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229
◈ 229. [Side Story] 시위를 떠난 화살 (5)
방어전이 끝난 다음날.
크로스로드는 완전히 평소의 평화를 되찾았다.
피난을 보냈던 시민들도 모두 도시로 돌아오고, 도시는 언제 괴물의 침공을 피해 휑해졌었냐는 듯 북적거렸다.
시민들은 활기차게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갔지만.
사흘간 요르문간드의 등 위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영웅들은 모조리 뻗어 버렸다.
영주 저택에서 푸짐한 저녁 식사를 하고,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침대에 처박혀 곯아떨어졌다.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도 모두 기절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터벅. 터벅.
요르문간드의 등에 오르지 않았던 데미안만이 일찍부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양팔에 붕대를 둘둘 감고, 몸 위에는 커다란 카디건을 두른 채.
저택을 빠져나온 데미안은 총총 걸음을 옮겨, 도시의 서문 밖으로 나섰다.
도시의 서쪽 바깥에는 무덤터가 있었다.
무수히 늘어선 석비들을 지나, 데미안이 멈춘 곳은.
“…….”
높게 솟은 공동묘비였다.
전진기지에서 벌어졌던 검은 거미 군단과의 전투 때, 시체를 온존하지 못해 이곳에 묻지 못한 병사들을 위해 세워진 비석이었다.
반은 참혹하게 죽었고, 데미안은 전진기지에서 그녀를 화장(火葬)했다.
서로 죽으면 무덤을 남기지 않고 화장해 주기로 생전의 반과 약속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 무덤터에는 반의 무덤이 따로 없었다.
공동묘비의 앞에는 푸른 성화(聖火)가 하나 타오르고 있었다. 데미안은 가만히 그 앞에 서서 불길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죽고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살짝 쉰 목소리로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실감이 안 나, 반.”
데미안의 붕대에 감긴 손이 천천히 묘비를 쓸었다.
“마치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눈을 감으면, 그녀의 웃는 모습이 손에 잡힐 것만 같다.
데미안은 잠시 반과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의 유년부터 현재까지를 함께 해 주었던 그 소녀와의 날들을.
그리고, 어쩌면 이후의 평생도 함께 해 줬을지도 모르는, 그녀와 그리지 못했던 미래도.
“저격수가 된 뒤로, 알게 된 게 있어.”
데미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삶이란…… 시위를 떠난 화살, 총구를 떠난 탄환과 같다는 걸.”
소년은 붕대에 감긴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 날아가고 있고, 발사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아무리 되돌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아무리 과거를 후회한들, 아무리 추억을 곱씹은들.
발사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삶은 이미 허공으로 내쳐져 있다.
“그렇다면, 정해야겠지.”
데미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내가 어디로 날아갈지를.”
데미안은 다시 묘비를 올려다보았다.
“반. 나는 너를 동경했어. 너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래, 나는 네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그녀의 궤적을 쫓았다.
그녀의 허세를 따라했다. 강한 스스로를 연기했다.
그렇게 하면, 지금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지나가리라 기대하고서.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를 따라서 허세를 부리고서야 깨달았다.
반이 강인했던 것은, 그녀가 허세를 부려서가 아니라……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삶과 맞섰기 때문이었다.
“고아원 원장님이 우리에게 자기 아들 윌러가 되라고 강요했던 거, 기억해?”
데미안의 입가에 걸린 흐릿한 미소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반 너는 단 한 번도 윌러가 되려 하지 않았지. 너는 언제나 너 자신으로 살아가려 했어.”
삶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그런 너를 동경한다면서, 나는 나를 버리고 네가 되려 했다니. 우습지?”
타인이 나를 쏘아 낸 그대로, 타인의 과녁을 향해 내던져질지,
아니면, 스스로의 목적지를 정하고 미래를 향해 제 한 몸을 내던질지.
화살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데미안은 선택했다.
“더 이상 네 뒤를 쫓지 않을게.”
소년의 얼굴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윌러도 아니고, 반도 아닌, 데미안이니까.”
