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Hitler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먹구름 (1)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드디어 유럽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지크 하일! 마인 퓌러!”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
“해냈어! 독일이 해냈다고!”
영국 본토 정복, 그리고 미국과의 강화조약 체결이 발표되면서 독일의 거리는 매일같이 축제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
맥주홀은 승전을 축하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밤이면 밤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과 그들 때문에 난감해하는 경찰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 거주민 중 덴마크행을 원하는 주민들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보내졌다.
잔류를 선택한 주민들은 신생 아이슬란드 공화국과 그린란드 공화국의 첫 국민이 되었다.
전쟁도 끝났으니, 전시에 징집된 병사들을 제대시켜 각자의 고향과 집, 일터로 돌려보내는 작업 또한 빠르게 진행되었다.
제일 먼저 기혼자에 처자식이 있는 예비역들이 먼저 전역 증명서를 받았다.
전역 증명서를 들고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사람들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조국 독일에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준 자랑스러운 독일의 아들들로서 금의환향하게 된 군인들에게 시민들은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모두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의 장병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고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꽃다발과 플래카드를 든 인파가 아닌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들의 황량한 전경이었다.
미국과 맺은 협정에 따라 해방되어 미국에 도착한 병사들은 가족과의 재회라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기 무섭게 그들이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재배치되었다. 아직 아시아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유럽에서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던 미국은 유럽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과의 전쟁에 더욱 집중했다.
유럽 방면에 투입되었던 육군, 항공, 해군 전력이 모두 태평양으로 재배치되었고, 장군들은 독일의 공세로부터 영국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하루빨리 도쿄로 진군하기 위한 전략을 연구했다.
그러나 모두가 태평양 전쟁에 집중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나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 새로운 전략을 연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서 오게. 유럽에서 제법 고생했다고 들었네.”
“저보다는 여기, 패튼 장군이 더 고생했지요.”
“크흠, 흠. 과찬입니다, 아이크.”
아이젠하워의 배려에 패튼은 자기가 후배는 잘 뒀다고 뿌듯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망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쟁 내내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결국엔 도망치듯이 영국에서 철수했다.
마셜은 패튼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아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무작정 영국에 병력을 보내기로 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FDR의 결정이었지 패튼의 결정이 아니었으니.
그리고 미국의 전차들이 독일의 전차들과 비교해서 성능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 것 역시 패튼의 잘못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미군과 독일군의 교전을 관찰하고 독일군의 강점과 미군이 가진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던 패튼은 아는 것에 대해서 모두 말해보라는 마셜의 말에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듯이 말을 쏟아냈다.
독일군에게는 여러 강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강력한 보병 화력이었다.
“우리 군은 분대원 중 10명에서 11명에게는 M1 개런드를 쥐여주고, 한두 명에게는 브라우닝 자동소총을 쥐여주지만, 제리들은 ‘슈투름게베어 39’, 그놈들이 돌격소총이라고 부르는 신형 기관단총을 분대원 전체에게 지급해서 화력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놈들이 히틀러의 전기톱이라고 부르는 MG40도 아군이 사용하는 M1917이나 M1919보다 성능이 뛰어날뿐더러 우리는 바주카로 타이거를 잡으려면 측면이나 후면을 때려야 하는데, 제리들은 그들의 무기로 어느 방향에서 쏴도 맞추기만 하면 무조건 격파였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제리들의 무기는 아군의 그것보다 몇 단계 더 위에 있습니다.”
패튼의 목소리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자신에게도 적들이 쓰는 것과 같은 무기가 있었으면, 이렇게 무참히 밀려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한.
울분을 토하는 패튼의 말에 마셜은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보병들 간의 화력 문제도 크지만, 전차들의 성능은 더욱 심각하다. 미군이 사용하는 M4 셔먼은 티거, 판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갑을 강화한 점보 셔먼이나 90mm 주포를 단 슈퍼 셔먼은 75mm, 76mm 주포를 장착한 셔먼보다 사정이 낫지만 역시나 독일군의 전차들과 동일 선상에 놓기에는 곤란했다.
