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49)
늪
* * *
“바로 결투라니! 성미도 급하군!”
하이엘프한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었다.
데일은 성큼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다.
하이엘프는 곧장 화살을 쏘아보냈다.
연이어 쏘아낸 화살 3대가 절묘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다.
데일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텅. 터텅!
건틀렛에 부딪힌 화살이 한꺼번에 쳐내어졌다.
하이엘프는 눈을 크게 떴다.
“오.”
그녀는 곧장 활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데일 상대로 화살이 의미가 없다는 걸 곧장 깨달은 것이다.
대신 허리춤에 달고 있던 한손검과 손도끼를 꺼내, 양손에 각각 들었다.
데일도 마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을 더듬었고 이내 깨달았다.
‘쯧. 그러고 보니 다 잃어버렸군.’
두르핀의 폭발에 휘말려 몸이 조각나던 그때. 마법 반사 망토도. 마검도. 유물 장갑과 배낭도 전부 날아가 버렸다.
웬만한 물건은 전부 녹아버렸을 것이고 마검이나 망토는 강물에 떠밀려 늪지 어딘가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검이나 망토보다는 배낭을 잃어버린 게 더 뼈아팠다.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가령. 깃털펜이라거나.
아쉬워해봤자 어쩔 수 없다.
데일은 마치 복싱을 하듯. 양팔을 들어 올려 하이엘프에게 접근했다.
적은 손도끼와 검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상관없다. 데일에게는 단단한 갑옷이 있으니.
둘이 천천히 거리감을 재고 있던 그때.
데일은 기습적으로 땅을 박차며 하이엘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하이엘프는 당황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검을 뻗었다. 검 끝이 노리는 건 갑옷과 투구 사이의 이음매.
데일은 피하지 않았다.
그냥 검이 목을 파고들게 내두었다.
“어?”
당연히 피할 줄 알았던 하이엘프는 당황했다. 흑기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몰랐기에 나온 반응이다.
데일은 목에 검이 꽂힌 채로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꽝!
하이엘프는 급하게 도끼를 되돌려 방어해냈다. 하지만 그 안에 실린 충격까지 전부 흘려낼 수는 없었다.
뒤로 크게 밀려난 하이엘프는 공중제비를 돌며 다시 바닥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멋쩍게 말했다.
“그.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검을 좀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데일은 주저 없이 답했다.
“싫어.”
그러고는 목에 꽂힌 검을 뽑아, 그대로 저 늪 멀리 던져버렸다.
“앗. 아앗. 내 검이…… 너무한 거 아닌가? 너를 좋은 전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좋은 전사를 늪 속에 파묻혀 있게 내버려 두나?”
“결국엔 이렇게 스스로 잘 빠져나오지 않았나? 내가 옳았다는 게 아닌가?”
이 하이엘프. 어째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한다.
데일은 귀찮게 입씨름하는 대신, 다시 거리를 좁혔다.
하이엘프도 다시 자세를 잡았다. 검을 잃었지만, 전의를 잃지는 않았다.
투박한 도끼가 흉흉하게 반짝였다.
순식간에 하이엘프 앞으로 당도한 데일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
도끼로 응수하려던 하이엘프는 돌연. 도끼를 데일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쿵.
데일이 쳐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하이엘프의 양손이 데일의 오른팔을 붙잡고 있었다.
팔을 겨드랑이에 낀 하이엘프는 그대로 관절의 반대 방향을 향해 힘을 주었다.
갑옷이 방어하고 있어, 본래라면 터무니없는 시도겠지만…….
드득.
하이엘프의 근력이 예상보다 더 강하다.
게다가 힘을 어느 방향. 어느 각도로 넣어야 극대화가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이엘프들의 무투술.’
이런 식으로 관절기를 걸어오는 상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팔이 반대 방향으로 꺾일 것이다.
데일은 발을 걸어 하이엘프의 균형을 무너트린 뒤, 그대로 정확히 반대 힘을 주어 상대의 관절기를 풀어버렸다.
“오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게 대처하냐는 질문.
당장 죽을 위기에서 묻기에는 너무나 한가한 의문이기도 했다.
데일은 대답 없이 손을 뻗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대로 명치를 후려칠 생각이었다.
하이엘프가 급히 외쳤다.
“천둥아!”
그 순간. 허공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팔면체의 반투명한 생명체가 나타났다.
꽈아아아앙!
요란한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온 늪이 들썩였다.
충격파 탓에 데일의 일격에 실린 힘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데일은 끝끝내 팔을 뻗었다.
그리고 하이엘프의 명치 부위를 가격했다.
“컥!”
하이엘프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걸로 싸움은 끝.
