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9)
바이만
* * *
아이렉은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보호……. 라기보다는 조금의 도움을 주고 있네.”
“그래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려던 것이었군. 마법사들에게 한번 잡혀가면 멀쩡히 돌아오기는 힘드니 말이오.”
아이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에 있던 부하들도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데일이 물었다.
“그래서. 나는 왜 찾아온 것이오.”
대충 어떤 부탁을 할지는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렉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아이렉이 데일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힘을 좀 보태주지 않겠나? 사례라면 얼마든지 하겠네. 이대로면 내 상회 전체가 날아갈 판이야.”
“후계자를 포기하면 되는 것 아니오? 순수한 호의로 보호하는 것도 아니지 않소.”
잔인한 말이지만 지금으로선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아이렉은 귀족보다는 상인에 더 가까운 유형이다. 의리나 명예보다는 금화 한 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부류.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손을 떼는 게 아이렉에게 더 어울렸다.
아이렉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네. 순수한 호의는 아니었지. 언젠가 바이만 왕국이 다시 일어선다면 공주는 왕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의 투자는 조금도 아깝지 않다 생각했네. 하지만 악마와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왕국의 재건은 요원하네. 불확실한 미래에 내가 일궈온 사업을 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럼?”
포기하면 되지 않는가?
아이렉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우리 가문은 700년 넘게 왕국을 섬겼지. 그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네. 나도 아직 멀었다는 거지.”
데일은 아이렉의 얼굴에서 한가지 감정을 읽어냈다.
미련.
눈앞의 귀족은 망해버린 조국을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영리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도, 떨쳐낼 수 없었다.
망국의 귀족은 죽을 때까지 이 미련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왕국이 재건되어 그 안에 살아가는 삶을 꿈 꾸겠지.
그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은 알았다.
하지만.
“힘들 것 같소.”
데일은 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공터에 주민들이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저들을 보호해주기로 이미 의뢰를 받았소. 나는 계속 이 자리를 지킬 생각이오.”
“…….”
예상한 대답이었던 듯. 아이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네. 역시 안되는군. 미안하네, 이런 부탁을 해서. 괜히 신경만 쓰이게 했군.”
“나는 괜찮소.”
거절당한 아이렉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연이 있는 이들에게는 전부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몇 명이나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저 뒤쪽에서 사내 한 명이 뛰어왔다. 사내는 먼 길을 급하게 달려온 듯, 헉헉 숨을 골랐다.
아이렉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자리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그, 급하게 보고 할 게 있습니다!”
“뭐?”
잠시 숨을 고른 사내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끔 큰소리로 외쳤다.
“공주님이 잡혀갔습니다!”
* * *
용병과 경비대는 빈민가의 골목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짜증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레네의 여름은 덥다.
서풍을 타고 오는 습하고 더운 공기는 도시를 찜통으로 만들어버린다.
일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버리니 용병들은 죽을 맛이었다.
심지어 여기 있는 대부분은 사슬 갑옷이며 천 갑옷 따위를 겹겹이 껴 입어서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갑옷을 벗을 수도 없다.
마탑의 개입으로 빈민가 주민들의 사기는 많이 꺾였지만, 여전히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기습을 맞고 골로 가버릴 수 있었다.
그런 탓에 사람들의 불쾌함은 극에 달했다. 누군가 툭 건들기만 해도 폭발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 카달은 위기감을 느꼈다.
‘위험하군.’
병사들이 폭발하면 그 분노를 어디다 풀까. 분명 빈민가 주민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피해를 최소로하라는 명령도 어기고,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질 수도 있다.
카달은 지금은 일단 물러나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숨을 고르고,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
문제는 태평하게 뒤에 서 있는 마법사들이다.
저들은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만약 경과가 시원찮으면, 빈민가를 전부 불태우기라도 할 작정이다.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지.’
카달은 한숨을 삼켰다. 이곳은 제국의 영역.
그리고 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건 이 땅의 적법한 군주이자 통치자인 황제의 것이다.
불법으로 이 자리를 점거한 빈민가 주민들 역시 황제의 소유물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재산과 신민을 지키는 게 경비대장의 사명.
제멋대로 날뛰는 마법사들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어김없이 마법사 하나가 걸어와 재촉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겁니까.”
카달은 떫은 얼굴로 말했다.
“기다리게. 모두 지쳐있어.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야.”
“대체 그 얘기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요. 계속 이런 식이면 저희는 카달 경비대장의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달은 이를 악물었다. 등에 멘 거대한 도끼가 징징 우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이 건방진 마법사들을 토막 내주고 싶지만, 원하는 대로만 행동할 수 없는 게 삶의 비애다.
“후우. 알겠소.”
결국, 재촉을 못 이긴 카달은 돌입을 명하려 했다. 많은 피가 흐르겠지만, 일단 부딪혀야 조금이라도 진척이 생길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골목에서 걸어 나왔다.
“어?”
“뭐, 뭐야.”
용병과 경비대원들 모두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걸어 나오는 이들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한쪽은 엘프 검사였다.
우드 엘프 특유의 녹색 머리칼과 뾰족한 귀, 중성적인 외모가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검사치고는 좀 호리호리했지만, 얕잡아 볼 수는 없다.
겉보기에는 얇아 보이는 저 근육이 인간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엘프의 옆에서 걷는 건 아직 앳된 소녀였다.
이제 기껏해야 열넷 정도 되었을까? 어깨까지 내려오는 바다색 눈동자와 같은 색깔의 머리. 선명한 이목구비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귀엽다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아직 젖살이 남아있어 앳된 느낌이지만, 아무도 소녀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소녀의 눈빛. 걸음걸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숨길 수 없는 기품이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다른 존재다.’
