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승리를 향하여 (5)
“다시 만나서 반갑소, 몰로토프 장관. 오랜만이오.”
“하하하······ 오, 오랜만입니다, 총통 각하.”
전쟁 중인 나라에서 침략국의 사신을 환대하기 위한 파티는 역사에서 자주 있었지만, 평화회담이 결렬된 후에 열리는 파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몰로토프는 자신을 환대하는 히틀러와 어색한 악수를 했다.
히틀러가 자신을 보러 만찬에 참석하러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몰로토프는 이게 뭔 일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회담이 좋게 마무리된 것도 아닌데 만찬을 여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그것도 총통이 직접 온다니.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반대로 독일이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독일은 서쪽에선 영국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면서도 동부전선에서는 연일 승전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패배하고 있는 적국의 대표단에 이토록 잘해주는 이유가 뭘까?
아무리 적국이라곤 하나 기본적으로 손님을 대하는 예의라고 치기에는 만찬 자리는 너무나 화려했다.
“인사들 나누시오. 여기는 총통 대리 헤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전에 모스크바에서 만난 적 있지요?”
“그렇지요······?”
만찬에는 히틀러 총통, 리벤트로프, 헤스, 토트, 슈페어, 프리크, 로젠베르크를 비롯해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고위층이 많이 참석했다.
SS 의장대가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만찬이 시작되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위해 다들 건배합시다. 비록 평화로 가는 길은 멀고 멀지만, 이 또한 언젠가는 다 지나가지 않겠소? 자, 오늘만큼은 모두 다 잊고 단순히 즐깁시다!”
“지크 하일!”
“하일 히틀러!”
독일인 참석자 전원이 승리 만세를 외치는 동안 그들 사이에 낀 소련인 참석자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잔에는 소련에서 구하기 힘든 값비싼 프랑스산 샴페인이 담겨 있었다.
“몰로토프 장관, 서기장께서는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소. 마지막으로 뵌 지 벌써 8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언제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뵙고 싶소이다.”
“하하하. 돌아가면 서기장 동지께 꼭 전하겠습니다.”
자꾸만 친한 척, 친근하게 말을 거는 히틀러의 모습에 몰로토프는 매번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숙련된 외교관답게 웃는 얼굴로 독일 총통을 대했다.
만찬이 무르익을 무렵,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참 안타깝구려. 이번에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몰로토프는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그는 주변을 살핀 뒤 이쪽을 주목하는 시선이 별로 없음을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카프카스는 소비에트 연방에 꼭 필요한 곳이니까요.”
“뭐어, 장관도 나름의 고충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겠지. 이해하오. 그래도 내일 바로 가기보다는 며칠 더 머무르는 것이 어떠시오? 꼭 브레슬라우에만 있을 필요도 없는데.”
“친절에 감사드립니다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관광은 다음 방문 때 즐기도록 하지요.”
“빈말이 아니라 꼭 그러도록 하시오. 아아,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내가 준비한 선물이오.”
히틀러가 손뼉을 가볍게 치자 크라우제가 작은 상자를 가지고 다가왔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 안에는 독일 최고의 시계장인이 만든 손목시계가 들어있었다.
“아 랑에 운트 죄네(A. Lange & Söhne)사에 특별주문해서 만든 최고급 시계요.”
아 랑에 운트 죄네는 시계장인이었던 페르디난트 아돌프 랑에가 1845년 작센 왕국에서 설립된 독일 최고의 시계 제작사로 스위스의 명품 시계에 꿀리지 않는 높은 품질과 화려하고 정교한 외관으로 명성이 높았다.
“전에 말했던 스탈린 서기장의 독일 방문 때 선물하려고 제작한 것인데, 시계제작이 끝나자마자 전쟁이 터져서 말이오.”
“제가 감히 이걸 받아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양말고 받아주시오. 애초에 그러려고 만든 물건이니. 서기장께서도 마음에 들어하셨으면 좋겠구려.”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관에 몰로토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초침하며 백금으로 도금된 시계 본체와 광택이 도는 검은색 소가죽 벨트까지. 소련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고위급 간부들조차 좀처럼 손에 넣기 힘든 값비싼 물건이었다.
시계는 총 3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스탈린의 몫, 하나는 몰로토프의 몫.
