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65)
65화. 봄의 기억
“대박. 그거 우리 반에도 했으면 좋겠다.”
점심시간.
매점으로 애들을 끌고 온 오유나가 반장선거 얘길 소상히 묻더니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겠는데? 진짜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장치인 거잖아.”
아직 인터넷 익명게시판이나 블라인드 같은 게 없는 시절이다.
부정적인 기능도 나타날 수 있겠으나 당장은 재밌어 보이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의함 이야기에 오유나가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학생회에 가게 되면 이거 전교생 범위로 시행할 수 있는지 한번 건의해보려고.”
차윤희가 코를 쓱 문지르며 포부를 밝히자,
“오, 정말? 그렇게 해. 내가 우리 반 반장한테도 팍팍 밀어주라고 할 테니까.”
오유나가 싱긋 웃으며 격려했다.
“너희 반 반장?”
“어. 고형진. 우리 반은 고형진이 반장이거든. 내가 말해둘게. 고형진한테.”
“아. 그렇구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3반 애들은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자리에 함께 있지도 않은 고형진의 의사를 쉽게 결정해버리는 오유나라니.
그냥 가볍게 하는 소리로 넘기기엔 몇 가지 봐온 것들이 걸렸다.
토요일 벽화 그리기를 마치고 돌아가던 때에도 제법 수상한 말을 했었고.
“근데, 유나야. 그날 말이야.”
박선화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일을 입에 올렸다.
“필요하면 반장선거에 도움이 될 증언을 해주겠다고, 여기저기 사람을 심어놨다고 했잖아. 그거 무슨 뜻이었어?”
“아. 그거?”
오유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그날 김하영 파티에도 내가 심어둔 애들이 갔었거든.”
“허어. 그럼 우리 반 애들?”
“응. 그렇지?”
“걔들이 무슨 증언을 해줄 수 있는데?”
“아, 김하영이 그날 선물한 것들이 꽤 고가였대. 그걸 주면서 반장선거에 대해 언급했다더라고. 그거 명백한 부정선거잖아?”
“아…….”
“녹음도 하고 사진도 찍어뒀지. 뭐, 아쉽게도 쓸 일이 없게 되긴 했지만.”
거리낌 없이 자기 패를 보여주며 활짝 웃는 오유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오유나 같은 애는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들 복잡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띠던 그 순간.
딩동댕.
구원처럼 예비 종이 울렸다.
“슬슬 일어날까?”
차윤희가 시계를 가리키며 애들에게 눈짓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식사에 후식까지 마무리한 애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매점 의자에서 일어났고,
“유나야, 잠깐만.”
수현이 유나를 따로 불렀다.
“왜?”
“이거.”
그리고 수현이 내민 쇼핑백 하나. 아까부터 돌려줄 타이밍을 보고 있던 물건이었다.
“뭔데?”
“그날 네가 준 거야.”
“어? 그걸 왜 다시 줘?”
오유나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모르는 건가?
수현이 그런 오유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얘 완전히 내로남불이잖아?’
지난 토요일, 오유나는 친구들과 함께 예고 없이 1반에 들이닥쳐 수현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케이크와 함께 선물도 건넸는데, 나중 기숙사로 돌아가 확인해보니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고가 브랜드의 지갑이었다.
“우리 그날 초면이나 마찬가지였잖아. 이런 선물을 받는 건 좀 이상하지.”
“에이. 그래도 내가 엄청 고심해서 고른 건데, 이러면 너무 민망한데?”
“너, 말이야.”
수현이 웃음을 가득 띤 오유나의 얼굴을 바로 보며 물었다.
“혹시 나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어?”
너스레를 떨던 오유나가 살짝 당황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거면 그때처럼 같이 그림도 그리고 가끔 떡볶이도 먹고 하면 돼. 만약 다른 의도로 준 거라면, 선물이 아닐 테니 더 받을 수 없고. 이해하지?”
수현이 싱긋 웃고는 오유나의 손에 쇼핑백을 쥐여주었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어? 어, 그래.”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수현의 뒷모습을 오유나가 한참이나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하, 희한하네. 한수현, 진짜 신기한 애구나?”
오유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특이한 아이.
환경의 차이도 크고, 여러모로 잘 맞지 않겠다는 것도 확실히 느껴졌다.
그런데 왜일까?
“재밌네.”
자꾸만 수현이 궁금해지는 오유나였다.
***
다시 일주일 후, 미술과 실기동.
복도 게시판에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었다.
“전국 청소년 미술대전? 와, 역시 올해도 열리는구나.”
차윤희가 포스터에 박힌 글씨를 또박또박 읽었다.
“더 커졌나 봐. JK그룹이랑 MJ문화재단에서 후원하고, 문화체육부 주관인 거면 엄청 큰 규모 아냐?”
박선화까지 끼어들자 복도를 지나던 다른 애들도 기웃거리며 한마디씩 보탰다.
“와! 대상 천만 원! 상금도 더 커졌네. 수상작은 국립미술관 전시도 해준다는데?”
“분야는?”
“서양화, 한국화, 도예, 디자인. 조소, 분야도 다양해. 최우수, 입선은 분야별로 한 명씩 뽑고 대상은 통틀어 한 명이야.”
“흐음. 경쟁이 엄청 치열하겠네.”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과 상관없는 대회라 생각하고 있었다.
전국 청소년 미술대전.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 사이에선 흔히 전국대회라 불리는 미술대회.
