겨본 것도 있지.”
얘들 그냥 놀러 다니기만 했던 건 아니었구나.
감탄하는 수현의 눈빛이 너무 솔직했던 걸까. 차윤희와 박선화가 발끈했다.
“와, 한수현. 지금 그 눈빛 뭐야.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인데?”
“맞아. 우리가 그간 놀러 다니기만 한 줄 알았어? 우리도 스케치도 하고, 미술관도 다니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너희 정말 굉장히 훌륭한 시간을 보냈네.”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그때-.
툭.
툭.
퉁.
앞서 걷던 제임스 리, 준, 강유진 관장의 등에 차례로 애들이 부딪쳤다.
“앗.”
“으악!”
“아이코!”
갑자기 왜 걸음을 멈춘 걸까, 고개를 돌려보니,
“엄청 화려해졌는데?”
“와, 이젠 옆 건물이 죽을 정도야.”
“사람도 많아졌어. 여기 그런 가게 아니잖아.”
다들 전날 스티브가 그린 초원과 동물 그래피티를 보고 있었다.
동네 주민답게 구석구석을 꿰고 있는 제임스 리와 준은 특히나 하룻밤 사이 달라진 가게 외관에 놀라는 눈치였다.
“와.”
수현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더 사는구나.’
어른들의 어깨 틈으로 보이는 담벼락 그림은 어제와는 또 달랐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초원의 동물들. 화려한 원색의 그림은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서 더욱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건 못 보던 스타일이지?”
“응. 아무래도 새로운 아티스트가 나타났나 본데?”
그러나 제임스 리와 준은 그게 스티브의 그림일 거라곤 짐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스티브를 후원하는 강유진 관장도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흔드는 걸 보니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결론 내린 듯했고.
“하여튼 재밌는 동네야.”
“그러니까. 어쨌든 잘 된 거잖아? 저 가게엔 말이야.”
힙하게 바뀐 가게 풍경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줄지어 선 손님들을 번갈아 보며 제임스 리와 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골목에선 그 웃음이 뚝, 멈췄다.
“지저스. 대체, 어젯밤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세상에. 미쳤어.”
입을 떡 벌리고 눈앞에 나타난 압도적인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
수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모두가 집중하는 그림은 자신이 어젯밤 그린 [창>이었으니까.
“개성 만점인데?”
“전시회 같아.”
“그러니까. 이렇게 보니 차례로 걸린 갤러리의 액자 같기도 하네.”
“맞아. 거리의 미술관 같다.”
애들도 소곤거렸다.
수현이 그린 창 옆으로 스티브와 뱅크시, 마크, 토마스가 그린 창이 연결돼 있어 꼭 갤러리의 액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애들 눈엔 그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합작이네.”
“맞아. 한 사람 그림 같진 않지? 뭐, 이런 걸 그리는 애들은 그룹을 지어 다니는 일도 많으니까.”
“그렇긴 한데. 난 아까부터 이질감이 들어서 말이야.”
제임스 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턱을 문질렀다.
“특히 이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그의 시선이 향한 건 메인에 그려진 수현의 그림이었다.
“수현.”
제임스 리가 여전히 그림에 시선을 둔 채 수현을 불렀다.
“……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줄래?”
결국 정체를 들켜버린 수현이었다.
***
“그러니까, 우연히 거리예술가들을 알게 됐고, 그 애들이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고?”
“그래서 밤늦은 시간 몰래 집을 나서서 동이 틀 때까지 그림을 그리고 다녔고? 그럼, 그것 때문에 아팠던 거였어?”
잠시 후, 레스토랑에 앉아 자초지종을 들은 제임스 리와 준이 놀랐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다른 애도 아니고 수현이가 네가 그랬다고? 스티브가 먼저 시작한 게 아니라 수현이 네가 먼저? 하, 수현아. 혹시 스티브가 그렇게 말해달라고 한 거 아니지? 그런 거면 솔직하게 말해.”
“아니, 내가 왜요? 내가 왜 말썽꾼 캐릭턴데? 그리고 협박 같은 건 안 하다고요.”
강유진 관장은 도무지 못 믿겠단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고 억울해하는 스티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수현의 대답을 재촉했다.
“죄송해요.”
특별히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림을 그리려다 생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의 걱정을 샀으니 잘못을 비는 게 먼저였다.
모두 수현의 편의를 봐주며 성장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수현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야. 그냥 좀 의외여서 그래.”
그런데 제임스 리가 볼을 씰룩이며 웃었다.
“뭐, 나도 옛날 생각도 나고 말이야. 확실히 예술가에겐 그런 즉흥적인 경험이나 시도들이 필요하긴 하지. 얼마든지 이해해.”
“네. 그래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요.”
“에이, 미리 얘기하면 그게 즉흥적인 경험이 될 수 있나? 마음을 좇아 따라가는 거. 그건 상의가 필요한 일이 아니지. 좋아,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수현. 벽은 좀 뛰어넘은 것 같아?”
제임스 리가 잔뜩 기대를 품은 눈으로 수현의 대답을 재촉했다.
“오리지널리티를 찾는 데 열중하고 있었잖아. 내가 볼 땐 성과가 있는 것 같은데?”
“정말요?”
수현이 놀라며 되물었다.
“[창>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서 눈에 띄긴 했지만, 전이랑 다른 접근 방식이라서 처음엔 긴가민가했거든? 수현, 네 그림이 맞는지, 우연의 일치로 하필 그런 같은 소재의 그림이 이 동네에 그려진 건지 말이야.”
스프를 후룩 떠 마신 제임스 리가 냅킨으로 입을 톡톡 닦아내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네 게 맞더라고. 어떻게 봐도 수현이 네 그림이었어. 그게 바로 오리지널리티지.”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제임스 리에게 이런 극찬을 듣다니. 재료를 바꾸고 자신을 숨기고 그린 그림인데도 제임스 리는 그게 수현의 것임을 알아봤다.
거기에 수현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었기 때문에.
“물론 아직은 거칠어. 좀 더 다듬으면서 드러낼 걸 확실히 드러내야겠지. 몸부터 빨리 회복하고 이어서 더 그려보자.”
“네, 선생님.”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땠니?”
“네?”
“도시의 밤을 누비며 몰래 그림을 그리던 기분 말이야. 어떤 걸 느낀 거야? 뭐가 네 그림을 달라지게 한 거지?”
그리고 제임스 리는 비교적 가벼운, 하지만 이 자리에 앉은 모두의 흥미를 끄는 질문을 던졌다.
“아, 그게…….”
고민하던 수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대하는 이들에겐 미안한 얘기였지만,
“그러니까, 제대로 몰입했던 것 같아요. 그 순간에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