마지막 하나는······
“남은 하나는 누구의 것입니까?”
“아, 이건 주코프 장군의 것이오.”
“주코프 장군 말입니까?”
히틀러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대답에 몰로토프는 어리둥절했다. 주코프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몰로토프의 당황한 얼굴을 본 히틀러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시오. 비록 적이지만 주코프 장군이 보인 노력과 투지에 대한 찬사의 마음을 담은 것이니. 그 옛날 중세시대 때도 적에게 경의를 담아 선물을 보낸 경우가 많지 않소? 그것의 연장선이라 보면 될 거요.”
***
1942년 9월 7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그러니까······ 히틀러가 그렇게 말했다고?”
“예, 서기장 동지.”
날이 지나기 무섭게 몰로토프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몰로토프는 저녁에 스탈린과 만나 독일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보고했다.
회담 시작부터 결과, 그리고 만찬 때 오갔던 말들까지 전부.
히틀러가 몰로토프에게 건넨 선물은 NKVD의 기술자들에 의해 나사 하나까지 분해되어 철저히 분석되고 있었다.
몰로토프의 구술이 모두 끝나자 스탈린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감았던 두 눈을 뜬 스탈린은 몰로토프의 눈 대신 천장을 응시하며 말을 걸었다.
“그거참 이상하군. 어째서 히틀러가 동무에게 그렇게까지 잘해준 거지?”
단순한 외교적 예의라고 치기에는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회담이 잘 풀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끝났는데도 총통이 직접 참석해 만찬까지 연다라.
“그래도 과거에 일면식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히틀러는 그렇게 단순한 인간이 아니오. 분명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혹시 독일도 사정이 급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이나마 들었지만, 스탈린은 이내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독일이 사정이 급하다면 카프카스까지 요구하지 않고 바로 정전협정을 체결했을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불안한 독일이 정전협정 체결을 애걸하기 위해 몰로토프에게 잘 보이려 했다는 추측은 현실성이 없었다.
“일단은 고생했소, 동무. 소련과 독일을 왕복하느라 여러모로 고생했을 텐데 이만 돌아가서 푹 쉬시구려.”
몰로토프는 예의 바르게 묵례를 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몰로토프가 크렘린을 떠난 후 스탈린은 책상의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고 3분 뒤 건장한 체격의 NKVD 대령이 집무실로 들어와 절도있게 경례를 올렸다.
“히틀러의 선물에서 뭐 나온 게 있나?”
“없습니다, 서기장 동지.”
“없다고?”
“예. 독극물도, 폭약도, 독침도 없는 평범한 시계입니다.”
대령의 말에 스탈린은 뭔가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히틀러가 준 시계에는 스탈린이 우려하는 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전쟁 중인 적국의 지도자에게 선물이라. 히틀러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가면 갈수록 스탈린은 히틀러의 의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질 나쁜 조롱일지도 모른다. 동냥하는 거지에게 비웃으며 금화를 던져주는 졸부마냥 스탈린과 소련을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준 선물일 수도 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그런 취미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탈리아와 정전협정을 체결하던 날, 이탈리아 대표단에 파인애플을 썰어놓고 구워낸 피자 같은 별 해괴한 음식을 대접한 적이 있어도.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도 조롱이 맞는 것 같은데.
의도를 알 수 없는 시계 선물뿐 아니라 스탈린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은 또 있었다.
몰로토프를 따라 독일로 갔던 협상단 일원 중에 외무인민위원회 소속으로 위장한 NKVD 요원들이 직접 작성한 보고서였다.
해당 보고서에는 히틀러와 몰로토프가 ‘수상할 정도로 친근한 모습’을 유지했다고 적혀 있었다.
또 만찬에 히틀러와 리벤트로프 외에도 헤스, 프리크, 토트와 슈페어 같은 독일 고위층 인사들을 대거 참석한 것도 매우 의심스러웠다.
단순한 환영 만찬에 불과하다면 굳이 이들까지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자리에는 없는 주코프의 몫까지 따로 선물을 준비한 게 영 수상쩍었다.
히틀러가 몰로토프에게 보인 지나치게 친근한 모습, 만찬에 참석한 제3제국의 고위층 인사들, 그리고 몰로토프와 주코프 몫으로 따로 빼둔 고급시계.
