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361
◈ 361. [STAGE 15] 개전(開戰)
이후로도 릴리와 함께 전진기지를 순회하며, 이곳을 보수 중인 여러 조합장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방어전에 쓰일 여러 설비를 함께 살피다가, 조합장들은 마지막으로 전진기지 지하의 한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번에 이곳 전진기지의 함락을 전제로 작전을 진행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됐어.”
“전하께서 직접 지휘를 자주 하시는데, 혹시 만에 하나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듯하여…….”
조합장들이 지하의 벽을 조작하더니, 숨겨진 석문을 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호오…….”
“공간적으로 튼튼하게 설치한 것은 아니고, 위장마법을 걸어 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안으로 몸을 피하시면, 며칠은 들키지 않고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안을 살폈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구겨 넣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안에는 물과 건량 따위도 조금 비치되어 있다.
나는 시험 삼아 그 공간에 몸을 넣어 보았다. 가까스로 운신할 수 있을 만큼 좁다. 이건 뭐 거의 관(棺)인데.
“좀 좁군.”
“유사시를 대비한, 전하만을 위한 1인용 시설입니다.”
“더 크게 지을 수는 없겠나? 한 열 명 정도 들어갈 수 있게…….”
“그 정도는 설비도 자원도 공간도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안전하지 않게 될 겁니다.”
하긴 공간이 넓으면 적들에게 들킬 가능성도 올라가겠지.
“어디까지나 유사시를 위한 비상용 시설입니다.”
“그래. 애초에 이런 곳에 숨을 일이 없도록 해야겠지.”
아무튼 이런 세심한 배려는 고맙다. 나는 조합장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남쪽을 향해 턱짓했다.
“마지막으로, 저 빌어먹을 호수를 구경하러 가지.”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호숫가 나루터]로 이동.
침공이 시작되면 괴수들이 솟아오를 지옥의 입구. 검은 호수에 우리는 도착했다.
쿵! 쿵! 쿵!
탕탕탕탕…….
요란한 망치질 소리가 주위에서 울린다.
이 호숫가에는 전진기지에 배치된 것보다 더 많은 인부들이 모여서, 땀을 뻘뻘 쏟으며 무언가를 설치하는 공사 중이었다.
우리가 그간 열심히 준비한 ‘함정’이었다.
거대한 크기의 구조물을 내려다보던 릴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이게…… 먹힐까요?”
“걸어 볼 가치는 충분하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착착 건설되는 구조물을 찬찬히 살폈다.
이게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이번 방어전…… 아주 손쉽게 이길 수도 있다. 완전 날로 먹을 수도 있어.
“자, 다들! 괴수들의 침공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호숫가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돌아보며 나는 소리 높여 독려했다.
“여러분이 세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며칠만 더 힘냅시다!”
***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전진기지로 괴수들이 쳐들어오기까지 하루 전. 밤.
“…….”
나는 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작전계획서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그동안 휘하 영웅과 병사들에게 여러 작전들을 숙달시켜 놓긴 했지만, 이번 전투는 유례없이 커다란 규모.
과연 모든 것이 이 작전들의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
그때였다.
똑. 똑똑. 똑.
집무실 문에 노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한 번. 저 패턴으로 노크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나는 대답했다.
“들어와.”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루카스였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 녀석, 저번 특무대 사건 이후로 계속 노크를 저 방식으로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애쉬와 함께 정한 비밀 암호라는 모양인데.
저번 사건 때 내가 우연히 저 패턴을 사용했더니, 그 뒤로 내가 예전의 기억을 찾아간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아니, 그냥 우연히 떠올라서 사용한 패턴일 뿐이라니까. 내가 애쉬의 어릴 적 기억 같은 걸 어떻게 알겠냐고…….
아무튼 이번에도 저 노크와 함께 들어온 루카스는 빙긋 웃어 보였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짓했다.
“어, 루카스. 내일 아침부터 바로 전투인데 안 자고 뭐 해?”
