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35)
추격
* * *
거인의 영역을 지나친 데일과 하켄은 협곡을 따라 이동했다.
깎아지르는 절벽을 옆에 끼고 아슬아슬하게 나 있는 길이었다.
하켄은 슬쩍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장마로 잔뜩 불어난 강물이 거세게 흘렀다. 마치 성난 용 같은 모습이다.
하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거인이라도 저기에 떨어지면 무사하지 못하겠지? 아마 데일 경도…….’
하켄은 선뜻 생각을 확정 짓지 못했다.
옆에서 조금 절뚝이며 걷고 있는 흑기사는 무려 거인의 일격을 받고도 무사했다.
갑옷이 좀 찌그러지고, 관절 이곳저곳이 꺾였지만, 이 정도면 무사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비현실적으로 강한 흑기사는 대자연의 분노도 버텨낼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하켄의 시선을 느낀 데일이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치유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데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나가다가 짐승 몇 마리만 사냥하면 된다.”
하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데일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둘은 그 뒤로 길을 따라 계속 이동하다, 협곡을 가로지르는 밧줄 다리를 발견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다리는 관리가 되지 않아 허름했다. 하지만 못 써먹을 수준은 아니었다.
“딱 봐도 제국이 망하기 전에 만든 다리네요. 그러면 생각보다 튼튼할 거예요.”
둘은 조심히 밧줄 다리를 건넜다.
중간중간 발이 빠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다리가 끊기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협곡을 건넌 다음에는 마침내 산에서 내려갈 수 있었다.
하켄은 등 뒤에 우뚝 솟은 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후. 내 다시는 저곳에 들르나 봐라.”
“마을은 여기서 가깝나?”
“반나절은 더 가야 합니다.”
“그러면 일단 이 근처에서 야영해야겠군.”
벌써 밤이다.
원래라면 머리 위로 떠올랐어야 하는 달도, 지금은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사방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데일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하켄은 평범한 인간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 이동하다가는 세 걸음에 한번은 넘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데일이 하켄을 업고 이동하는 것도 내키지 않고.
‘어차피 산을 넘었으니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겠지.’
둘은 지름길을 통해 마법사를 훌쩍 앞지르게 되었다.
남은 건 이제 마법사가 마을에 오는 걸 기다리는 것뿐.
아직 여유가 있었다.
데일과 하켄은 적당히 큰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주위 나뭇가지가 모두 젖어 불을 피우기도 힘들었다.
데일이 말했다.
“자라. 불침번은 내가 서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하켄은 모포를 젖은 흙 위에 아무렇게나 깐 뒤. 그 위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하켄은 한참을 뒤척였다. 땅에 머리만 대도 곯아떨어지던 평소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데일이 물었다.
“잠이 안 오나?”
하켄이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요. 비가 와서 그런가…….”
“마을 사람들이 걱정되나?”
하켄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되긴요. 악마 하수인도 이긴 데일 경이 있는데, 제까짓 주문 쟁이가 뭘 하겠습니까.”
“그러면?”
“글쎄요……. 마을에 돌아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데일이 물었다.
“전선에서 돌아오고 나서 아직 고향에 안 들렀다고?”
“가끔 사람 통해서 돈이랑 소식은 보냈죠. 근데, 차마 직접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더라고요.”
하켄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 얼굴에 죽은 동료이자 친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떠올랐다.
데일도 한번 마주한 인물.
퀼이라는 용병이다. 하켄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알친구’라는 사람.
고향에서 함께 나고 자란 둘은, 분명 가족만큼이나 더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퀼은 죽었다.
이터 무리의 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하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퀼의 가족들을 보겠어요.”
그 얼굴에서는 죄책감이 엿보였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데일은 그래도 고향에 찾아가 감정을 풀어야 하지 않겠느니 하며 싸구려 조언을 건네지는 않았다.
자기 일이라면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가족에 대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럼 내일 마을에 들르지 않고, 주위에서 야영할 건가?”
