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
흑기사 데일
* * *
흑기사는 언데드와 사람의 경계에 있는 불안정한 존재다.
이 반 언데드 기사의 마음에는 인간의 마음과 언데드의 본능이 공존한다.
때로는 그 둘이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지시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했다.
그 강력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데일이 절대 흑기사를 고르지 않던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이 몸에 처음 빙의했을 때, 데일이 얼마나 좌절했던가.
“…….”
데일은 습관적으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런 고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흑기사가 되면서 데일의 심장은 박동하기를 멈췄다.
하지만 이런 몸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지치지를 않는다. 잠도 잘 필요가 없으며,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
그저 제때 생기만 채워주면 되었다. 마치 자동차에 가솔린을 넣는 것처럼.
데일은 남들보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걸었다.
함께 걷는 용병, 갈색 머리가 유난히 곱슬거리는 하켄이 감탄을 흘렸다.
“오우. 남들 짐까지 들고 끄떡없다니. 확실히 반쯤 언데드가 되니 신체가 남다른가 봅니다.”
“그래.”
“흠. 나도 흑기사가 되기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나. 밤의 여신은 사람 안 가린다는데.”
하켄이 농담처럼 내뱉었다. 옆을 힐끔 쳐다본 데일이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추천하지는 않는다. 별로 좋은 몸은 아니야.”
“하하하! 저도 농담한 겁니다. 듣기로 흑기사는 감각이 둔하다면서요. 그럼 어? 이거 할 때도 아무 느낌 안 날 거 아닙니까.”
하켄은 왼손을 동그랗게 말아쥔 뒤, 검지를 넣다 빼는 시늉을 했다.
“어? 사람이 결국 즐기려고 사는 건데 말입니다. 여자를 안아도 아무 느낌 없으면, 대체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 흠흠”
하켄은 급하게 헛기침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생각해보니 데일에게 할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일은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켄이 무슨 말을 하든 무관심해 보였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하켄이 말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함께하게 됐는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골렌의 아들 하켄입니다. 아까 봤던 퀼하고는 불알친구고, 그리고 어……. 아 그래. 철패 용병이고, 2등급 실드맨입니다.”
등급. 게임식으로 말하면 레벨.
강한 적과 싸우고, 신전에 가 등급을 올린다.
이 세계는 그가 즐겨하던 게임과 똑같은 법칙이 적용되었다.
‘2 등급 실드맨. 무장은 체인 메일에 원형 방패.’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난하게 키웠군.”
“예 그렇죠. 열심히 키……. 예?”
“데일. 등급은 1. 흑기사다.”
“엥? 그렇게 잘 싸우시는데, 등급이 1이었습니까? 아 하긴. 원래 기사셨으니 이상할 건 없나.”
잠깐 당황했던 하켄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등급이 어떻든 데일은 강하다.
인맥을 쌓아둔다면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켄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꺼냈다. 소강상태에 접어든 최전선의 상황. 용병 업계가 돌아가는 꼬락서니. 황실에 벌어진 스캔들.
하켄은 용병답게 아는 게 많았다.
데일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솔직히 듣기 귀찮았지만, 가끔 쓸모 있는 정보도 있어 입을 닥치게 하기도 뭐했다.
그때. 뒤쪽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좀 함께 걸으면 안 됩니까?”
하켄은 귀찮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견습 사제가 허리에 양손을 짚고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살아남은 마차 승객 10여 명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서 있었다. 하나같이 지친 몰골.
견습 사제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당신들처럼 체력이 좋지 못합니다. 부디 여유를 가져주세요.”
하켄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서둘러도 모자랄 판에 여유는 무슨 얼어 죽을 여유야. 주변에 괴물이 돌아다니는데 밖에서 야영하고 싶어?”
“그건 그렇지만……. 아이와 노인들도 있습니다. 휴식이 필요해요.”
견습 사제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녀 역시 자기가 무리한 부탁을 한다는 걸 잘 알았다.
쯧. 하고 혀를 찬 하켄이 데일에게 말했다.
“데일 경. 그냥 이참에 버리고 가죠? 짐 덩이들을 굳이 달고 다닐 필요가 있나요?”
견습 사제는 경악했다.
“무슨……. 약자들을 버리라니.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입니까!”
