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452
◈ 452. [Side Story] 황제의 이름으로
대륙 중부에는 한 줄기 강이 흐르고 있다.
대륙의 남서부와 북동부를 구분 짓는 이 강의 이름은 이리스.
황도 뉴 테라가 인접한 내해를 지나 동부의 외해까지 흘러내려가는 큰 강으로, 대륙 중부를 풍요롭고 비옥하게 만들어 준 문명의 젖줄이다.
대륙 중앙을 남김없이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에버블랙 제국에게 이 강은 황도 뉴 테라의 실질적 지배권역이자,
외침(外侵)을 허용할 수 없는 절대방어선이기도 하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이 강의 남쪽으로, 내가 이끄는 크로스로드의 병력이 몰려들었다.
“워워.”
말을 멈춰 세운 나는 강의 건너편- 북쪽에 진을 친 상대 병력을 바라보았다.
황도방위군.
장미와 방패가 그려진 깃발을 펄럭이는, 페르난데스의 병력.
황도 뉴 테라의 외곽 방비, 그리고 내부 치안을 책임지는 황실 직속 상비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놓인 이리스 강에는…….
“다리가 없군.”
건널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무너진 다리의 흔적만 흉하게 남아 있을 뿐.
강을 살피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했다.
“전투 때 무너졌습니다. 정확히는, 황도방위군이 무너뜨렸습니다.”
돌아보자, 제1군단의 잔당을 이끄는 노기사- 메탈릭이었다.
한쪽이 허옇게 먼 눈을 살벌하게 번뜩이며 메탈릭이 설명했다.
“페르난데스 전하의 술책으로, 다리로 유인당한 저희 1군단의 선봉은 다리 붕괴와 함께 전멸했습니다.”
“과연.”
“그래서 이후에는 강을 건너 황도로 향하기 위해 멀리 우회해야 했고, 전선이 늘어졌습니다. 이것이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메탈릭은 라르크의 부관으로 황도결전에 참전했었다.
그는 이곳 전역에서 펼쳐진 전투와 이후 제1군단이 황도로 향하기 위해 선택한 진로를 모두 설명해주었다. 나는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끝낸 메탈릭이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여,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전하? 우회하시겠습니까?”
“아니. 당장은 군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야는 널찍하니 공간이 꽤 있다.
“이곳에서 동맹이 모이는 것을 기다리지.”
내 말에 메탈릭이 당황한 듯 몸을 움찔 떨었다.
“여기에 진을 차리겠다는 말씀입니까?”
“왜? 안 될 거 있나?”
“하지만, 바로 강 건너편에 황도방위군이…….”
“다리가 없어서 못 건너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서로 공격은 못 하는 상황이야.”
“그래도…….”
“너무 가깝지 않느냐고?”
나는 씩 웃으며 북쪽의 황도방위군을 보았다.
강을 사이에 두었음에도 두 군대의 거리는 가깝다.
아슬아슬하게 원거리 공격이 닿지 않는다 뿐이지, 시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서로 얼굴이 보일 지경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예……?”
“됐으니 진을 차려라!”
나는 목청을 돋웠다.
“이곳에서 동맹의 합류를 기다린다! 야영을 준비하라-!”
***
진을 차린 날 밤.
적을 코앞에 두고 야영을 하려니 병사들은 다들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쪽이 지금 우리를 공격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왜냐하면 지금 이쪽에는…….’
너희 쪽 사람들이 숨어 들어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그 점을 좀 이용해보실까.
밤이 깊은 시간, 나는 내 막사로 메탈릭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들어오게. 메탈릭.”
머뭇거리며 찾아온 메탈릭에게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자네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이리 와서 앉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메탈릭은 내 앞의 의자에 잠자코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 윽?!”
그리고 메탈릭이 자리에 앉자마자, 막사 안에 대기하고 있던 내 휘하 영웅들이 뛰쳐나와 그를 제압했다.
삽시간에 팔다리가 포박당한 그가 나를 향해 이를 갈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전하……!”
온몸이 흉터투성이에 한쪽 눈은 허옇게 변색된 그가 살의를 드러내자, 눈앞에 맹수가 있는 것만 같았다. 어우 살벌해.
하지만 그의 본질을 아는 이상, 외모가 사나워 봐야 하나도 안 무섭다.
“생긴 건 백전연마의 노련한 장수면서, 하는 짓은 쥐새끼 같군. 메탈릭.”
그를 향해 고개를 가까이 한 내가 씩 웃었다.
“자네가 첩자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
“거짓으로 내 휘하에 들어온 것도. 타이밍을 봐서 내 뒤를 치려던 것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단 말이지.”
당황한 메탈릭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대답은 내가 아니라, 내 옆으로 걸어나온 더스크 브링어가 했다.
