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226
◈ 226. [STAGE 9] 시위를 떠난 화살 (2)
– 이렇게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을 거냐?
자신의 앞에 와서 선 애쉬가 그렇게 내뱉었다.
데미안은 알아챘다.
이것은, 자신의 기억이다.
– 그래서? 포기하고 손 놓고 있다가 곱게 뒈지시겠다?
하지만…… 언제?
– 나는 싸울 테다! 마지막 순간까지 궁리하고 발버둥 칠 테다!
언제 이런 대화를 나누었더라?
– 그렇게 손 놓고 죽고 싶다면! 당장 이 칼에 스스로의 목을 찔러라.
기억이,
–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는 겁쟁이라면, 데미안.
기억이, 무언가에 가로막혀서…….
덥석!
그때 반이 달려와서 데미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듣지 마, 데미안!”
반이 주름진 떨리는 손으로 데미안의 양쪽 귀를 덮었다.
“당신이 지금 피곤하고 힘들어서 그래. 그래서 잠깐, 헛것이 들리는 거야. 괜찮아. 내가 있잖아.”
“…….”
“당신과 함께 늙어 죽어 줄게.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당신과 함께할게. 그러니까-”
데미안은 그런 반을 마주보다가, 시선을 옮겨 애쉬를 보았다.
– 나의…….
애쉬는 빙그레 웃으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반의 두 손에 막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입모양은 선명하게 읽혔다.
– ……방아쇠가 되면 된다.
방아쇠?
데미안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아쇠라면, 총기를 격발하는 그 장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자신은 평생 살면서 총 같은 건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어?”
데미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지고 비쩍 마른 늙은 손에, 기다란 장총 형태의 흐릿한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다뤄 온 것처럼, 손에 딱 들어맞는 익숙한 감촉.
데미안은 다시 앞을 보았다.
이미 애쉬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들을 따라온 손주들도 신기루처럼 사라진 뒤였다.
휘청!
데미안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침대를 벗어났다.
병마에 시달린 늙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깊게 휜 허리에 격통이 일었다. 휠체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몸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손에 들린 장총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고, 기어코 침대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여보!”
반은 비명을 지르며 그런 데미안을 잡아 말리려 했지만, 데미안은 반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나온 순간,
와르르…….
파도에 모래가 휩쓸리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노년을 보냈던 저택이 폭풍에 휩쓸리듯 천장부터 분해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데미안은 부서지는 저택의 입구에 서서, 자신이 평생 살았던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세계가 조각나고 있었다.
퍼즐조각처럼 무너져서, 땅으로 꺼지고 하늘로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제야 데미안은 알아챘다.
그렇구나.
이곳이야말로, 꿈이었구나.
“안 돼.”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데미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가면 안 돼, 데미안.”
반이 서 있었다.
주름지고 검버섯이 폈지만, 여전히 데미안이 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반이 울고 있었다.
“모험 같은 거 가지 말자고 한 건 너였잖아, 데미안!”
“…….”
“돌아가지 마. 그곳에는 슬픔과 괴로움뿐이라는 말이야.”
“…….”
“너를 기다리는 건 지옥이야! 데미안, 제발!”
그러자, 데미안은 주름진 입가로 흐릿하게 웃었다.
“미안해, 반. 이렇게 너와 함께 평화롭게 늙어 죽는 게 내 꿈이었지만…… 그럴 수 없어.”
“왜?! 네 꿈이었잖아. 여기라면 네 꿈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그런데 왜!”
“네가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해냈거든.”
반이 남겼던 유언.
– 그때의 약속, 잊지 마.
고아원을 탈출했던 그날의 새벽.
첫키스와 함께 나누었던 약속.
“바깥세상 전부를 모험하자고. 우리의 눈에, 이 넓은 세상 전부를 담아 보자고.”
기억한다.
기억하고말고.
“이곳의 삶은 행복하지만, 진짜 너는 이렇게 살고 싶어 하지 않았어.”