“헤. 돈 안 되면 가족도 버리는 세상에서 무슨.”
콧방귀를 뀐 하켄이 데일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습니까 내 제안. 경께서도 딱히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
데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하켄의 의견이 더 공감되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따위. 어떻게 되든 데일이랑 무슨 상관인가.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이끌고 다닐 이유는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버리고 가는 게 옳았다.
이건 언데드로서의 본능.
하지만 내면의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두 의견 사이를 조율해야 한다.
데일은 견습 사제에게 다가갔다. 견습 사제는 떨리는 다리로 반발짝 뒤로 물러났다.
일전에 데일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피범벅으로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데일이 물었다.
“이름이 에스델이라 했나?”
“맞습니다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에스델. 제안을 하겠다.”
데일의 차갑고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에스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에스델은 억지로 용기를 쥐어 짜내며 물었다.
“뭡니까. 말해보십시오.”
“내가 너희들을 계속 데리고 다녀야하는 이유를 만들어라.”
“이유라니. 그야…….”
사람으로서의 도의를 말하려던 에스델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가.
도의는 물론, 인간이기 마저 포기한 흑기사가 아닌가.
게다가 데일은 이유를 대라고 하지 않고, ‘만들라고’ 했다.
‘거래를 하자는 뜻. 자기가 만족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라는 거야.’
에스델은 손가락으로 백금발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그녀가 고민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데일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해가 산등성이에 걸렸다. 이제 곧 밤이 찾아올 것이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에스델은 황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우선 눈앞의 상대가 원할 만한 건 몇 개 없었다.
‘돈……. 이겠지. 아마.’
돈은 모두에게 공평한 가치를 지닌다. 설령 그게 반 언데드인 흑기사일지라도 마찬가지.
문제는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다.
에스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초췌하고 남루한 모습의 사람들이 에스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저히 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건 견습 사제인 에스델도 마찬가지. 수중에는 최소한의 생활비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에스델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알았다.”
데일이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 하자 에스델은 서둘러 말했다.
“하, 하지만 제가 책임지고 빚을 갚겠습니다.”
하켄이 코웃음을 쳤다.
“뭐 어떻게 갚겠다는 거야.”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저는 교단에서 나름 촉망받는 인재입니다. 금방 등급을 올릴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두 분이 사제의 힘이 필요할 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신앙을 걸고 맹세하죠.”
“쉽게 말해 몸으로 갚겠다 이거구만.”
“모, 몸으로라니.”
하켄이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일 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단에서 촉망받는 사제라는 게 거짓말일 수도 있어요. 봤잖아요. 전투 중에 기적 하나 제대로 사용 못 하던 거.”
“…….”
데일은 고민했다.
확실히. 하켄 말 대로 에스델의 잠재력은 불확실하다.
시간이 지난다고 제대로 된 사제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반푼이 사제라도 나한테는 감지덕지다.’
흑기사 직업을 선택했을 때 얻게 되는 가장 큰 페널티는 빛의 신앙을 따르는 이들에게 적의를 사는 것이다.
사제나 성기사의 도움을 받으려면 터무니없는 액수의 바가지를 써야 했다.
문제는 사제가 파티의 필수 인력이라는 점이다. 같은 전력이라도 사제가 있고 없고는 안전성에서 비교 불가다.
이런 점 때문에 흑기사는 게임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직업이었다.
사제 없이 게임을 진행하는 건 굉장히 어려웠으니.
‘하지만 이번에 에스델에게 빚을 지워두면?’
에스델 본인은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스델을 통해 빛의 교단에 어느 정도 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데일은 결정을 내렸다.
“신앙을 걸고 맹세한다고 했나?”
“……예!”
에스델은 의지 깃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인다. 이제 데일은 낼 수 없는 빛이다.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후우.”
에스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외로 하켄은 데일의 결정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뭐. 설령 저 견습 사제가 별 쓸모가 없어도 진짜 몸으로 갚게 하면 되니…….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고. 저는 아주 좋습니다.”
하켄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델은 불쾌한 얼굴로 자기 몸을 가렸다.
데일은 둘을 무시하고는 말했다.
“이제 적당히 쉬었겠지. 다시 출발하겠다.”
데일의 지시에 주저앉았던 사람들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하켄이 물었다.