타인이 바라는 삶이 아니라,
동경하던 누군가를 따라서도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신념으로.
“나는 나로 있을게.”
살아가기로.
데미안은 선택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약속, 지킬 테니까.”
반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세계의 끝까지 모험을 떠나기로, 데미안은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반. 너도…… 너로 있어 줘.”
데미안은 천천히 묘비에서 손을 떼고, 뒤로 몸을 물렸다.
“내 안에서 아름답게 있어 줘.”
무덤터는 고요하다.
성화는 조용히 불타오르고, 사자(死者)들은 영면에 잠긴 채 침묵한다.
하지만 그 순간, 데미안은 소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인 듯한 착각을 느꼈다.
‘다녀와.’
환청이리라.
환각이겠지.
그녀와 일생을 함께하는 백일몽을 꿨듯이.
데미안은 묘비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붕대에 감긴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훔쳐 냈다.
붉어진 눈가로 환하게 미소한 뒤, 소년은 도시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정한 삶의 과녁을 향해서.
흔들리지 않고, 곧게.
***
“우어어어어.”
나는 좀비 같은 괴성을 흘렸다.
“으어어어으.”
“끼에에에엑.”
“구아아아악.”
식탁에 둘러앉은 영웅들 모두 비슷한 소리를 흘리고 있다.
방어전이 끝난 다음날. 정오가 지난 오후.
에이더가 점심을 꼭 먹어야 한다며 억지로 우리를 깨워서 식당에 몰아넣었다.
아직 사흘 철야 중노동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우리는 죄다 좀비화되서 이러고 있는 거고.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 정도 잠만 자도 될 것 같은데, 망할 보좌관 녀석은 ‘그래서야 건강을 해칩니다아!’ 같은 소리나 하면서 기어이 전원을 끌고 식당에 앉히더니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이게 더 건강을 해친다고! 잠이나 재워 줘!
“구에에에에.”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아니 애초에 넘어가긴 하는지? 질질 흘리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튼 모르겠지만 어떻게 식사가 끝났다.
영웅들은 다시 엉금엉금 손님방에 기어들어가 기절했고, 나는 방으로 돌아갈 힘도 없어서 식탁 상석에 앉아 차가운 커피를 겨우겨우 삼켰다.
안 그래도 요르문간드 격퇴전 치를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엄청 땡겼었는데, 이거 마시니까 좀 살 것 같군.
“애쉬.”
그때 누가 내 옆에 와서 서며 이름을 불렀다.
나는 헤롱헤롱한 눈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언놈이야? 누가 감히 영주님 이름을 막 불러?
눈처럼 하얀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햇볕을 받지 못해 창백한 피부는 머리칼에 뒤지지 않게 하얗다.
호수처럼 크고 맑은 청록색 눈과, 시원하게 뻗은 콧날. 꾹 다물린 색이 옅은 입술…….
“…….”
살면서 처음 보는 엄청난 미인이다. 문자 그대로 인형 같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의 보유자다.
그래, 엄청난 미인이긴 한데.
“……누구슈?”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당황했다.
피곤해서 뭘 잘못 봤나 싶어 두 눈을 비벼 봐도 틀림없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아니 뭐야! 넌 누구야! 왜 우리 집에 태연하게 들어와서 남의 이름을 막 불러!”
기겁해서 커피잔을 엎지르다시피 하며 비명을 지르자, 여인이 기가 막힌 듯 눈썹을 꼬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나다, 무명이다.”
“아.”
그제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호수왕국의 상인 NPC, 무명이었다.
……아니 그런데 너무 다른 사람이 됐잖아! 누더기 로브 벗고 손님복 입고, 꼬질꼬질한 머리 좀 빨았다고(?) 인상이 이렇게 변해?
“나더러 하루 묵고 가라고 억지를 부린 건 너였지 않나…….”
무명이 투덜거렸다.
그래, 그랬지. 원래 무명은 어제 바로 귀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억지로 붙잡아서 우리 집에 하루 묵게 했다. 같이 고생했는데 밥이라도 먹이려고.
그런데 들이고 나서 생각하니까, 이 자식 요르문간드 입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온 상태였다!
