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660
◈ 660. [Side Story] Last Night On Earth (3)
윤은 움찔거리던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명확해졌다. 그러자, 눈앞에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성이 보였다.
“……아빠?”
“윤!”
윤과 같은 풍성한 상앗빛 머리칼의 중년 남성이 반갑게 소리쳤다.
북방 아리안 왕국의 국왕, 밀러 아리안이 직접 막내딸을 보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윤, 정신을 차렸구나! 네가 혹시 큰일이라도 당하는 줄 알고 이 아빠는…….”
“아빠, 여기까지 어떻게……?”
“사랑하는 막내딸이 죽을병에 걸렸다는데, 당연히 아빠가 와봐야지 않겠니?”
국왕은 웃었지만, 윤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아버지, 밀러 아리안은 좋은 왕이었지만 좋은 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식들을 얼마든지 정치적 수단으로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장 2년 전만 해도, 윤의 의사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고 애쉬 황자와 혼약을 추진했었지 않은가.
딸의 앞에서는 사랑한다며 눈물짓지만, 뒤돌아서서는 나라의 이익을 위해 자식 따위 얼마든지 죽게 둘 수도 있는 사람. 이렇듯 정치적인 인물이 바로 아리안 왕국의 국왕이었다.
“네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 아리안 왕국의 국보…… 성물 ‘극점의 눈물’을 사용했단다.”
그래서 윤은 아버지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저 귀한 국보를 사용했다는 설명을 했을 때,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그때 옆의 신관이 조심스럽게 국왕에게 말했다.
“폐하. 성물이 효과를 발휘하고는 있지만, 왕녀님의 부상을 완전히 치유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뭐야?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무슨 수를 써서든 낫게 하게!”
“‘극점의 눈물’은 신성력의 응집체…… 애초에 신성력으로 낫지 않는 부상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왕녀님께서 잠시나마 의식을 차리신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뭔가. 내 딸이 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곧 다시 의식을 잃을 거다…… 그런 말인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오오, 세상에 어찌 이런 비극이…….”
밀러 아리안은 왕관 아래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탄식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이…… 만리타향 전선에서 이런 일까지 겪어야 한다니, 오오…….”
“…….”
윤은 가늘게 눈을 떴다.
슬슬 아버지가 왜 이렇게 오버하는지 짐작이 갔다.
“우리 아리안 왕국은 국보인 비공함 ‘아리안 베어’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막내 왕녀와 용맹한 전사들까지 죽거나 다쳤다. 심지어 국보 ‘극점의 눈물’까지 사용했지만 딸을 낫게 할 수 없었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압도적 손실이야. 그렇지 않느냐, 윤?”
아버지는 이것마저도 정치에 활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든 왕들에게, 그리고 세계수호전선의 장에게…… 적합한 대가를 청구하겠다. 그리고 우리 아리안 왕국은 더 이상 출혈을 감수할 수 없다고 선언하겠어.”
“…….”
“그러니 윤, 그동안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었는지 설명해다오. 그러면 나머지는 이 아비가 알아서 하마.”
아리안 왕국은 세계수호전선에 참여했으나, 어디까지나 이 일에 한해 국왕 대리를 맡게 된 윤의 주도 아래 참여해왔다. 국왕은 단 한 번도 북방의 고향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으며, 늘 참전에 소극적이었다.
“괜히 남부를 돕다가 우리 북부가 입은 치명적 손실을 낱낱이 논하고 합당한 보상을 챙겨야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에서 빠져야겠어. 그러니, 윤. 아비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어서 말해다오. 응?”
“…….”
윤은 옆을 돌아보았다. 윤이 다시 의식을 잃기 전에 그녀의 말을 기록해둘 셈인지, 사관이 모여 그녀의 말을 받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내뱉는 모든 말을 아버지는 정치적으로 사용하겠지.
윤은 한숨을 폭 뱉었다.
“아버지. 세계의 멸망이 코앞이에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셔야겠어요?”
“윤, 너는 똑똑한 아이잖니.”
딸의 손을 꼭 쥔 국왕이 부드럽게 미소해 보였다.
“세상이 정말로 멸망할 리가 없잖니? 이건 단순한 남부의 괴수발생일 뿐이야. 매년마다 늘 있던 일이라고.”