대답은 루카스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선배님이야말로,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루카스의 뒤에서 에반젤린의 작은 얼굴이 쏙 나왔다. 뒤이어 데미안과 쥬니어의 고개도 루카스의 등 뒤에서 쏙쏙 나왔다.
“좋은 밤이에요, 황자님!”
“하하, 너무 혼내지 마세요, 전하…….”
메인 파티원들이었다. 이 녀석들, 손에 음료수며 간식 같은 걸 주렁주렁 들고 왔다.
“저희끼리 응접실에서 내일 작전 대비해서 회의를 가졌는데, 벌써 이런 시간이라.”
루카스가 설명했다.
“야식이라도 먹으려는 참이었는데, 주군의 집무실 불이 켜져 있더군요. 해서 함께 드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바쁘…….”
거절하려는데 에반젤린은 이미 내 집무실 소파에 몸을 폴짝 던지고 있었다.
“아이참! 딱 봐도 몇 시간은 더 머리 싸매고 계실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10분만 우리랑 놀아요!”
“욘석이……!”
“시험 코앞인데 이미 다 외운 필기 한 번 더 본다고 성적이 막 올라가나요? 한숨 돌리면서 쉬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고요?”
끄응,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닌데…….
“저희도 바짝 당긴 활시위처럼 긴장해 있어서, 일부러 좀 긴장 풀려고 이러는 거예요. 선배님도 참가하세욧!”
“어? 너희도 긴장했어?”
“그럼 긴장 안 되겠어요? 괴수들은 엄청난 숫자지, 갑자기 파티 리더가 됐지, 그리고…….”
에반젤린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쫑알거렸다.
“선배님과의 메인 파티가 해체된 것도 처음이라, 좀 불안하기도 하고…….”
“…….”
그러고 보니, 아예 공식적으로 메인 파티가 해체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멤버로 파티가 확정된 뒤로, 내가 황도에 올라가든, 각자 따로 행동하든, 여러 일이 있어도 하나의 파티라는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다섯 명 모두 뿔뿔이 흩어놓은 것도 처음이고. 각자 파티 리더가 된 것도 처음이니. 당혹스러울 법도 하겠지.
게다가 5만이나 되는 괴수들이 몰려오는 상황…… 이 녀석들도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읽던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너희 모두 잘할 거야.”
다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니까.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영웅들이니까.
“알았다, 알았어. 딱 10분만 쉬자.”
“어예~”
에반젤린이 이상한 환호성을 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메인 파티원들은 집무실 소파에 옹기종기 차례로 앉더니, 조잘조잘 떠들며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건넨 내 몫의 뜨거운 커피를 삼키며,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이번 전투도, 또 앞으로의 전투도, 잘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
영주 저택 별관. 그림자부대의 숙소.
문 앞의 벤치에 릴리와 갓핸드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말없이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갓핸드.”
그 뒤로 어색한 요 며칠이었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서.
릴리는 말하려 했다.
“우리…….”
“릴리 님.”
하지만 갓핸드가 선수를 쳤다.
“우리, 아이 낳지 말아요.”
“네?”
당황한 릴리가 갓핸드 쪽을 보았다. 갓핸드는 진지한 얼굴로 릴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아이가 불행할까 봐 결혼하기 싫다면, 우리 아이를 낳지 말아요.”
“아니, 그게…….”
이쪽은 막상 아이를 낳아도 괜찮다고 결심한 참인데…….
어버버거리는 릴리에게 갓핸드가 말을 계속했다.
“엘프식 결혼도 포기할게요.”
“어? 엘프식 결혼? 그게 뭐예요?”
“나무 위에 신방을 차리는 거예요. 신혼 첫 일주일을 나무 위에서 살아야 해요. 이래야 세계수의 정기를 받을 수 있거든요.”
“아니 무슨 다람쥐냐!”
“아, 식사도 나무에서 나는 것만 먹어야 해요. 과일, 견과, 나뭇잎 새순, 뭐 이런 거…….”
이거 완전 또라이 종족 아냐?!
기겁하는 릴리에게 갓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포기할게요.”
“응……?”
“당신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다른 건 상관없어요. 전부 필요 없어요.”