이것들이 의미하는 게 대체 뭘까?
‘······혹시?’
히틀러는 몰로토프나 주코프가 소련의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서기장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있는 건가?
혹은 그 둘을 친독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밑밥을 까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서 말한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모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주코프에겐 친척이 독일 공작원과 접선했다는 의혹까지 있다.
전쟁으로 인한 부담과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스탈린의 고질적인 의심병을 더욱 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작 히틀러는 몰로토프와 주코프를 두고 어떠한 평가의 말도 남긴 적이 없지만 한 번 시작된 의심은 밑도 끝도 없이 커져만 갔다.
***
1942년 9월 8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스탈린 놈, 지금쯤 머리가 터질 노릇이겠지?”
“총통 각하의 혜안에는 정말 감탄 밖에 안 나옵니다.”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하실 수 있는지······ 저흰 죽었다 깨어나도 총통 각하의 두뇌를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됐네, 됐어. 아직 효과가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들뜨면 곤란하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니.”
과도할 정도로 몰로토프를 환대하고, 그에게 선물을 줘서 보낸다는 발상은 회의 도중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전쟁에서 지고 있느라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닌 스탈린에게 누가 봐도 의도가 의심스러운 짓을 하고 선물까지 바리바리 챙겨서 보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러잖아도 측근들은 물론이고 자기 가족과 친척들조차 의심해서 굴라그로 보낸 스탈린인데, 당연히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확신하건대 지금쯤 스탈린은 내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을 것이다.
몰로토프와 주코프는 일거수일투족이 스탈린에게 감시당하는 처지일 테고, 이 둘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 역시 덩달아 스탈린의 감시대상으로 등록되었으리라.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내 희망 사항으로 의외로 별 탈 없이 그냥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내가 아는 의심병 말기 환자인 스탈린은 결코 이를 그냥 넘길 위인이 아니다.
증거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자위질하던 놈인데, 대놓고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걸 넘길 리가 없다.
“그래도 정전협정이 무산된 건 영 아쉽구만. 전쟁을 빨리 끝낼 기회였는데.”
“빨갱이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맞습니다. 곧 국방군이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총통 각하께 승전보를 전해올 것입니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묻는데 중부집단군은 어디까지 진격했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기 전에 모스크에는 도착해야 할 텐데.”
“중부집단군은 지금 뱌지마에 있습니다. 현 속도대로라면 10월 무렵에는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걱정마십시오.”
***
1942년 9월 9일
소련 뱌지마
“비트만 SS 중위님! 비트만 SS 중위님!”
“······또 뭔데.”
“출동이랍니다. 지금 전선이 돌파당했다고······.”
하씨.
전차장석에 앉아 새우잠을 청하던 비트만은 출동이란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앞서 진격하던 제320보병사단이 소련군의 기습을 받아 돌파를 허용했다.
“출동이 갈수록 잦아지는군. 로스케들이 갈수록 독해지고 있어.”
“대대장님으로부터 주의사항입니다. 소련군의 신형 전차가 목격되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신형 전차라고? 아, 그 85mm 주포 장착한 T-34? 이름이 T-34/85였나?”
“아마도 맞을 겁니다.”
8월 말부터 전선에서 목격되기 시작한 T-34/85, 원조식 표기에 따르면 T-34-85로 불리는 85mm 주포 장착형 T-34는 76mm 주포를 장착한 T-34/76보다 위험한 녀석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비트만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래봤자 티거보다 한 수 아래인 놈들인데 겁먹을 필요 있나.
한 달 전 SS와 국방군을 통틀어 독일군 최초로 적 전차 60대 격파를 달성해 파울 하우서 SS 상급대장으로부터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은 비트만은 백엽기사십자장 후보에까지 오른 상태였다.
수십 대의 전차를 고철더미로 만든 그에게 티거와 함께라면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았다.
“가자, 로스케 사냥하러! 전차 전진!”
준비를 마친 6대의 티거는 전선으로 질주했다.
출발한 지 10분이 다 되어갈 무렵, 비트만은 적과 조우했다.
“정지. 1시 방향에 로스케들이다.”