“제국군 제1군단 중에서도 제1중장기사단은 라르크의 손발이나 마찬가지인 친위대이지 않느냐.”
“브링어 대공……!”
“라르크가 잡혀 죽었다면, 너희는 같이 죽는 길을 선택할 놈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몸 성히 살아서 도망칠 리가 없지 않느냐?”
더스크 브링어가 피식 웃었다.
“페르난데스가 풀어 준 게지. 과인이 모를 줄 알았느냐?”
브링어 공국은 라르크, 그리고 휘하 제1군단과 전쟁을 벌였다.
제1군단이 어떤 자들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들이 브링어 공국을 짓밟은 이들이니까.
더스크 브링어는 처음부터 메탈릭의 생존에 의문을 품고 있었고, 그 의문을 파헤친 결과 사실이 되었다.
“……흐.”
메탈릭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되는군요.”
강건히 저항하면 [지휘의 마안]으로 제압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그는 즉시 저항을 포기했다. 노기사의 입으로 잔뜩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이십시오.”
“하여간 기사라는 것들은 죽여 달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다니까. 이봐 메탈릭,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고.”
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나는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라르크 형님의 충직한 심복이었던 자네가, 어째서 페르난데스에게 붙은 거지? 나는 그것부터 알고 싶은데.”
“…….”
침묵하던 메탈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르크 전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자리의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잠자코 들었고, 메탈릭은 계속했다.
“라르크 전하께서 생포되신 직후, 페르난데스가 저희에게 협박했습니다.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전하를 죽이겠다고.”
“…….”
“하는 수 없이 거짓 항복하고 동태를 살피던 중, 저희 1군단에 찾아와 또 협박을 하더군요. 남부전선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하지 않으면…… 라르크 전하를 당장 죽일 거라고.”
라르크의 목숨을 연명시키기 위해.
1군단 잔당은 페르난데스에게 목줄이 차여, 페르난데스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인가.
“저희는 충정으로 움직인 것이지만, 페르난데스 전하에게 굴복한 것도, 애쉬 전하를 치려던 것도 사실입니다.”
메탈릭이 눈을 감았다.
“죽이십시오. 깨끗하게 끝내주십시오.”
“……내가 제안 하나 하지, 메탈릭 경.”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내 처분을 기다리는 그에게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라르크 형님도 살리고, 저 페르난데스도 엿먹일 수 있는 방법이다.”
“……?”
푹 숙여져 있던 메탈릭의 고개가 들렸다.
노기사의 허옇게 죽은 외눈에 흐릿한 생기가 돌아왔다. 나는 히죽 입가를 끌어올렸다.
“어때. 내 제안을 들어보겠나?”
***
며칠이 지났다.
이리스 강 남쪽에 차린 세계수호전선의 깃발 아래로, 각지에서 몰려든 몰락한 왕들의 군세가 집결했다.
4대 이종족, 그리고 변방의 왕들과 지배자들.
이렇게 모아두니 숫자가 상당했다. 나는 어느새 좌우로 길게 늘어선 군영을 살핀 뒤, 손에 들린 종이 리스트에 체크를 끝냈다.
“남부 도시국가 연합과 서부의 신기루 부족까지 합류…… 이것으로 모두 모였군.”
이쪽도 준비한 카드가 모두 손에 들어왔다.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나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슬슬 뉴 테라로 떠나 볼까…….”
그때였다.
둥둥둥……!
강 건너편에서 낮게 북소리가 깔렸다.
부우우우우-!
길고 웅장한 나팔소리도 함께였다.
지난 며칠간 우리가 이쪽에 집결하는 동안 미동도 않던 황도방위군이었는데. 느닷없이 관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황도방위군이 질서정연하게 좌우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미간을 좁혔다.
“……내 생각보다 빠르게 나와 주시네, 우리 형.”
갑작스러운 황도방위군의 움직임에, 동맹의 왕과 병사들이 당황해서 그쪽을 보았다.
그리고 좌우로 쫙 갈라선 황도방위군의 앞으로 한 병사가 달려나오더니, 우리 쪽을 향해 쩌렁쩌렁 소리쳤다.
“여신의 선택을 받아 이 땅 위에 낙원을 건설하신, 지고하고 존귀하시며 고고하신 이 나라의 지존!”
어라.
언제 한 번 들어본 멘트인데, 이거.
“위대한 에버블랙 제국의 유일한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황도방위군이 일제히 후창했다.
그 쩌렁쩌렁한 만세(萬歲) 외침에 일대가 울릴 정도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내가 알기로 이 인트로는 전 세계에서 단 한 명한테만 허락되었을 텐데.”