데일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에 막았다?’
무조건 명치에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 팔을 교차해 막아냈다.
역시 이 하이엘프.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데일은 바닥에 널브러져 낑낑대는 하이엘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마지막 그거. 천둥 정령인가?”
허공에 나타나서 갑작스럽게 충격파를 터트리던 생명체.
천둥 정령은 소수의 하이엘프 전사만이 다룰 수 있는 존재였다.
데일 역시 천둥 정령을 다룰 수는 없었다. 정령들은 데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이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실력이 대단하군. 정말 놀랄 정도다. 부족의 가장 강한 전사도 너보다는 약할 텐데…… 자. 이제 나를 죽여라. 훌륭한 전사에게 죽을 수 있어 영광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왜지? 나를 죽이고 싶어하던 거 아니었나?”
사실 맞다.
데일이 엘프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이 하이엘프는 살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명치를 향해 일격을 날린 것도, 반쯤은 죽으라는 의지를 담아 뻗은 공격이다.
다만 하이엘프는 데일의 생각 이상으로 실력이 뛰어났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리고 하이엘프 사회에서는 더 강하고, 지혜로운 전사의 말이 곧 법이었다.
한번 확실히 꺾어놓은 이상.
이 하이엘프는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이다.
무엇보다.
“난 이 늪의 지리를 모른다. 빠져나가는 길도 당연히 모르고.”
울창한 나무와 질척이는 바닥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에서는 방향조차 잡기 어려웠다.
길치인 데일은 과장이 아니라, 영원히 이곳을 헤맬 수도 있었다.
하이엘프는 수긍했다.
“흠. 그렇군. 알았다. 도와주겠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군.”
데일은 손을 뻗었다. 하이엘프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일에게 얻어맞은 부위가 빨갛게 부어있었다.
내심 부러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이 하이엘프는 튼튼했다.
“난 라그나다. 코리의 딸, 라그나. 너는?”
“데일이다.”
“데일? 진짜로 그 이름인가?”
라그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데일이 물었다.
“왜 그러나?”
“아니. 우리 한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라…… 그러고보니 싸우는 것도 어딘가 하이엘프스럽기도 했고. 딱딱 끊어 말하는 억양이나 말하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야 너희들한테서 이것저것 배웠으니까.”
“진짜인가?!”
라그나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느 부족과 함께했나?”
“이름이 분명…… 나라트 부족이었던가.”
“나라트 부족이라! 설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사는 이들 아닌가! 허. 그렇군. 알고 봤더니 동향 친구나 다름없었군. 잘 부탁한다.”
라그나가 부쩍 친한 척을 하며 데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했다.
데일은 그 손을 툭 쳐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이 얘기는 그만하겠다.”
“왜. 설산 얘기 재밌지 않는…….”
데일이 싸늘하게 노려보자 라그나가 입을 다물었다.
하이엘프에 대한 주제는 데일에게는 썩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라그나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의미 없는 대화는 더는 사양이다.
데일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정보 수집이다.
우선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여름이니까…… 기껏해야 3개월 정도 지났으려나?’
데일이 물었다.
“지금이 몇 월 며칠인지 아나?”
“몇 월?”
라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멍청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여름이다.”
“여름인 건 나도 알아. 몇월이냐고.”
“으음. 그런 건 안 센지 오래라서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눈앞의 엘프는 야만인과 다름없다.
외부와의 교류가 없다면, 제국에서 사용하는 날짜를 모른다 해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평소에는 시간이나 계절이 흐르는 걸 어떻게 알지?”
“태양과 별의 위치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흠.”
데일은 질문을 바꿔보았다.
“그러면 네가 보기에 가을이 올 때까지는 몇 번째 밤이 필요할 것 같나.”
“몇 번째. 음…… 아. 달이 두 번 차고 기울고. 해가 다섯 번 떠오르면 가을이 될 것 같다.”
‘가을을 대충 10월로 두면. 지금이 8월쯤인가?’
그렇다면 계산상으로는 4개월이 흘렀다는 게 된다.
‘4개월이라.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
4개월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거인산에 있던 동료들은 어디로 향했을까.
또. 황제와 하늘을 나는 이레네. 그리고 악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일단 이 늪을 벗어나야 한다.
데일이 물었다.
“이 늪을 나가고 싶은데. 안내 좀 해줬으면 좋겠군.”
“앗. 바로 나가는 건가? 으음. 더 있다 가도 좋지 않나? 여기 늪도 살기 나쁘지 않다. 따뜻하고. 먹을 것도 많고.”
라그나는 늪 생활의 즐거움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했다.