“…….”
“남부 놈들이 저들만 피해를 입기 싫으니까, 공동책임으로 엮어서 우리에게까지 자신들의 손해를 전가시키려는 속셈일 뿐이란다. 제국이 늘 해오던 짓이기도 하지. 이건 다분히 정치적인 싸움이야.”
“…….”
“아버지는 다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단다. 그러니…….”
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였다. 경비병이 바깥에서 소리쳤다.
“아룁니다, 수인왕 쿠일란 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리안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인왕? 수인족에게 왕이 있었나? 누구-”
벌컥!
거세게 문이 열리고, 쿠일란이 병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거대한 늑대인간의 등장에 아리안 국왕을 비롯해 새로 온 아리안 왕국 사람들은 모조리 기겁했지만, 윤은 반갑게 웃었다.
“쿠일란! 뭐야, 굉장히 잘생겨졌네?”
“……윤.”
쿠일란은 주위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았다.
“이 모습 보고 잘생겼다고 해주는 건 그대가 처음이군. 다들 겁먹기 바쁜데.”
“근육도 더 빵빵해졌고, 털도 더 풍성해졌는걸? 잘생긴 걸 잘생겼다고 해야지, 뭐.“
늑대로 변한 쿠일란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오.”
“하하. 안타깝네요. 이게 나아서 눈을 뜬 게 아니고, 우리나라 국보에 들어 있던 신성력을 들이부어서 잠깐만 의식을 차리게 한 거라…… 곧 다시 잠들 거라는 모양이에요.”
“그런…….”
말을 삼키는 쿠일란을 윤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쿠일란. 부탁할 게 있어요.”
“무엇이든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이번 전투에 나서기 전에, 내 유서를 공표해줘요. 세계수호전선의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뜻밖의 부탁에 쿠일란이 눈을 의아하게 떴다.
“유서, 부끄러운 내용이라고 하지 않았수?”
“부끄럽죠. 하지만, 필요한 내용이에요.”
윤이 메마른 손을 내밀었다. 쿠일란은 그 손을 꽉 쥐어 주었다.
“해줄 거죠?”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후후, 고마워요. 믿을게요.”
성물의 효과가 끝나가는지, 윤의 몸에 휘감겨 있던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윤의 눈이 다시 천천히 감겼다. 윤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스쳤다.
“언젠가 내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깨어날 거요.”
“그러면 그때는, 평화로운 세상이면 좋겠네요…….”
“평화로울 거고.”
“쿠일란.”
눈을 감기 직전, 윤이 속삭였다.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나 기다리지 마요.”
“…….”
쿠일란은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윤은 이미 다시 의식을 잃은 뒤였다.
윤을 침대에 고쳐 눕혀주고 쿠일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뒤에 서 있던 아리안 국왕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 그…… 수인왕 쿠일란. 만나서 반갑네. 나는 윤의 아비 되는 사람일세.”
“…….”
“윤의 유서를 자네가 가지고 있다지? 나에게 돌려주겠나?”
“싫수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쿠일란이 천천히 돌아섰다.
기가 막힌 아리안 국왕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무슨 권리로 거절하는 거지? 애초에 자네가 왜 내 딸의 유서를 가지고 있는 건가?”
“나는 윤의 전우(戰友)니까.”
“전선의 동료였다는 이유만으로 내 딸의 유서를 빼돌리려는 겐가? 자네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 당장 유서를-”
“그리고.”
쿠일란이 으르렁대며 읊조렸다.
“나는 윤의 정인(情人)이기도 하니까.”
“…….”
아리안 국왕이 입을 떡 벌렸다.
오랫동안 쿠일란과 윤을 지켜봐온 전사와 사제들은 마침내 인정한 이 늑대인간의 선언에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막내딸이 남긴 유서의 내용을 듣고 싶거든, 아리안 왕국의 국왕이여.”
쿠일란은 성큼성큼 걸어서 병사들을 밀쳐내고 병실을 나서버렸다.
“며칠 뒤에 열릴 세계수호전선의 출정식에 참가하는 게 어떻소?”
“추, 출정식?”
“흑룡 토벌을 떠나는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곧 출정식이 열릴 예정이외다. 윤의 뜻대로, 그곳에서 그녀의 유서를 읽겠수.”