갓핸드가 손을 뻗어 릴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해 줘요.”
“…….”
쓰게 웃은 릴리가 마주 갓핸드의 손을 잡았다.
“같이 고민해 봐요.”
“네?”
“앞으로도 우리한테 남은 날들이 많잖아요? 나도 당신한테 더 맞출 테니까. 아이든, 엘프식 결혼이든……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테니까. 같이 더 고민해 봐요.”
직후 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무 위에 신방 차리는 건 너무했다. 그건 안 돼.”
“막상 해 보면 엄청 재밌대요. 안 그래도 저기, 이 도시 남서쪽에 제가 봐 둔 아름드리나무가-”
“안 해! 안 한다고!”
릴리가 격렬하게 고개를 젓자 갓핸드가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은 릴리가 갓핸드에게 몸을 붙였다.
“좋아해요, 갓핸드.”
“……릴리 님.”
“당신과 오래오래 더 잘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번 전투, 조심해야 해요.”
릴리가 얍! 소리를 내며 주먹을 꼭 움켜쥐어 보였다.
“위기에 처하면 내 이름을 불러요. 내가 날아가서 구해 줄게. 적들은 다 구워 버리고.”
갓핸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릴리 님만 믿을게요.”
릴리의 고개가 갓핸드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갓핸드는 그런 릴리의 붉은 머리칼 위에 자신의 뺨을 슬쩍 올렸다.
서로에게 기댄 연인은 멀리 남쪽 하늘의 별들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
……밤이 지나고 있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시간은 흘렀다.
전진기지 간이 숙소.
내일이 큰 전투인데도 태평하게 배를 긁으며 잠든 쿠일란과 형벌부대에게도,
크로스로드 피난촌.
자신의 국민들이 늦겨울 밤을 잘 지새우는지 순회하며 살피는 더스크 브링어와 그녀의 기사들에게도,
던전 베이스캠프.
지상의 전투에 참가하게 되어 잔뜩 긴장한 베르단디와 성배탐사대에게도,
크로스로드 인근의 도시.
피난 행렬을 따라 이곳에 도착한 세레나데와 그녀의 상단에게도,
수많은 영웅들과, 병사들과, 인부들과, 시민들에게도, 그리고.
“……신이시여, 부디.”
신전.
새벽에야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들기 전 여신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마르헤리타에게도.
“한 명이라도 많은 환자를,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소서…….”
그리고. 또.
나병척살대의 숙소.
잠들 때까지도 투구를 벗지 못하는, 토르켈에게도.
“…….”
전투를 앞두고 항상 여신에게 올리던 기도를 올리지 않고. 대신 새벽이 올 때까지 파리한 달을 올려다본 이 남자에게도.
시간은 무정하게도 공평하게 흐른다.
그리고, 저 멀리 동녘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둠과 유예를 불사르며, 전쟁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새벽.
소박하게 꾸며진 고블린 신왕의 간이 숙소.
《위대한 칼리-알렉산드르.》
마침 의관을 모두 갖추고, 망토까지 두르고 난 칼리-알렉산드르에게, 부하 고블린 아미르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침공일입니다.》
《음.》
마지막으로 허리춤에 시미터를 패용(佩用)한 칼리-알렉산드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펄럭!
칼리-알렉산드르가 간이 숙소를 빠져나오자, 중앙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5만에 달하는 그의 군단이 질서정연하게 대기 중이었다.
쿵! 쿵! 쿵!
고블린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무기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일시에 내리쳐지는 무기 소리에 일대가 진동했다.
심장이 섬뜩해지는 장관이었다.
문득 칼리-알렉산드르의 뇌리에, 자신을 거두고 키워주었던 마법사 부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칼리-알렉산드르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아아. 어머니, 아버지.’
차라리 그때. 들판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
나를 죽여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이런 괴물은, 탄생하지 않았을 텐데-
《출정이다! 인간을 모조리 죽이고, 인세를 모조리 불태워라!》
가면과 왕관이 결합된 투구를 고쳐 쓰고, 고블린 신왕이 간결하게 내뱉었다.
《우리는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