멍하니 쳐다보는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같은 인간이지만, 더 높은 격의 인간이라고.
몇몇 용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카달과 마법사들도 입을 열지 못 했다.
오직 엘프 검사만이 소녀에게 간절히 말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이대로면 엘레나님이 위험하단 말입니다!”
“더 이상 나 때문에 무고한 피가 흐르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내가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어요.”
“아잇. 그깟 하찮은 목숨이 몇이 죽든 엘레나님께 비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엘프 검사가 설득하려 해도 소녀는 요지부동.
엘레나라 이름 불린 소녀는 기품있게 걸어가 마탑의 마법사 앞에 섰다.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도리어 당황한 건 마법사들 쪽이었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짓만 주고받는 마법사들을 향해, 엘레나가 말했다.
“당신들이 이 주위를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가 나 때문임을 알아요. 비겁하게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고, 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나에게 직접 말하세요.”
“…….”
슬쩍 시선을 교환한 마법사 중 하나가 물었다.
“바이만 왕국의 마지막 후계자. 엘레나 바이만이 맞나?”
“제 이름이 맞아요. 그러니 이제부터 얘기를…….”
마법사는 주저 없이 말했다.
“엘레나 바이만. 너를 불순분자들과 내통한 혐의 및 반란 모의 혐의로 체포한다.”
“뭐? 자, 잠깐. 일단 내 말을 들어 보고…….”
“뭐하고 있는가! 어서 잡아들여!”
마법사의 명령에 병사와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 * *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렉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 순진한 공주님이 결국 사고를 치셨군.”
“무슨 일이오.”
“공주님도 마탑에서 본인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네. 그래서인지 자기가 직접 대화를 나눠보겠다더군. 하! 대화라니!”
무고한 피가 흐르는 걸 원치 않는 마음은 갸륵하나,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그간은 내가 막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빠져나간 모양이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긴. 온갖 죄목을 뒤집어쓰고 그대로 체포당했지. 무려 반란 모의 혐의까지 걸렸네! 망국의 공주가 다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준비했다. 그럴듯하지 않나?”
마탑의 계획은 안 봐도 뻔하다.
온갖 혐의를 뒤집어씌워 가둬둔 뒤, 마법 지식을 털어놓으면 봐주겠노라 당근을 흔들 것이다.
반란 모의는 중죄.
당장 목이 잘릴 판에 누군들 넘어가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공주가 사로잡혔다면, 마탑은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더 이곳에서 꾸물거릴 이유는 없으니, 철수했을 거다.
마탑이 빠지면 전력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용병과 경비대만으로는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우니, 수색도 사실상 마무리된 것과 다름없다.
데일은 또 한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홀로 적에 맞서 주민들을 지켜냈으니 말이다.
이제 주민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데일은 다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데일은 얼른 돌아가려는 아이렉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공주.’
바이만 왕국의 최후.
게임에서 아주 주요한 분기점이었던 그 순간에, 그는 게임의 주인공으로서 함께 있었다.
아이렉이 말하는 그 공주와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공주와 생존자들을 왕국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그때 탈출시켰던 인원이 여태껏 살아있다. 그리고 이번 일에 깊게 관여되어 있단다.
이 일을 데일이 마주한 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의 인도일까.
마음이 변했다.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이 최종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데일은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직접 두 눈으로 담고 싶어졌다.
“나도 가겠소.”
“도와주는 건가?!”
데일은 고개를 저었다.
“기대는 하지 마시오.”
조금의 가능성만 열어둔, 거절이나 다름없는 말. 하지만 지금의 아이렉에게는 그 작은 가능성으로도 충분했다.
“그럼 어서 가게나!”
일행은 우선 공주가 있는 장소로 빠르게 이동했다.
놀랍게도. 공주는 여전히 잡혀가지 않은 상태였다.
용병과 경비병이 큰 원을 그리며 포위하고, 그 가운데에 공주가 서 있었다.
그리고 공주의 옆에는 한 손 검과 손도끼를 든 엘프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세상에.”
노신사는 감탄을 터트렸다.
부상을 입고 끙끙대는 용병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다.
저 엘프 혼자서 이만한 숫자를 상대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데일은 놀라지 않았다.
종족 전체가 강인한 전사인 엘프에게, 어중이떠중이들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
데일이 엘프를 경계하는 첫 번째 이유였다.
엘프의 저항이 거세자, 용병이 소리쳤다.
“야 이 귀쟁이 새끼야! 빨리 항복……. 억!”
퍽!
어느새 날아온 손도끼가 용병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감히 귀쟁이 같은 멸칭으로 부른 대가였다.
엘프가 고함을 질렀다.
“이분은 바이만의 왕족이시다! 감히 왕족을 밧줄로 묶어 끌고 가려 하다니! 세상 어느 곳에도 왕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법은 없다!”
엘프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용병과 경비대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이미 만신창이였지만, 저 검사에게는 다가가기 힘든 기백이 있었다.
용병들은 도움을 청하듯,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법사들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공격 마법이라도 날렸다가는, 옆에 있는 공주까지 죽을 수 있다.
‘공주는 그 쓸모가 다하기 전까지는 죽어서는 안 된다.’
검사 혼자서 수십의 적을 밀어내는 광경.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아이렉이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 하나는 뛰어난 친구일세.”
그렇게 말하고는 데일을 은근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떤가. 저기에 데일 경의 힘이 합쳐지면 제법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표정하던 데일의 얼굴은 더욱 무기질적으로 변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엘프는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