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200)
황혼
* * *
데일은 케톱의 피를 마셨다.
‘케톱의 피를 마시면 내구가 올라가던가?’
바로 반응이 오는 것 같다.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몸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뼈가 조금 단단해지는 느낌이랄까.
데일은 케톱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마셨다.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은 조금 뜨악한 얼굴로. 혹은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데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피를 마시는 데에만 집중했다.
피를 다 마시자, 데일은 머리를 부여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에 들어찬 케톱의 영혼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서 잠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데일에게 에른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데일 경.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리저리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킨 데일이 말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것 같으니 다시 이동하지.”
데일의 명에 따라 군단이 다시 이동했다.
습격은 없었다.
악마조차도 가볍게 격퇴했는데, 그 누가 덤벼들겠는가.
그렇게 3군단은 별 저항 없이 검게 죽어버린 황무지를 이동했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이윽고 저 멀리 세워진 건축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탑이다……!”
대체 어떻게 저리 높이 지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불길한 탑.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흉물의 등장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라면 엄청나게 높다는 건가.’
하늘을 찌른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황혼이 지은 탑은 이미 저 하늘에 닿아 구름을 꿰뚫고 있었다.
데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가득 펼쳐진 주황빛이 저 탑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저 탑을 통해 힘을 모으고 있다. 즉, 저 탑만 무너트리면 황혼의 목적도 저지할 수 있다는 거겠지.’
이쪽의 목표는 간단하다.
저 끔찍한 탑의 붕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의식이 완성되는 것만큼은 막아내야 한다.
3군단은 계속해 전진했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다.
그때.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 깃발을 알아본 데일이 말했다.
“에스델 쪽 사람들이다. 전령인 것 같다.”
군단은 행군을 멈추고 전령을 맞이했다.
전령으로서 온 젊은 사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데일 경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 교단의 사제가 초면부터 호의적이라서 조금 놀랐을 뿐이다.”
사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와서 누가 그런 유치한 싸움을 하겠습니까. 애초에 두 여신께서는 서로 화해하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힘을 합쳐야지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부드럽게 말한 사제는 상황을 설명했다.
“하켄 사령관이 이끄는 서부군과 엘드리엄의 북부 군세가 합세해, 적의 서쪽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에스델 성하께서는 양측의 지휘관이 만나 함께 대화를 나누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급하더라도, 최소한의 조율은 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두 군대가 서쪽과 동쪽에서 황혼의 군세를 친다.
대전략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은 일단 조절할 필요가 있긴 하다.
자칫 타이밍이 엇나갔다가는 두 군대가 함께 싸우는 게 아닌, 따로따로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으니.
“알겠다. 어디서 만나면 되지?”
“저희가 북쪽에도 이미 진지를 마련해놨습니다. 그곳에서 회담을 가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황혼의 군세가 도리어 이쪽을 공격해올 가능성은?”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럴 확률은 낮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몇 번 도발도 해봤지만, 완전히 수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같이 듣던 에른스트와 아일라. 그리고 마탑의 고위 마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데일은 함께 갈 사람들과 최소한의 호위를 꾸려나갔다.
“경. 저희도 같이 갈게요.”
“우리도 함께 가게 해주게.”
엘레나와 프라우가 자원했다.
데일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다 같이 얼굴 한번 보면 좋겠지.”
에른스트가 물었다.
“근데 그곳까지는 또 어떻게 갈 거야? 왔다 갔다 하는데 시간이 엄청 걸릴 것 같은데.”
“밴쉬 자매의 힘을 좀 이용해 보지.”
데일은 야가브에게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야가브는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살아있는 사람이라…… 아슬아슬하게 될 것 같은데? 중간에 마력이 조금 부족할 수도 있긴 한데, 뭐. 잘못돼도 죽기밖에 더 하겠어?”
야가브의 말에 자매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반대로 프라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할 것 같네. 응. 그게 좋겠어.”
“경. 제 호위기사가 저를 버리고 이곳에 남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하, 하, 하지만 저런 유령들의 배를 타야 한다니…… 차라리 그냥 뛰어가면 안 되겠나? 응? 데일 내 친우여. 부탁일세!”