고민하던 하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때문에 데일 경한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딱히 상관없다.”
“도망쳐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하켄치고는 그럴듯한 말이었다.
본인도 자기 말이 제법 폼이 난다 생각했는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데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이나 자라.”
“옙.”
머지않아 하켄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일단 결심을 내리니 마음이 편해진 듯하다.
결국. 하켄에게는 등을 떠밀어줄 작은 동기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밤사이 빗줄기는 점점 약해졌다.
지긋지긋한 장마도 이제 끝날 기미가 보였다.
“하아암. 벌써 아침인가요?”
“그래. 일어나라.”
비척비척 일어난 하켄은 다 축축해진 모포를 한차례 쥐어짰다.
그러고는 곱슬머리에 침을 발라 단정하게 치장하기 시작했다.
데일이 핀잔을 주었다.
“어차피 비에 홀딱 젖을 거다.”
“그래도 기분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맘대로 해라.”
“데일 경. 저 몸에서 냄새 안 나죠?”
데일이 도리어 되물었다.
“안 날 거라고 생각했나?”
“엑? 진짜입니까?”
“평소에 좀 씻어.”
“일주일에 한 번은 씻는데…….”
더러운 놈이라고 말하려던 데일은 그만두었다.
고향에 돌아가는 날이니만큼, 오늘만큼은 너그러이 봐줄 생각이었다.
준비를 마친 하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데일을 안내했다.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둘은 거인산에서 뻗어 나온 강줄기의 작은 지류를 따라 걸었다.
졸졸 흐르는 물줄기는 이내 평지에 다다랐고, 그곳에 고여 늪지대의 일부가 되었다.
나무가 빼곡히 자라 있는 밀림. 그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장소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조잡한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에는 행정상의 이름이 따로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늪지 마을이라 불렀다.
늪지 마을은 하켄의 고향이었다.
하켄은 고향 전경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감회가 남달랐다.
“……정말이지. 바뀐 게 하나도 없군요.”
“들어가지.”
“예.”
데일이 성큼성큼 걷자 긴장한 하켄이 그 뒤를 따랐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밭에서 김을 매던 농부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데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흐익!”
“괴, 괴물이다! 아니, 악마인가?”
그 무례한 반응에 하켄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데일 경. 촌놈들이라 예의가 없어요.”
“이해한다.”
하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농부들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저 기억 안 납니까?”
“으이? 누구쇼?”
“하켄입니다. 골렌의 아들 하켄.”
“어어?”
하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노인과 아낙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켄! 이게 얼마 만이냐!”
“어머 어머!”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둘은 하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놈 이거 몰라보겠구나! 갑옷도 번쩍번쩍한 거 입고 다니고. 용병 다 됐어!”
“제가 먹은 짬밥이 얼만데요. 이 정도 장비는 갖춰야죠.”
“으스대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근데. 저쪽은……?”
노인이 데일을 향해 눈짓했다.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켄이 웃으며 말했다.
“데일 경이라고. 제가 신세지고 있는 기사님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아. 그렇구나. 네가 괜찮다면, 뭐. 괜찮은 거겠지.”
노인은 그제야 데일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그는 물었다.
“그나저나 퀼은 어디 갔냐? 아랫도리 알 두 짝처럼 매일 붙어 다니던 놈들이 말이야.”
하켄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말이죠…….”
“아! 일단 퀼 네 가족한테 먼저 말해야지!”
“제가 가서 말할게요.”
“자, 잠깐.”
하켄은 노인과 아낙을 잡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낙이 큰소리로 외치며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켄이 왔어요! 하켄이 왔다고요!”
하켄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데일이 물었다.
“설마 퀼이 죽은 걸 아직 얘기 안 했나?”
“예……. 도저히 말 못 하겠더라고요.”
“네 입으로 도망쳐서 해결되는 건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
“면목이 없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하켄이 데일에게 부탁했다.