유일하게 장갑, 화력에서 티거, 판터와 견줄 수 있는 전차가 M26 퍼싱이었지만, 신뢰성이 바닥을 긴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단점 탓에 많은 퍼싱이 전장에 버려져 독일군에게 노획되거나 측면이 잡혀 격파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독일은 판터 II, 티거 II라는 퍼싱보다 강력한 전차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
일본군이 굴리는 양철 조각 같은 전차들의 상대로 퍼싱까지 갈 것도 없이 셔먼이면 충분하지만, 유럽에서는 퍼싱조차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독일과 전쟁이 끝났어도 독일과의 전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지금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전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제리들의 대갈통을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잘 알겠네.”
흥분한 패튼과 다르게 마셜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러나 그도 퍼싱보다 강력하고 신뢰성 뛰어난 전차의 필요성은 공감하고 있었다.
육군 항공대의 아놀드도 패튼과 비슷한 소리를 했다.
지금보다 날렵하고 강력한 전투기가 필요하다! 미국이 보유한 B-17, B-24, B-25 등의 폭격기들은 동맹 영국은 물론 적국 독일과 비교해도 성능에서 꿀릴 게 없지만, 전투기는 아니었다.
특히 그놈의 제트기에 입은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갈 길이 태산이군. 주문서를 받아든 마셜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국엔 다소 과해 보이는 주문조차도 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과 인력, 시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월리스의 승인 아래 미국은 독일의 전쟁 병기에 대항할 새로운 무기들에 대한 개발을 진행했다.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독일과의 다음 전쟁에 대비해서.
***
1943년 9월 12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에도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독일의 최우선 과제는 단연 경제회복.
……인 줄 알았다.
SD의 보고를 받기 전까지.
샤흐트 교수님이 진행하는 ‘독일 경제 부흥 프로젝트’에 관한 장장 7시간에 걸친 강의를 끝내고 저녁을 먹기 위해 회의실을 나서는데 셸렌베르크가 보고할 게 있다며 찾아왔다.
“급한 일인가?”
“느긋한 사안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밥 먹고 보고 받아도 될 정도인가 아니면 당장 보고 받아야 하는 정도인가?”
“식사가 끝나신 뒤에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럼 우선 밥부터 먹고 보고를 받겠네. 7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지금 내가 대단히 배가 고픈 상태거든. 자네도 같이 들겠나?”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미 먹어서 다음에 불러주신다면 꼭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우리끼리 갑시다.”
식사하는 동안 나는 하와이안 피자와 김치 그라탕을 권했지만, 샤흐트와 풍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여간 이 맛알못 게르만족들 같으니라고. 이게 얼마나 맛있는 것들인데.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로 가자 셸렌베르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셸렌베르크가 건넨 보고서를 찬찬히 살폈다.
갈수록 시력이 나빠져서 그런지 글자가 전보다 흐릿하게 보였다. 가까운 시일 안에 검사받고 안경을 새로 맞춰야겠군.
셸렌베르크가 내게 건넨 보고서는 소련 내부 동향을 담은 것이었다.
러시아에서의 전쟁은 독일의 대승과 자유 러시아의 설립으로 종결되었지만, SD와 아프베어가 소련 내부에 꽂아 넣은 첩자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각종 정보를 보내오고 있었다.
지금 소련에서는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애당초 예견된 일이라 놀랍거나 충격이라는 느낌은 안 들었다.
독재국가에서 전쟁에서 패한 독재자가 자신의 권위에 위협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 권력의 유지를 위해 적당한 희생양들을 선정해 책임을 뒤집어씌운 뒤 죽이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6.25가 끝난 뒤 김일성이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숙청한 뒤, 절대권력을 장악한 게 대표적인 예시다.
그런데 스탈린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된다고 판단해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을 숙청했다.
그 주코프마저도 하마터면 굴라그로 끌려갈 뻔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을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는 전쟁에서 이기지도 못하고 러시아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처참하게 패배했다.
당연히 스탈린은 자신의 권위에 손상이 갔으리라 확신했을 테고 이를 무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숙청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권력과 목숨의 무병장수를 위해서.
“아무튼, 우리에겐 잘된 일 아닌가? 자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독일에 신경 쓰지 못할 테니 말이네.”
“그래서인지 자유 러시아에서 이상한 상상을 하는 모양 같습니다.”
“……이상한 상상이라고?”
설마……?
***
제2차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간신히 독일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지만 스탈린의 위기는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자신이 주장하고 자신이 결정해서 일으킨 전쟁이 러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최악의 대패로 끝났다.