“그래서 데일 경. 이대로면 해가 질 것 같은데, 오늘 밤은 야영할 건가요?”
“아니. 계속 이동하겠다.”
“하긴. 제대로 보초 설 인원도 몇 없는데 야영은 힘들겠죠. 무리해서라도 움직여야겠네요.”
데일은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럿을 이끄는 만큼 행군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에스델은 사람들을 격려하며 행여나 낙오자가 나오지 않게 애를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일은 계속 고개를 돌리며 양옆에 펼쳐진 숲에만 시선을 주었다.
하켄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겁니까. 사람 불안하게스리. 아직 해도 다 안 졌잖아요.”
데일은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며 작은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일곱이었다.”
“예?”
“처음에 우리를 습격한 원아이. 일곱 마리였다고.”
“무슨 소립니까. 분명 여섯이었지 않습니까?”
“동료가 죽는 걸 보고 곧바로 도망친 녀석이 하나 있었다.”
“어엇.”
하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일은 덤덤하게 물었다.
“이터의 생태에 대해서는 좀 아나?”
“예? 아뇨. 저도 잘은…….”
게임에서는 기본 상식인데. 이 용병은 전선에서 복귀하는 터라 이런 쪽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데일이 설명했다.
“놈들은 영역에 민감하고 무리 생활을 한다. 무리 생활을 한다는 건 우두머리 개체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놈들은 동료애가 무척 강해. 반드시 복수하러 올 거다.”
“엇. 그렇다면.”
이터 놈들이 지금도 쫓아오고 있을 거라는 말 아닌가. 그것도 우두머리가 직접.
그냥 이터도 끔찍한 놈들인데, 우두머리는 어떨까.
하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 그래도 아직 거리는 좀 있겠죠?”
“아니. 바로 근처까지 왔다. 느껴진다.”
흑기사의 특성 ‘부정한 감각’.
촉각이나 통각, 미각이 무뎌진 대신 그 외의 감각이 민감해진다.
특히 새로 생겨난 여섯 번째 감각은 살기나 적의, 그리고 피 냄새에 몹시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데일의 감각이 말했다.
적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어. 어어?”
당황한 하켄이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은 평온했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의아해하며 하켄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하켄은 왜 데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지 알아챘다.
“……사람들한테 굳이 말할 내용은 아니군요.”
“구태여 혼란만 발생할 거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싸워야지.”
“이길 수 있는 겁니까?”
“이겨야지.”
덤덤한 말에 하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길 수 있다가 아닌, 이겨야 한다.
확실히. 지금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이미 적이 근처까지 와있다면 이제 와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건 그저 적이 언제 공격해올까 기다리는 것뿐.
둘은 슬쩍 걸음을 늦춰 사람들과 거리를 좁혔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흩어지는 것보다는 뭉쳐서 대항하는 게 낫다.
둘에게서 묘한 분위기를 느낀 걸까? 에스델도 긴장한 얼굴로 목에 걸린 교단의 상징을 붙잡았다.
적막 속에서 점점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땅거미가 졌다.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횃불을 켰다.
횃불의 빛이 어둠을 밀어낸 그 순간이었다.
쐐액!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횃불을 든 사내의 팔을 휘감았다.
“어?”
사내는 안간힘을 쓰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팔을 감은 혀는 그대로 사내를 잡아당기려 했다.
하지만 데일이 더 빨랐다.
번개처럼 휘둘러진 롱소드가 혓바닥을 잘랐다.
촤악!
“키야아아아!”
피가 튀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숲을 울렸다.
당황한 사람들은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어둠 속에서 흉흉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수십 쌍.
에스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 너무 많잖아.”
하지만 데일은 무덤덤하다. 어둠 속에서 유독 강한 기세를 흩뿌리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짧게 내뱉었다.
“빨리 덤벼.”
다른 개체보다 덩치가 족히 두 배는 큰 외눈 괴물이 어슬렁 걸어 나왔다. 놈은 데일을 보며 침을 뚝뚝 흘렸다.
동료를 죽인 원수의 살점은 분명 맛있으리라.
하지만 데일은 눈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투구의 면갑을 내렸다.
이윽고, 투구의 눈구멍 속에 푸른 귀화가 피어올랐다.
하늘에는 그믐달이 떴다.
밤은 흑기사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