“얌전히 타기나 해라. 시간 아까우니까.”
아일라와 에른스트를 비롯한 인사들이 유령선에 올라탔다.
그들 역시 언데드의 배에 타는 걸 탐탁지 않아 했지만, 데일이 괜찮다고 보증한 만큼 더 거절하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프라우가 반쯤 끌려와서 배에 오르자, 야가브가 웃음을 터트렸다.
“히히! 이런 귀한 인간들을 태워본 건 처음이군! 자! 자매들아! 준비해라!”
밴쉬들이 일행에 영체화 마법을 걸어주었다.
언데드가 보인 마법의 활용에 기사들은 껄끄러워했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흥미를 보였다.
“호오.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던가?”
“이런 방법도 있었군. 사람한테 써먹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지만 말이야.”
“언데드도 얕볼 게 못 되겠어.”
이윽고. 완전히 영체화 된 사람들은 현실과 분리되었다.
녹색 빛이 유령선을 두르자, 이내 배가 두둥실 날아올랐다.
데일은 조금 흐릿한 시야로 평야를 내려다보았다.
굳이 유령선에 올라탄 건 직접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유령선이 충분히 날아오르자, 적의 상황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데일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숫자가 이렇게 많다고?’
드넓은 황무지에 적군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다.
인간 병사들. 악마의 군세와 그 추종자. 누구의 하수인인지 모를 끔찍한 괴물들이 한데 얽혀 엄청난 대군을 이루었다.
그들은 명백히 이쪽보다 숫자가 많다.
적군이 빼곡히 모여, 마치 검은 파도가 꿈틀거리는 듯한 광경에 데일은 말을 잃었다.
‘병사들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군.’
만약 일반 병사들이 저 압도적인 군세를 한눈에 담았다면, 모든 전의를 잃고 도망쳤으리라.
다른 이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당황한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대체 몇만이나 되는 건지…….’
데일은 야가브에게 손짓했다.
미리 얘기해둔 대로, 최대한 적 진영에 접근하라는 신호다.
고개를 끄덕인 야가브가 배를 움직였다.
늘 쾌활하고 유쾌한 야가브마저 조금 긴장한 기색이다.
적 쪽에서 자칫 요격이라도 날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 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서 적의 상황을 확인하고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승산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칫 요격당해 내가 증발해버린다면…….’
꽤나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어쩌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는 위험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밖의 동료들은 일부러 다른 배에 태웠으니, 설령 데일이 탄 배가 요격당해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으리라.
데일은 아래에 펼쳐진 적군의 상황을 꼼꼼히 확인했다.
‘여러 집단이 섞여 있지만, 서로 따로 떨어져 있어.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하다는 거겠지.’
황혼의 군세. 악마와 그 추종자들. 어디에서 왔을지 모를 괴물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은 서로를 썩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장 황혼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악마에게 긴 시간 고통받아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황혼이라는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같은 대의를 품고 있으니 잠시 함께할 뿐.
그 둘은 절대 사이가 좋을 수 없다.
심지어 같은 악마끼리도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으니, 하나의 군대라기보다는 여러 군대가 모인 연합군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 부분에서는 아군과 마찬가지다.
‘찌를만한 틈을 하나 더 찾은 것 같군.’
영리하게 공격해 적들의 내분을 유도한다면, 생각보다 더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데일은 손짓했다.
‘더 가까이 붙자.’
유령선이 다가가자 적들도 이쪽을 알아차렸다. 낌새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위험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야가브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충실히 명령을 따랐다.
배가 적 진영에 더 가까워지자 좀 더 명확한 현황이 눈에 들어왔다.
데일은 적들의 숫자와 병졸. 진형과 상태를 최대한 머릿속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탑이 번뜩였다.
콰아아!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유령선의 후미 절반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균형을 잃은 유령선이 땅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 이런!”
야가브가 급하게 힘을 써, 배의 균형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적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콰아!
이번엔 돛대가 깔끔히 날아갔다.
만약 조금만 더 아래를 겨냥했다면, 배가 통째로 소멸할만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데일은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차렸다.
‘탑이 공격했다.’