패전으로 소련은 서부의 알짜배기 땅들을 모조리 독일에 빼앗겼고 독일은 소련으로부터 빼앗은 땅에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들을 세웠다.
독일이 표면상으로 독립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자, 소련의 통치를 받던 수많은 소수민족이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소련, 특히 스탈린은 러시아 전역의 소수민족들을 차별 없이 골고루 박해하고, 이주시키고, 학살했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통치로 소련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주의, 민족주의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소련의 탄압과 학살이 두려워 소수민족들은 입을 다물고 현실에 순응했지만, 독소전쟁의 승패가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저항심리에 불을 질렀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카프카스를 보라.
저들도 카자흐, 우즈벡, 키르기스, 바시키르인들처럼 볼셰비키들의 지독한 탄압을 받아왔다.
그러나 저들은 끝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놓치지 않았고 독일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수 있었다.
우리라고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우리도 독립할 수 있다! 독립하여 우리만의 정부를 세우고 우리들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독일이 정복한 동방의 영토에 세운 괴뢰국들은 소련에 남아있는 수많은 소수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자극했다.
시베리아, 카자흐, 우즈벡 등 소련 곳곳에서 스탈린과 공산당을 모욕하는 낙서와 포스터들이 거리에 나붙기 시작했다.
소련 당국에 의해 금지된 서적들과 소지가 금지된 깃발들의 유통 역시 활발해졌다.
스탈린은 이를 소비에트 연방과 인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반역행위라 발표하며 철저한 토벌과 색출, 처형을 붉은 군대와 NKVD에게 지시했다.
전쟁 기간 내내 후방에서 탈영병 및 민간인 처형에 열을 올렸던 스메르시와 NKVD들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이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자유 러시아 대신 소련행을 택한 소련군 포로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소련에 도착하는 즉시 NKVD의 강도 높은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죽은 이들은 그대로 땅에 파묻혔고 고문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굴라그로 보내졌다.
다시 소련 전역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후방의 인민들은 전쟁 기간보다 지금을 더욱 두려워했다.
전쟁 중에도 NKVD에 의한 불심검문과 색출이 자행되었지만,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후방의 공장에서 전선의 병사들이 사용할 소총과 반합을 만들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전선이 뒤로 밀리기 시작하면서 스메르시와 NKVD는 늘어가는 탈영병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전방으로 보내졌다.
덕분에 후방의 인민들은 전시라는 이유로 쥐꼬리만큼 배급되는 식량으로 인한 배고픔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방으로 보내졌던 감시자들은 다시 후방을 들쑤시고 다니며 무고한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지하실을 개조한 감옥과 취조실, 고문실에선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총살대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장군들도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스탈린의 전쟁 중 자신이 저지른 실책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권력에 위험이 될 만한 이들을 하나둘씩 쳐내기 시작했다.
“세묜 티모셴코. 네놈들을 조국과 인민에 대한 반역혐의로 체포하겠다.”
“끌고 가!”
“나는 아냐! 나는 아니라고!”
스탈린의 터무니없는 명령과 간섭으로 독일군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티모셴코가 첫 희생양이었다.
티모셴코를 시작으로 수많은 장교가 새벽 또는 대낮에 들이닥친 NKVD에 체포되어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질질 끌려나갔다.
전쟁에서 과오를 저질러 질책을 받은 적이 있거나 좌천된 장교들이 1순위로 제거되었다.
그다음이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한 장교들의 차례였고 세 번째가 전장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거나 진급한 장교들이었다.
지도자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항상 인민들의 피였다.
이보다 많은 피가 필요했다. 그래야 권력을, 자신의 목숨, 자신의 부귀영화를 지킬 수 있었기에.
소련에서 부는 피바람은 스탈린의 의도와 다르게 더 많은 민족주의자를 자극했다. 소련 당국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제 그들은 예전처럼 오밤중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골목에 집과 공장의 구석에서 제작한 조잡한 포스터를 붙이고 저항을 촉구하는 선전 문구를 써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은 공산당 당사에 화염병과 폭탄을 투척했다.
그들은 붉은 군대의 전용 열차가 지나는 철로에 폭탄을 설치하고 쿠이비셰프로 가는 식량 수송행렬을 습격했으며 병사들을 죽이고 그들의 무기를 노획해 스스로를 무장시켰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새롭게 세워진 러시아 정부 역시 일련의 과정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