만 19세 미만 청소년만 참가할 수 있는 전국대회는 전업 작가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겐 작가로서의 가능성과 존재감을 어필하기 가장 좋은 기회기도 했다.
국내 최고 권위, 공신력 있는 대회이니 또래 아이들에게 유명해지는 것은 물론, 미술계 인사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공식적인 계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만 총 3단계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장장 6개월의 여정.
매년 괴물 같은 천재들이 출몰해 범인은 버텨내지 못한다는 괴담.
20명의 깐깐한 심사위원이 단계마다 압박심사를 한다는 무성한 소문이 높은 진입 장벽을 만들었고, 괜히 출전해 망신을 당하느니 가만히 있다가 중간이라도 가자는 게 보통 애들의 생각이었다.
“이제 곧 입신데, 무슨 미술대회에 6개월이나 투자를 해.”
“그러게. 작년에 참가했던 선배 둘, 결국 입시에도 타격받아서 국내 대학 포기하고 유학 준비한다잖아.”
“그러니까. 도전하긴 좀 위험하지.”
수군대는 애들을 보며 수현이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 역시 과거엔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수현은 참가비 3만 원을 낼 돈이 없었다.
싫은 얼굴을 할 게 뻔한 엄마에게 돈을 달란 얘길 할 자신이 없었고,
따로 도움을 받을 선생님도, 재료비도 감당할 수 없겠단 판단 때문이었다.
당장 대학 입시 준비만 해도 버거울 때였으니까.
하지만, 이 대회가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제대로 알았더라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이번 전국대회, 그 애도 나오겠지.’
수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김민준.
20대 시절, 수현의 남자친구이자, 이후 세계적인 화가가 된 인물.
수현의 포트폴리오로 미국 최고의 미술대학 RISA에 입학한 그는 이후에도 수현의 아이디어와 습작을 거리낌 없이 도용해 결국 뉴욕 화랑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수현을 거름 삼아 모든 영광을 대신 누렸고.
“하아.”
오랜만에 떠오른 이름에 수현이 저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언젠간 마주치겠거니 각오는 하고 있었다.
동갑이었으니, 김민준은 현재 수현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면 중앙예고에 다니고 있을 거다.
적당한 배경에 적당한 재능.
김민준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진 그다지 눈에 띄는 애가 아니었다.
갑자기 키가 크기 시작한 아이처럼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두각을 나타냈는데, 세현예고에 밀려 만년 2등에 머무는 중앙예고는 그런 김민준에 목을 매며 아주 공격적으로 지원하고 밀어줬다.
그리고 그 첫 결실을 거둔 사건이 바로 96년, 전국 청소년 미술대전이었고.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96년 대상은 김민준이 차지했었지.’
수현이 오래된 기억을 차분히 떠올렸다.
말이 많던 대회였다.
세현예고가 중앙예고에 밀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결과가 발표되고 한동안은 시끄러웠다.
당시 미술과 과장이던 최형욱 선생은 전국대회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세현예고 애들이 대거 참가를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대회 수준이 낮아진 탓이라 일축했다.
일정 부분은 사실이었고, 중앙예고 김민준이 빈집 털이를 했다는 악의적인 평이 뒤따랐으나, 곧 잠잠해졌다.
어쨌거나 확실한 대상은 김민준이었고, 그 상은 김민준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전국대회로 연결된 인맥과 지원으로 김민준은 입시까지 수월하게 지나 국내 최고의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계속해 기대주로 주목받으며 입지를 다졌고, 22살엔 수현을 만나 또 한 번 재능을 꽃피웠다.
‘이제는 이렇게 잘 보이는데, 그땐 몰랐지.’
수현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센스가 좋고, 눈치는 빨랐고, 새로운 것을 금방 익히는 데다가, 본질을 꿰뚫는 눈도 좋았다.
김민준은 스펀지처럼 배운 걸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가르치는 선생들도 지도할 맛이 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 칭찬이 쑥 들어갔다.
이유는 하나였다.
소름 끼칠 정도의 카피 실력.
김민준은 가르친 것뿐 아니라 일부러 남겨둔 것도 모조리 벗겨내 제 것으로 취했다.
단순한 표절이라 보긴 애매했다. 베껴낸 것이 오히려 원작보다 월등했으니까.
그러니 다들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마도 사람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라고. 저 애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일 거라고.
수현도 그랬다.
김민준이 자신이 스케치한 것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가공하는 걸 봤을 때, 같은 소재를 두고 대화한 적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 주제가 나만의 것이라 할 수는 없는 거라고.
불편하지만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게 그 애의 고질적인 그리고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과연 지금은 어떨까.’
열여덟의 나이.
본래 수현이 그를 처음 보게 되는 스물둘보다 4년 앞서 있었다.
그애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기생하며 성장했던 걸까.
지금도 남의 것들을 거리낌 없이 가져다 쓰면서 자기 실력을 키우고 포장하고 있을까.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전이랑은 달라.’
수현이 심호흡했다.
자신의 것에 늘 자신 없었던, 그래서 빼앗기고도 한마디 항의조차 할 수 없던 주눅 든 과거와는 달랐다.
수현은 자신의 그림을 벌써 몇 차례 세상에 선보였고, 뛰어난 스승과 예술적 영감을 교류하는 친구들을 얻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무엇이 자신의 그림인지 방향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준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만들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 애가 부정한 방법으로 다른 이의 몫을 편취하는 일만큼은 막아보겠다고,
그리고 이왕이면 이 미술대회의 대상을 차지해 미래를 위한 좋은 포석으로 삼아보겠다고, 수현은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