탑이 번쩍인 순간. 광선이 뿜어져 나와 유령선을 타격했다.
말 그대로 빛의 속도에 준하는 공격이었기에,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한 것.
야가브는 데일이 신호하기도 전에 배를 돌려 빠르게 탑에서 멀어졌다.
뒤이어 광선이 두어 번 쏘아졌지만, 다행히 사거리를 벗어난 탓에 배 일부분이 부서지는 선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타격이 너무 컸다.
부서진 배는 이내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야가브가 절규했다.
“으아아아! 내 배가!”
쿵!
마침내 지상에 부딪힌 유령선이 산산이 조각났다.
영체화가 풀린 데일이 배에서 내렸다.
‘운이 좋았군.’
야가브의 조종 실력도 빛을 발했지만, 운도 좋았다.
저 섬광에 얻어맞은 데일이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탑에 공격하는 기능이 있다라…….’
힘을 잔뜩 흡수한 황혼의 탑은 강력한 섬광을 뿜어댔다.
그 사거리가 짧지도 않으니, 아군입장에서는 끔찍한 무기라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었다는 것.
만약 결전에 돌입하고 나서 탑의 포격을 받았다면,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내 배가! 내 배가!”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이동하자. 괜히 추격대가 붙을 수 있어.”
데일은 땅을 치며 통곡하는 야가브가 말린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던 다른 유령선이 이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려 했다.
데일은 외쳤다.
“그냥 가라! 뒤따라가겠다!”
그럼에도 유령선 쪽에서는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야가브. 올라가서 다른 배를 지휘해라.”
“그쪽은? 어떻게 하게?”
“나는 뛰어가는 게 더 빨라.”
“뭐?”
데일은 더 설득하지 않고, 자세를 잡은 뒤 땅을 박찼다.
퉁!
땅이 패이면서 데일의 몸이 순식간에 저 앞으로 사라졌다.
그 속도는 이미 앞서가던 유령선을 따라잡고 있었다.
“……진짜네.”
데일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린 야가브는 공중으로 둥둥 떠올라, 남은 유령선에 올랐다.
그녀가 아끼는 기함을 잃은 건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으리라.
* * *
머지않아 일행은 북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다리로 빠르게 달려간 데일은 한발 앞서 도착할 수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프라우가 툴툴거렸다.
“우리는 유령선에 태우고, 자기 혼자만 뛰어가다니. 나도 뛰어가고 싶었는데…….”
데일은 프라우를 무시하고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반가운 이들이었다.
“아, 데일 경. 그리고…… 세상에. 엘레나?”
“허어. 공주님. 돌아왔구만.”
에스델과 하켄이 놀라움을 얼굴에 드러냈다.
엘레나도 어딘가 쑥스러운 듯. 조금 민망한 듯.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죄송해요!”
엘레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왕족이 보이기에는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에 하켄과 에스델이 굳어버렸다.
“죄, 죄송이라니.”
“마지막에 헤어질 때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렸어요. 두 분도 많이 힘드셨을 텐데, 저만 생각하고…… 용서해주세요.”
하켄과 에스델은 서로를 쳐다보며 볼을 긁적였다.
악마 두르핀과 데일이 사라진 그날.
엘레나는 동료들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는 사라져버렸다.
그때의 기억은 엘레나에게 여전히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고개 숙인 엘레나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엘레나. 그럴 수 있지.”
그 목소리에 엘레나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일라!”
여관 주인 카일라.
프라우를 제외하면 엘레나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으며, 그녀가 언니처럼 따랐던 여인의 등장에 엘레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카일라는 그런 엘레나를 꼭 안아주었고, 엘레나도 카일라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하켄과 에스델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하티는 무심하게 다가와 데일의 허리에 주둥이를 비벼댔다.
데일은 그 탐스러운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다시 동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비록 힘든 싸움을 앞두고 있으나, 지금만큼은 모두 마음속에 따스함을 품을 수 있었다.
동료들은 함께 모여 앉아 화기애애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떨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런 따스함에서 빗겨난 이가 한 명 있었다.
“저, 저기. 왜 아무도 나는 아는 척도 안 해주는지…….”
프라우가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