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760
◈ 760. [Side Story] Brand new day (2)
멀리서 울리는 에반젤린의 비명을 배경으로.
루카스와 헤카테는 한 카페테리아의 창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루카스는 제 주인이 없는 자리에서는 늘 그렇듯 차갑고 기능적인 얼굴이었고, 헤카테는 그런 루카스의 얼굴을 조각상 감상하듯 물끄러미 보았다.
“갑옷 차림 아닌 거.”
“음?”
루카스의 코트를 살핀 헤카테가 흐릿하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
루카스는 멀뚱하게 자신의 코트 목깃을 손으로 쓸었다.
“그런가?”
“응. 너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항상 교복 차림이었으니까.”
아카데미 때는 교복, 이곳 전선에서는 갑옷…….
루카스는 거의 대부분 상황에서 항상 무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황자의 호위로서 항상 주위를 경계하려는 그의 의지의 표출이기도 했으나, 헤카테는 이제 그 진의를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마음도 닫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그의 사복 차림이 반갑기도 했고, 또…….
앞선 평생동안 루카스가 자신에게 역시 마음을 닫고 있었다는 사실의 재확인에, 속이 쓰리기도 했다.
“망중한(忙中閑)이겠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것도 좋네.”
하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한 헤카테가 장난스레 눈짓했다.
“먼저 데이트 청했는데, 뭐 다른 특별한 코스 없어?”
“밥 먹고 커피 한잔하는 것 말고는 생각을 안 했는데.”
“그런 점도 너답다, 야…….”
아니, 먼저 데이트 청해주고 밥 먹고 커피 마시기까지 해준 걸 대견하다고 해야 하려나.
검술과 제 주인밖에 모르는 골든리트리버-휴먼치고는 장족의 발전 아닌가.
달칵.
그때 한 모금 마신 커피잔을 내려둔 루카스가 진지한 눈으로 헤카테를 보았다.
“그래서 헤카테. 어떻게, 생각은 좀 정리가 됐나?”
“…….”
루카스의 질문은 다름 아니다.
이제 더 이상 기사로서 살 수 없을 헤카테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정했냐는 것이겠지.
“……글쎄.”
피식 웃은 헤카테는 스푼을 들어 커피잔을 휘휘 저었다.
“잘생긴 기사님이 확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아서.”
“…….”
눈을 내리깔고 침묵하던 루카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헤카테. 네가 정말로 원한다면…….”
“루카스.”
하지만 헤카테가 그 말을 끊었다.
“나도 알아. 너, 나한테 한 번도 마음이 없었잖아?”
“…….”
“그래서 그동안 둔감한 척하며 철벽 쳤던 거고. 나도 다 알아.”
루카스는 침묵했다. 헤카테는 이윽고 스푼을 젓는 것을 그만두었다.
의미 없이 빙빙 돌아가는 건 이제 신물이 났다.
그래서 스푼을 내려두고, 잔에 남은 쓴 커피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마지막까지 삼킨 뒤…….
용기를 내어 루카스를 마주 보았다.
“나 그렇게까지 이기적인 인간 아니야. 자존심도 있고. 동정으로 네 마음 붙잡거나 그럴 생각 없어.”
사실은 있었다.
동정이라도 좋으니 이 남자가 자신을 봐줬으면 하던 때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하지만…….
‘후.’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 모두를 위해서라도.
“내가 앞으로 뭘 하며 살아갈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번에 그 좀비 살덩이들한테 죽을 뻔했을 때,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긴 했어.”
“하고 싶은 일?”
“응.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일.”
헤카테가 심술궂은 장난을 치려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녀의 그런 미소는 아주 어렸던 시절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라, 놀란 루카스는 바보처럼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정말 작고 하찮은 소원이야. 들어줄 수 있을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카테는 후, 하고 숨을 들이켠 뒤.
“루카스. 내가 너를 차도 될까?”
그런 소리를 했다.
“……?”
영문을 모르겠어서 루카스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자 헤카테는 입을 가리고 키득거렸다.