“데일 경.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퀼이 죽은 건, 부디 비밀로 해주세요. 나중에 전부 말할 거지만, 그게 오늘은 아닌 것 같아요.”
“마음대로 해라.”
머지않아 마을에서 주민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데일을 보며 흠칫했지만, 하켄을 보자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주민들은 하켄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잘 지냈냐.
돈은 좀 벌었냐.
다친 곳은 없냐.
결혼은 했냐.
하켄은 일일이 대답해주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다 어느 젊은 여자가 주민들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여자의 치마폭에는 자그마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하켄!”
“어? 어어. 마리. 오랜만이야.”
“하켄 삼촌!”
“하하! 이녀석들. 많이 컸구나!”
하켄은 아이들을 안으면서 데일에게 소곤댔다.
“퀴, 퀼의 가족입니다. 그 녀석은 결혼을 일찍 했거든요.”
“으음.”
퀼의 아내, 마리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전선은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지?”
“으응.”
“신께서 너를 도와주시나 보다. 근데……. 그이는 어딨어?”
하켄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마리와 그 자식들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듯했다.
“어어. 퀼 말이지? 하하. 퀼이 지금 어딨었죠?”
방황하던 하켄의 눈동자가 데일에게 향했다.
데일은 생각했다.
‘어디 있긴. 땅속에 묻혀 있겠지.’
하지만 그 생각을 뱉지는 않았다.
하켄은 재빨리 적당한 핑계를 떠올렸다.
“의뢰! 맞다, 의뢰를 하고 있었어.”
“의뢰? 혼자서?”
“우리가 이래 봬도 나름 유명하거든? 의뢰가 너무 쏟아져 들어오니까, 둘이서 같이 다니면 감당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간단한 의뢰를 할 때는 가끔 따로 다니기도 해.”
“으음. 너희들이 유명하다고?”
마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하켄을 쳐다보았다.
그녀 역시 하켄과 퀼의 소꿉친구였고, 둘의 성격을 잘 알았다.
하켄과 퀼이 유명하다는 건 영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켄은 땀을 삐질 흘리며 데일을 쳐다보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눈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데일이 말했다.
“하켄은 그럭저럭 괜찮은 용병이다.”
“그, 그렇군요.”
그제야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켄의 말보다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사의 말이 더 무게 있었다.
마리는 하켄을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혹시 그이한테 딴 여자 생긴 건 아니지?”
“아, 아니야. 퀼 그놈이 가벼워 보여도, 마리 너한테 일편단심이라고.”
“그으래?”
하켄의 진위를 떠보던 마리는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면 상관없지.”
“휴우.”
“자! 잡담은 나중에 하고! 오랜만에 하켄이 돌아왔으니 잔치나 열자고!”
“돼지 한 마리 잡자!”
“술은 내가 가져올게. 마침 괜찮은 맥주가 있어.”
늪지 마을의 주민들은 이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맥주를 담은 오크통이 착착 쌓였다.
아직 한낮이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경사가 있는 날에는 다 같이 그 기쁨을 나눠야 하는 법이다.
주민들은 하켄과 왁자하게 떠들었다.
하켄은 친우의 죽음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행복해 보이기도 하다.
그럴만하다.
갖은 고생 끝에 몇 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니.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어도, 하켄 나름대로 용병으로서 성공도 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데일은 하켄이 바보 같이 헤실거리는 걸 보다, 걸음을 옮겼다.
이 마을에는 조잡한 망루가 있었다. 데일은 그 위를 올라 한쪽을 살폈다.
북동쪽. 아마도 마법사가 찾아올 방향.
데일은 그쪽을 하염없이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민들에게 시달리다 가까스로 빠져나온 하켄이 망루의 아래에 다가왔다.
“데일 경. 마을 사람들이 잔치 준비가 다 끝났다는데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라.”
“예?”
어벙하게 되묻던 하켄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졌다. 그는 방패를 굳게 부여잡았다.
“오는군요.”
“그래.”
저 멀리서 늑대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