이대로는 우리 집 못 들어온다고, 일단 좀 씻으라고 저택의 욕탕에 집어넣었는데.
거기서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무명의 목욕에 동원된 하녀들은 ‘수백 년 묵은 것 같은 땟물이 나온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게 무명의 빨래(?)는 수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저녁 만찬에도 끼지 못했다.
만찬 직후 나도 다른 이들도 기절하듯 잠들었고.
그리하여 목욕이 끝난 무명과 지금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아니, 씻으니까 사람이 달라 보이네! 진작 좀 씻고 다니지 그랬어!”
신수가 훤한 무명을 살피며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달리 말하면 그동안 얼마나 더러웠던 거야! 호수왕국 사람들은 다 이렇게 위생관념이 개판인 거야?! 내심 조금 실망스러운데요?!
“내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지옥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 어찌 호사를 누리겠나.”
무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호사고 나발이고 위생은 당연히 지켜야 할 일이거든요, 이 판타지 월드 주민 자식아! 그냥 씻고 다니라고!
“아무튼, 슬슬 돌아갈까 하는데.”
깨끗-무명은 긴 목을 쭉 뻗고 주위를 휘휘 살폈다.
“내 짐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옷가지도, 검도, 보이질 않아서.”
“네 짐……?”
순간 불안해졌다. 다 너무 더러워서 하녀들이 버려 버린 거 아닐까? 가능성 충분한데?
그때였다.
“손님의 짐은 모두 여기에 보관해 두었습니다아.”
에이더가 깨끗한 가방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입고 오셨던 옷과 로브 모두 세탁해 두었습니다아. 그리고 검은 여기, 새 검집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 이거 고맙군.”
깨끗-무명은 고마워하며 가방을 받고 검집을 등에 찼다.
그때 무명의 바닥에 질질 끌리는 긴 백발을 살피던 에이더가 조심스레 물었다.
“손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머리를 묶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걸으실 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조금만 묶으면 훨씬 나아지실 듯하여.”
“아. 부탁하지. 안 그래도 가끔 검을 휘두르다가 발에 밟히면 균형이 무너질 때가 있었거든.”
무명의 뒤로 걸어간 에이더는 품에서 기다란 붉은 천을 하나 꺼내더니, 무명의 긴 백발을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땋은 뒤 묶어 주었다.
어떻게 묶은 건지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에이더의 솜씨는 꽤 좋아서 무명의 머리는 더 이상 바닥에 끌리지 않게 되었다.
원체 길고 치렁치렁해서 아직도 망토처럼 그녀의 등 뒤를 덮고 있었지만.
“고맙군. 이거 꽤 편해졌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럼.”
에이더는 고개를 조아린 뒤 물러나려고 했다.
그런 에이더에게 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네?”
무명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
그렇게, 물었다.
에이더는 뱅글이 안경 속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이윽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손님. 다른 분과 착각하신 듯합니다.”
“…….”
멍하니 서 있던 무명도 이윽고 쓰게 미소했다.
“하긴.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바깥세상으로 외출한 것이 수백 년 만이라, 나도 모르게 주책을 부렸군.”
무명은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이다가, 에이더에게 싱긋 미소했다.
“머리, 묶어 줘서 고맙다.”
에이더는 그런 무명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저야말로 기쁨이었습니다.”
***
번쩍-!
무명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호수왕국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또 조만간 볼 것 같아서 굳이 거창한 인사는 하지 않았다. 서로 손만 흔든 정도.
무명이 사라지고 마법 입자가 잦아들자마자 내가 물었다.
“둘이 무슨 관계야, 에이더?”
에이더는 즉답했다.
“노 코멘트.”
“이 새끼가…….”
스포일링 좀 해 달라고, 제발!
“그것 말고도 제게 물을 게 많지 않으십니까아?”
에이더가 얄밉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미루고 미뤄왔던 디렉터와의 대담, 이참에 하시죠.”
“…….”
“저는 언제나 플레이어 여러분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답니다아!”
저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왜 망겜 운영진들은 꼭 다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