“평생 너한테 매달린 내가, 마지막에는 너를 뻥 걷어차 보는 거야. 응, 이게 내 소원이야. 어때. 들어줄 수 있어?”
“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루카스의 앞에서, 헤카테는 문득 생각했다.
그날. 괴수들의 앞- 세상의 끝에서 쥬니어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 모든 걸 잃고 나면. 당신은, 그냥…… 당신이 되는 거예요.
– 저주를 잇는 자도, 옛 전쟁의 복수자도, 제국의 기사도 아닌. 그냥 스물네 살 당신.
“…….”
헤카테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앞으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더 이상 검도 쓰지 못하고, 저주도 잃어버렸고, 복수할 무대마저 사라졌으니까.”
모든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려 해.”
처음부터.
이 폐허 위에서.
어느 쪽으로든, 무슨 일이든,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냥…… 나니까. 과거로부터 동떨어져서, 하고 싶은 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는, 겨우 스물네 살인 나…….”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은 패배자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카테는 더 이상 어두운 굴의 끝을 보고 있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이 증오하는 나라의 생존자인, 하지만 괴수의 앞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 어린 마법사처럼…….
수영장이 반짝이는 남국 리조트의 꿈은 꾸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고, 새로운 목표를 찾아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이제 너한테 매달리는 것도 끝.”
그토록 좋아했던.
아니, 어쩌면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
하지만 자신에게 한 번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이 지긋지긋하고도 잔인한 첫사랑에게, 헤카테는 시원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이 나쁜 자식아.”
“…….”
“이거 내가 너 찬 거다. 확실하게? 알겠지? 우리 합의한 거다?”
“아니, 그게.”
“그럼 나 갈게.”
쓰리면서도 후련한 가슴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헤카테가 싱긋 웃어 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 즐거웠어.”
“…….”
“그럼, 안녕.”
작게 입을 벌린 루카스를 뒤로하고, 헤카테는 카페테리아를 벗어나 성큼성큼 눈 내리는 겨울 거리로 사라졌다.
“…….”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또 다른 0고백 1차임 스코어를 기록한 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루카스는 작게 입을 벌려 겨우 소리를 냈다.
“우엉……?”
익룡을 재현한 에반젤린의 비명에 뒤지지 않는, 무척 곰 같은 소리였다.
***
크로스로드 도심, 노점 거리.
“와, 맛있는 음식이 많아요!”
각국이 차린 노점 앞에서 한니발이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소년 정령사의 양쪽 손에는 각자 제니스와 로제타가 잡혀 있었다.
“어서 가요, 아빠! 사제장님!”
“으응…….”
“그래…….”
제니스도 로제타도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의 사이에 한니발이 낀 이 모습이 꼭…….
‘가족 같잖아…….’
부부와 어린 아들 분위기 아닌가.
물론 이것은 한니발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형성한 것으로, 한니발은 천연덕스럽게 순진한 어린 아들 역할을 하며 두 사람을 거리 안쪽으로 인도했다.
제니스와 로제타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서로 싫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세 사람은 각국의 새해 음식을 맛보고, 주전부리를 손에 쥐고, 즐겁게 웃고 서로 농을 던지며 함께 걸었다.
“앗, 솜사탕이다!”
그러다 솜사탕 노점을 발견한 한니발이 소리쳤다.
“우리 솜사탕 먹어요, 솜사탕!”
“그래. 내가 다녀올게.”
제니스에게 눈짓한 로제타가 솜사탕 노점으로 향해 세 개를 주문했다.
로제타가 솜사탕을 받아오는 동안, 배실배실 웃는 한니발을 향해 제니스가 한쪽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한니발.”
“네, 아빠.”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네 마음은 알겠지만…… 로제타 사제장님께는 너무 떼쓰지 말려무나.”
느닷없는, 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에 한니발의 큰 눈이 흔들렸다.
소년 정령사가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두 분 사이 좋으시잖아요? 여신교 사제에게 연애나 결혼이 금지된 것도 아니고.”