“…….”
“그러니까, 가야 해.”
휘청거리며, 장총으로 바닥을 짚고.
“나는 너와 약속했으니까.”
늙은 데미안은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세계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우르르르……!
도시의 중심부를 따라 걷는 데미안의 주위로 부서진 세계의 파편들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반과 함께 손을 잡고 드나들던 극장도.
끝내 모든 메뉴를 먹어 보지 못했던 단골 식당도, 평생 근무했던 상단 건물도.
주말마다 나들이를 오던 공원도, 가을 축제날 무릎 꿇고 프로포즈했던 광장도, 신혼을 시작했던 반지하 방도…….
모조리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늙었던 데미안은 점점 젊어졌다.
반지하 집의 문으로 통하던 높고 빛바랜 계단이.
부부가 함께 사용했던 컵이, 월요일마다 반이 꽃을 꽂아두던 꽃병이, 아들의 키가 커질 때마다 벽에 그렸던 선들이, 손을 잡고 누워 사랑을 속삭였던 침대가…….
추억들이,
사라진다.
남김없이 증발한다.
이제 어려진 데미안은 울지 않았다.
행복했던 꿈을 망설임 없이 짓이기며, 용케도 울음을 참고서. 쉬지 않고 걸었다.
***
데미안이 정신을 차리자, 고아원을 탈출한 그날의 새벽이었다.
어려진 데미안과 반은 다시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
“반.”
데미안은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를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는 이 뒤로 용병 일을 하게 돼. 아무 밑천도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세계를 떠돌며 모험하려던 우리 목적에도 맞는 일이었거든.”
“…….”
“너는 검사로서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금세 인정받아. 나는 부족하지만 치유사제로서 그런 너와 파트너를 이루고.”
“…….”
“온갖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해. 어른들은 우리가 어리다고 깔보지, 돈도 떼먹히고, 몇 번이나 죽을 뻔도 하고, 다치고, 아프고, 상처받고 서러워서 울고…….”
반은 눈물 젖은 얼굴로 데미안을 가만히 보았다. 데미안은 쓰게 웃었다.
“그렇게 3년 정도 죽을 고생하고 이제 조금 기반이 잡힐 즈음,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아픈 기억을 떠올려내는 데미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크로스로드 남쪽 전진기지에서, 검은 거미 떼에 둘러싸여 전투를 치르다가…… 너는 검은 거미의 발톱에 찔려서 죽어.”
피를 토할 것 같은 목소리로, 데미안은 간신히 내뱉었다.
“나를 구하고서, 대신.”
“……그렇게 괴로운 현실로, 굳이 돌아가려는 거야?”
반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이 꿈을 벗어나면 너를 기다리는 건 끔찍한 지옥도야! 괴수와 죽음이 우글거리는 생지옥! 정말로 거기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너와 함께 용병으로 살았던 3년은 숨 막히게 힘들었어.”
용병으로서의 3년뿐인가.
어린 시절의 고아원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말대로, 이 세상은 언제나 지옥 같았지.”
단 한 번도.
이 세상은 단 한 번도 지옥이 아닌 때가 없었다.
“……하지만 반, 너는 웃었어.”
데미안은 자신의 파트너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회상했다.
언제나,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심지어 숨을 거둘 때조차도.
반은 웃었다.
“허세를 담아서. 크큭, 거리면서. 괴상하게 웃곤 했지. 아무리 끔찍한 날에도 너는 그렇게 웃었어.”
끔찍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대신 허세로 웃어넘기면서.
반은 도망치지 않고 이 지옥에 맞서 살아갔다.
“그래서 나도 웃을 수 있었어. 네가 허세를 부렸기에, 나도 숨을 쉴 수 있었어.”
데미안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울상을 지었지만,
“그런 네가 좋았어, 반.”
하지만 울지 않고, 힘겹게 미소했다.
“……그런 네가 나를 살리고 죽었어. 내 목숨은 네가 준 거야.”