데일이 떠나는 걸 원치 않는 모양.
하지만 데일은 냉정했다.
“됐고. 여기서 늪 밖으로 나가기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늪지 마을이라고 아나?”
늪지 마을. 하켄의 고향.
이 늪에서는 가장 가까운 인간 마을이다.
‘마을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곳을 목적지로 삼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데일의 단호함에 침울해진 라그나가 말했다.
“나흘만 걸으면 될 거다.”
“나흘…… 멀리도 떠밀려 왔군.”
늪은 생각보다 더 광활했다.
라그나가 없었으면 정말로 곤란할 뻔했다.
“아. 그리고 불길하게 생긴 검을 못 봤나? 검은색이고, 롱소드보다 길고 대검보다는 좀 짧은데. 사자가 그려진 망토나 유물 장갑도.”
“불길한 검? 사자가 그려진 망토? 장갑?”
고개를 갸우뚱한 라그나가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내가 주워서 쓰지 않았겠나?”
“그건…… 그렇군.”
마검은 몰라도, 망토를 발견했다 분명 라그나가 착용하고 돌아다녔을 거다.
‘곤란하군.’
마검도. 바이만의 망토도. 유물 장갑이나 발튼이 만들어준 갈고리도.
전부 유용하게 사용하던 물건이다.
기왕이면 찾고 싶었지만…….
‘이 넓은 늪에서 찾는 건 어렵겠군.’
아쉬움을 삼키고.
데일은 라그나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라그나는 늪의 지리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어디로 발을 디디면 늪에 빨려들지 알았고, 어디가 위험한지도 잘 알았다.
그 능숙한 모습에, 데일은 라그나가 그간 보였던 짜증 나는 행동들을 모두 용서하기로 했다.
둘은 온종일 걸었다.
데일은 무한한 체력을 지녔고, 라그나 역시 만만치 않게 체력이 좋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지루하게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데일은 하이 엘프에 대한 이야기만 아니면 신경 쓰지 않았고, 라그나도 오랜만에 듣는 바깥의 이야기에 즐거워했다.
“악마가 이레네까지 점령하다니. 큰일이군.”
“이레네를 아나?”
“옛날에 들러본 적이 있다. 매우 번창한 도시였지.”
라그나도 여느 하이엘프처럼 설산이 고향일 것이고, 이곳 남부 늪지대까지 오려면 자연스레 이레네를 경유했을 수밖에 없다.
데일은 문득 궁금했다.
‘이 녀석은 왜 이런 늪지에서 혼자 살고 있는 거지.’
처음부터 느꼈던 의문점이다.
하지만 데일은 구태여 그 부분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데일과 라그나는 이제 갓 만난 사이다.
친하지도 않았고. 가까워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뿐히 앞서가던 라그나는 돌연. 어느 커다란 나무에서 멈춰 섰다.
나무줄기에는 쇠붙이로 긁어낸 듯한 표식이 나 있었다.
“아. 여기서는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그러지?”
“이곳부터는 검은 이빨의 영역이다.”
“검은 이빨? 뭘 말하는 거지?”
“직접 보면 안다.”
라그나는 갑자기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돌발 행동은 익숙하다.
데일도 라그나를 따라 나무를 올랐다.
둘은 꽤 높이까지 오른 뒤, 나뭇가지 중 하나에 걸터앉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늪이 저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라그나는 바로 근처를 가리켰다.
나무들이 거의 없는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한 무리의 리자드맨들이 모여 있었다.
‘검은 이빨은 리자드맨을 말한 건가.’
라그나가 리자드맨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놈. 저 덩치 큰 놈이 바로 검은 이빨이다. 몇 번 사냥하려 했지만, 놈의 부하가 많아서 번번이 실패했다.”
“흠.”
“저놈들은 철을 좋아해서 바닥에 떨어진 쇳덩이는 뭐든 줍는다. 내 무기도 저놈들한테 뺏길뻔했다.”
데일은 라그나의 말을 흘려들으며, 시력에 집중했다.
확실히. 이빨이 새까맣고 덩치가 유달리 큰 녀석이 하나 있었다.
무리의 우두머리일까?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몬스터들이 살기 마련이니.
하지만 그때.
검은 이빨이 바닥의 진흙을 휘적이더니, 그 아래서 무언가 기다란 걸 꺼내 하늘에 들어 올렸다.
그러자 휘하 리자드맨들이 검은 이빨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마치 성물이라도 모시는 신자와도 같은 경건한 태도다.
근데. 놈들이 숭배하는 저 물건이 어쩐지 낯이 익다.
‘……저게 왜 저깄지?’
마검이 태양 빛을 반사해, 음울한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