“사이…… 뭐 그래. 나쁘지 않지.”
제니스는 쓰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때는 좋아하기까지 했어.”
“정말요? 그런데 왜요?”
“그게, 그러니까…….”
그때 솜사탕을 가지고 로제타가 돌아왔다.
한니발이 다급하게 로제타에게 물었다.
“사제장님, 우리 아빠가 싫으세요?”
“응? 싫지 않아. 교리 때문에 처형시킬 뻔한 적도 있고, 착실하게 이단 포인트 적립 중이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아.”
뒤이어 로제타가 피식 웃었다.
“오히려, 젊었을 때는 좋아했던 적도 있었지.”
“네? 그럼 두 분 서로…….”
“타이밍이 엇갈렸지만, 그래. 서로 호감은 있었어.”
태연하게 말하며 로제타는 두 사람에게 각자의 솜사탕을 건넸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연정보다 더 깊은 관계거든.”
목숨의 은인이자, 의남매이자, 전우이자, 같은 신을 섬기는 몸.
로제타와 제니스의 관계는 복잡다단했다.
“남녀로서 가까워지면, 나머지 모든 관계들이 그 깊이를 잃게 될까 봐. 우리는 그게 두려웠어.”
“…….”
“그래서 서로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지.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네.”
로제타가 제니스를 마주 보았고, 제니스는 멋쩍게 웃었다.
“젊고 어렸던 마음들도 이제는 알맞게 닳았어. 우리는 지금 이대로가 편해.”
“하지만……!”
“한니발.”
로제타는 조용히 한니발을 다독였다.
“세상에는 여러 관계의 형태가 있단다. 그리고 너와 나도, 굳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함께할 필요는 없잖니.”
“…….”
“나는 네 엄마가 되어줄 순 없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고 축복하고 생각할 수는 있단다.”
로제타는 한니발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
한니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끄덕인 뒤, 다급하게 눈가를 훔치며 노점 거리로 달려 들어갔다.
“저, 저 뭐 좀 더 사올게요……!”
쪼르르 달려 사라지는 한니발의 뒷모습을 보다가 제니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해 첫날부터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가혹한 이야기만 한 것 같네요.”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있는 세상인 건 아니니까.”
로제타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입가와 눈가에 매력적인 주름이 파였다.
“그래도 참 애 발상이 앙큼해. 너랑 나를 맺어줄 생각을 하다니. 철없고 대담해서 오히려 그럴싸해 보인 계획이라고 해야 하려나.”
“하하하…….”
“가지고 싶다고 다 가질 수 있는 세상인 건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는 언젠가 알맞은 과실을 손에 넣는 법이지.”
로제타는 성호를 그리고 작게 기도했다.
“저 아이에게 여러 좋은 인연이 오기를.”
옆에서 함께 기도하며 제니스가 조용히 웃었다.
“이곳 크로스로드에서 엇갈린 많은 인연만큼, 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인연을 맺기를.”
두 사제는 함께 기도했다.
한니발의 미래에, 크로스로드에서 얽히고설킨 다른 사람들의 인연에, 축복이 있기를.
새해 첫날을 맞아, 모두에게…….
‘……그런데, 잠깐만.’
그때 기도 중에 갑자기 두 사제의 뇌리에 잡념이 끼어들었다.
‘우리 정작 서로 마음을 터놓은 적은 없었잖아.’
‘제대로 고백한 적도 없었는데 차인 건가, 지금……?’
두 사제는 서로를 힐끔 보았다가 이윽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상처뿐인 0고백 1차임 스코어가 크로스로드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
크로스로드 인근 소도시.
갓 구운 빵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교외의 어느 작은 벽돌집 앞.
“…….”
목발을 짚은 채, 그 앞에 서서.
품에는 딸과 주고받은 편지를 꼭 안은 채.
몇 번이고 숨을 들이켠 체인은 눈을 꽉 감았다 뜬 뒤.
천천히 손을 문 위에 올렸다.
그리고,
똑똑-
용기를 내어, 노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