비트만이 발견한 전차들의 수는 대략 30대. 2개 중대가 훌쩍 넘는 규모로 절반 가까이가 예의 T-34/85였다.
비트만은 오늘 처음 보는 놈들이었다.
저놈들이 예의 그 신형 전차들인가 보군. 차체는 T-34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포탑이 달랐다.
76mm 포를 장착한 T-34보다 대형에, 주포도 더 크고 길쭉한 전차였다.
‘확실히 저 긴 주포는 위협적이겠어.’
“볼, 주포가 긴 놈들부터 처리한다! 철갑탄 장전!”
“장전 완료!”
리히터가 철갑탄을 장전하자 볼은 조준을 끝마쳤다. 볼은 평소대로 T-34의 중앙에 조준을 맞췄다.
“조준 완료!”
“쏴!”
88이 울부짖자 소련군의 신형 전차는 폭발하며 정지했다. 전면에 뚫린 구멍으로 불길이 노란 혓바닥을 내밀었다.
“적 전차 격파!”
“잘했다. 다음!”
비트만의 예측대로 T-34/85의 성능은 티거보다 아래였다.
하지만 T-34/85는 T-34/76보다 장갑이 강화된 신형 포탑을 장착해 포탑 한정으로 방어력이 T-34/76보다 뛰어났고, 76mm F-34 전차포보다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도 높은 85mm S-53 전차포를 장착해 700m에서 티거의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T-34/76이 100m 안으로 접근해야 티거의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것을 감안하면 월등히 뛰어난 성능이었다.
“소대, 적과의 거리에 주의해라! 85mm 단 놈들부터 먼저 해치워!”
-수신 완료!
정신없이 T-34들을 줄여나가고 있는데 처음 보는 생김새의 돌격포가 나타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향해 달려왔다.
“저 못생긴 놈은 뭐야?”
못생겼다. 그것이 SU-203과 처음 조우한 비트만이 남긴 평가였다. 실제로 SU-203의 외형은 소련군조차도 못생겼다고 폄하할 정도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외형과 별개로 SU-203의 화력은 결코 급이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콰아아앙!!!
“미친, 이 무슨!?”
SU-203에서 집채만 한 섬광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본 비트만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헤드폰을 썼는데도 폭음에 귀가 얼얼했다. 어찌나 아픈지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인 광경은 옆으로 전복된 티거였다.
포탄이 명중한 것도 아니고 근거리에 떨어졌는데도 무게 48톤에 육박하는 중전차가 양철 깡통처럼 엎어져 있는 광경에 비트만은 경악했다.
“저놈, 저 새끼 조준해! 조준 끝나는 대로 바로 쏴!”
“아, 알겠습니다!”
적잖이 당황한 볼의 목소리가 인터컴을 타고 전해지는 가운데 비트만의 두 눈이 SU-203을 쫓았다.
놈은 조금 전의 포탄을 쏜 뒤 격파당한 잔해 뒤로 이동했다.
저 커다란 주포에 걸맞은 포탄을 장전하려면 분명 시간이 오래 걸릴 터.
포탄이 장전되는 동안은 무방비 상태이기에 몸을 숨기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놈이 잔해 뒤로 숨기 전 조준을 완료한 볼이 발포했다.
88mm 철갑탄이 SU-203의 전투실 측면에 명중하자 본체의 몇십 배는 됨직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찌나 큰 폭발이었는지 SU-203 뒤에 있던 T-34/85도 폭발에 휩쓸려 주포가 망가지고 궤도가 끊어져 전투불능이 될 정도였다.
***
잠시 위기가 있었지만, 전투는 독일군의 승리로 끝났다.
스무 번째 T-34가 불길에 휩싸이자, 소련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후퇴했다. 독일군은 퇴각하는 소련군을 추격해 4대를 추가로 격파했다.
독일군의 피해도 무시할 정도는 못 되었다.
티거 1대가 SU-203의 지근탄에 전투불능이 되었고 다른 1대는 근거리까지 접근한 T-34/85에게 공격을 허용해 차체 하부가 관통당했다.
남은 티거 4대도 저마다 크고 작은 손상을 입어 정비가 불가피했다.
전투가 끝났어도 전차병들은 쉽게 웃을 수 없었다. 앞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오늘 피부로 직접 체감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