내가 구시렁거리든 말든, 강 건너편의 병사는 계속했다.
“페르난데스 ‘엠버키퍼’ 에버블랙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그리고.
등장했다.
다그닥, 다그닥…….
하얀 백마를 타고, 흑색과 금색의 제복을 차려입고, 검붉은 망토를 뒤로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찬란한 금관을 쓴 채.
화려한 황제의 의관을 갖추고서, 나의 둘째 형 페르난데스가 황도방위군의 중앙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기슭의 가까이까지 다가온 페르난데스가 싱긋 웃었다. 나도 그런 형을 마주보며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드디어 맛이 가셨군, 친애하는 형님. 스스로 황제를 천명하다니.”
페르난데스는 태연하게 금관을 고쳐 썼다.
“제국의 옥좌는 세계를 다스리는 자리. 인류를 대표하는 자리다. 세계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한 지금, 언제까지고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아바마마께서 실종되셨다면, 찾을 생각부터 하는 게 진짜 아들 아니야?”
“필부(匹夫)의 아들이라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우리는 황족이며, 수호자다. 아버지의 목숨보다 나라의 명운과 세계의 미래를 먼저 고려해야지.”
“하여간 혓바닥 기름칠 하나는 오지게 해 두셨군…….”
나는 혀를 내둘렀다.
페르난데스는 한결 위엄을 뺀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이구나. 애쉬. 그동안 잘 지냈어?”
“살갑게 대해주니 고마워, 형. 황제씩이나 되셔서는 아직도 동생을 챙겨 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긴 말 않을게. 지금이라도 항복해. 그러면 너와 너의 사람들, 모두 내가 ‘구원’해 줄게.”
페르난데스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너는 내가 구해낼 사람의 목록에 들어 있었어. 나는 네가 겪은 지난 무수한 세월의 싸움을 알고 있거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페르난데스는…… 이 세계가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역시 이 형에게는 캐물어야 할 이야기가 많다.
“그렇게 길고 혹독한 세월을 영혼이 부서지도록 싸웠는데, 마지막에 구원이 없다면…… 그건 너무하잖아. 그러니까, 나에게 와. 애쉬.”
“…….”
“함께 떠나자. 신세계로. 새로운 낙원으로.”
페르난데스는 자상하게 지껄였지만,
나는 잠자코 주먹을 치켜올린 뒤, 천천히 가운데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이게 내 대답이다.”
“……?”
페르난데스는 의아해했다. 이 세계에서는 이게 별로 모욕적인 제스처가 아닌 모양이지만, 뭐 어때.
엿이나 먹어.
“나의 구원은 항복에도 없고, 도피에도 없어. 나의 구원은 오로지 내가 나의 손으로 싸워 쟁취하는 것이다.”
나는 으르렁댔다.
“네 다리 아래로 기어 들어갈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다 결국 부서질 거야. 애쉬.”
“부서져도 상관없어.”
나는 내 반대편 손에 들린 깃발을- 세계수호전선을 상징하는, 텅 빈 흑기를 꽉 움켜쥐었다.
“이미 산산조각이니까.”
산산조각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말이 안 통하는군.”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나의 군영을 살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잡아들일 수밖에.”
“뭐?”
“황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페르난데스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역도(逆徒)를 붙잡아라!”
그러자,
척! 척! 척!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군영 안의 여러 세력들이 갑자기 무기를 뽑아 나에게 겨누었다.
제1군단의 잔당을 필두로, 각지에서 합류한 몰락한 왕들 중 상당수가 나를 배신하고 공격 태세를 취했다.
“뭣?!”
“이게 무슨…….”
당황한 나머지 몰락한 왕들과 세력들은 다급히 내 주위를 감싸 둘러싸며 마주 무기를 들었다.
내 쪽에 선 것은 4대 이종족, 그리고 고블린 전쟁 때 지원 왔던 세력들.
그 외 몇 개의 몰락한 왕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절반 이상은 페르난데스의 명령대로 나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처음부터, 혹은 나중에라도. 이들은 페르난데스에게 포섭당한 것이다.
남단의 3황자보다야 중앙을 차지한 2황자가 세계의 패권을 틀어쥘 것이라 정치적으로 판단한 것이겠지.
괴수의 침공이니 세계의 멸망이니는 먼 이야기지만, 권력은 가까우니까.
순식간에 세계수호전선이 둘로 쪼개졌다. 나는 이 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여러분.”
그리고, 나지막이 내뱉었다.
“줄 제대로 선 거 확실하지?”
예로부터 라인 잘못 탔다가 패가망신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너희는 전부 줄 잘못 섰어.
그쪽은 썩은 동아줄이라고.
나는 천천히 손을 코트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 손에- 에버블랙의 나뭇가지가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