“…….”
“그때 들으시구려. 물론 그때까지 이곳 전선에 남아 있을 배짱이 있다면 말이지만.”
누구도 쿠일란을 제지하지 않았고, 쿠일란은 병영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캄캄한 어둠에 물든 도시의 거리를 바라보며 쿠일란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나 기다리지 마요.
윤의 마지막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쿠일란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늑대의 얼굴에서 황금색 안광이 휘몰아쳤다.
***
윈터실버 상단. 크로스로드 지부.
빼곡하게 조명을 켜둔 이곳은 늘 그렇듯 바빴다. 인부들이 물자를 싣고 도시 곳곳으로 달려 나갔고 각지에서 온 사자들이 첩보와 정보를 정리했다.
그리고 상단주의 방.
세레나데는 웬일로 업무를 멈춘 채, 자신의 호위- 하녀복장의 검사 엘리제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애쉬 황자 전하를 잘 부탁해, 엘리제.”
엘리제의 손을 꼭 쥔 채 세레나데는 몇 번이고 반복한 말을 또 하고 있었다.
“그분을 지켜줘. 그분은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뛰어드시는 분이니까…….”
“…….”
“믿고 부탁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할 수 있다고 말해줘.”
엘리제는 가라앉은 감청빛 눈을 흘깃, 올려 자신의 주인을 마주 보았다.
세레나데는 초연한 얼굴이었으나, 그 얼굴에는 흐릿한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해내겠습니다, 주인님.”
엘리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제는 분명 유능한 검사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대단히 빼어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인간 중에서 그녀와 맞상대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흑룡이다.
이번 흑룡토벌 원정대에 뽑히긴 했으나, 엘리제는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막강한 악룡을 상대로, 자신의 검무(劍舞)에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재능과 실력이 빼어남을 아는 만큼, 상대의 격이 자신을 한참 뛰어넘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존재 앞에서 애쉬 황자를…… 지킬 수나 있는 걸까?’
하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듯 떨리는 주인의 은빛 시선 앞에서.
세레나데 또한 정말로 엘리제가 애쉬를 지키기를 믿고 기대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세상에 마지막 밤이 드리웠고, 멸망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억만금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꼭 쥔 세레나데의 가느다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엘리제는 가만히 지켜보아야 했다.
그때였다.
“상단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하인이 말했다. 천천히 엘리제와 잡은 손을 놓은 세레나데가 다급히 외양을 정리하며 물었다.
“어느 분이시니?”
“그것이, 인어왕께서 오셨습니다.”
“아. 어서 안으로 모시렴.”
문이 열리고, 인어왕- 킹 포세이돈 13세가 연푸른 장발을 휘날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제는 세레나데의 뒤로 걸어가 시립했고, 세레나데는 평소처럼 방긋 웃으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포세이돈 전하.”
“세레나데 백작영애.”
세레나데의 앞에 선 포세이돈이 쓰게 웃었다.
“미안하게 됐군. 이신의 힘을 물려받은 뒤로, 과도하게 감각이 예민해진 탓에…… 의도치 않게 방 안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네.”
“네? 아…….”
“애쉬 황자를 걱정하고 있더군.”
세레나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음처리가 된 방인데도, 그 작은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인어왕의 육체적 능력은 강력해진 상태였다.
“후후. 부끄러워하지 말게. 연인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
“다만, 너무 걱정하지도 말게. 그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이 전선에 소속된 모든 영웅들의 바람이기도 하니.”
킹 포세이돈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모두가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질 것이고. 토벌이, 원정이 성공한다면…… 사령관은 무사히 돌아올 걸세.”
물론, 만약 토벌이…… 원정이 실패한다면.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애쉬 황자에게는 미리 말해뒀지만. 그대에게도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킹 포세이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표정을 정돈한 세레나데도 그를 마주 보았다.
“벌써부터 이번 전투 이후를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는 언제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하니까 말이야.”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이번 전투에서 나는 살아남지 못할 걸세.”
킹 포세이돈은 선언했다.
화들짝 놀라는 세레나데에게, 킹 포세이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 사후에 인어족이 살아갈 일을 논하기 위해…… 그대를 찾아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