반은 멍하니 그런 데미안을 마주보았다.
“나를 위해 죽은 너를, 너의 그 희생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어. 내 목숨에는 너와의 약속이 걸려 있으니까.”
데미안은 떨리는 손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도망치는 동안 행복했지만…… 너와의 약속을 어기는 게, 그 행복보다 괴로워.”
“…….”
“나는 이 지옥 같은 세상의 끝까지 모험을 떠날 거야. 아무리 끔찍하고 괴로워도, 이제 도망치지 않겠어.”
데미안은 손을 뻗어 반의 양 어깨를 붙잡은 뒤,
천천히 품에 끌어안았다.
“보고 올게, 반. 세계의 끝을.”
“…….”
“너와 함께 시작했던 모험을 나 혼자서라도 이어 갈게.”
반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그 깃털 같은 소녀를 소중하게 더 꽉 안았다.
“좋아했어, 정말로.”
이제 다시는 안아 볼 수 없을, 그 소중한 감촉을 기억하려 노력하며.
“안녕.”
착각일까.
품에 안겨 울던 반의 입가에도, 한 줄기 새하얀 미소가 스친 것 같았다.
《그래…….》
《네가 이겼어, 데미안.》
특유의 허세 섞인 웃음소리가 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행운이 함께하길.》
《……나이트메어 슬레이어.》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하얀 마총이 한 자루 남아 있었다.
***
데미안은 퍼뜩 눈을 떴다.
크로스로드의 성벽 위였다. 데미안은 자신이 품에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마총 [블랙 퀸]이었다.
하지만 생김새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새카만 오오라는 더는 보이지 않고, 총신은 눈부신 하얀색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기다란 장총을 부여잡고, 데미안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뭔가, 50년은 넘게 잔 것 같은데.”
길고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든다.
옆을 돌아보자 땀을 뻘뻘 흘리며 아티팩트 발사를 지시하는 릴리가 보였다. 그녀를 보조하는 연금술사들과 쿠레하도.
펑! 퍼버버벙-!
사방에서 대포가 불을 뿜었다. 병사들이 악을 지르며 대포를 쏘고 있었다.
상반신을 일으킨 데미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요?”
릴리가 힐긋 돌아보더니 날카롭게 대답했다.
“잘 잤니, 데미안?! 네가 그대로 기절하고 한 시간이나 흘렀어!”
한 시간.
고작 한 시간 잤을 뿐인데, 온몸이 수십 년은 동면을 취했던 것처럼 무겁다. 데미안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무거웠으나 마음은 가벼웠다.
완전히 일어나서 성벽 너머를 보자, 요르문간드는 코앞이었다.
성벽에서 고작 수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격해 왔다.
쿠구구구구-!
뱀의 거체가 성벽 바로 앞까지 몸을 들이밀었고, 사방으로 뿌연 먼지가 휘날렸다.
펑! 퍼버버버벙!
성벽 위에서 최종저지선을 형성한 병사들이 쉴 새 없이 포탄을 쏟아 냈지만, 뱀의 몸에는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애쉬와 파티원들은 요르문간드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 작업 중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지 낭패한 안색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어려 있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도, 뱀의 몸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영웅들도.
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데미안이 릴리에게 말했다.
“제가 나갈게요. 성문을 열어 주세요.”
“뭐?”
느닷없는 헛소리에 놀란 릴리가 기막혀하며 되물었다.
“지금 상황 안 보여?!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성문을 열라는…….”
“저 뱀, 제가 막을게요.”
빙그르르-
철컥!
블랙 퀸을 고쳐 쥔 데미안이 가느다랗게 웃었다.
“믿어 주세요, 릴리.”
소년의 두 눈 안에서 별이 빛나는 것 같았다.
놀란 릴리는 그런 데미안을 마주보다가,
“……젠장, 그래! 이판사판이야!”
성벽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성문을 열어요!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