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464)
464화. 오다 주웠다
수습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넘쳐도 너무 넘치는 학교에서의 첫 화이트데이를 맞이한 연두.
기쁘다기보다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등교할 때부터 들떠 있긴 했지만, 그건 손수 만든 초콜릿을 친구들에게 나눠줄 생각에 그랬던 거니까.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수습을 마친 뒤에도 연두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서 눈만 깜빡거리는 연두를 하연이는 걱정스레 바라봤다.
…… 괜찮은 걸까.
“어.”
그런 와중 하연이의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연두야.”
“으, 으응.”
“여기 봐. 종이같은 게 있는데?”
너무 많아서 봉투를 가져와 넣어둔 사탕과 초콜릿.
그 안에 하얀 종이가 보였다.
고리 모양으로 접어둔 게 쪽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살며시 연두가 손을 뻗었다.
“편지같지..?”
하연이의 말대로였다.
사실 초콜릿과 사탕에 동봉된 편지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연두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해도 누가 보낸지도 모르게 넣어두고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아니면……
“고백!”
눈을 반짝이며 하연이가 외쳤다.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자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막상 연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백..?”
이유는 간단했다.
이성 간의 고백은 아직 연두에게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개념이었다.
하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화이트데이에는 고백하는 사람이 많대.”
“고백이 뭔데?”
물론 하연이도 잘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차이점을 꼽자면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은 있었다는 것.
그 지식을 토대로 하연이는 세상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얘기하는 거야. 사랑한다고.”
“…!”
연두의 표정도 세상 진지해졌다.
하연이의 말에서 연두가 꽂힌 건 ‘사랑’이라는 단어였다.
연두의 안에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아빠.’
실제로 연두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빠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말했다.
아빠 말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는……
휙. 휙.
싫었다.
아빠 말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니 어떤 사람과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지금 연두의 머릿속에서 하연이가 말한 커플과 결혼은 같은 개념이었다.
“한 번 읽어보자, 연두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두가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들었다.
종이를 펼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연이의 생각과 달리, 첫 편지의 내용은 고백이 아니었다.
-안녕, 연두야! 나는 6학년 2반, 독서 동아리 회장 주아림이야!”
무려 6학년 언니의 편지였다.
선화초등학교는 같은 동아리라면 학년에 관계없이 함께 활동할 수 있었다.
즉, 유일한 창구였다.
학교 내 활동을 통해 저학년과 고학년이 소통할 수 있는.
아직 신입생은 동아리를 정하지 않는 상태이고.
-연두가 동아리에 들어오면 재미있는 책을 잔뜩 소개해 줄게! 즐거운 활동도 많이 할 거고.
쉽게 말하면 영업 쪽지였다.
동아리 초대장같은 느낌.
독서 동아리 회장답게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책을 좋아하는 연두였기에 마음이 동할 만도 했다.
-물론 꼭 와야 한다는 건 아니야. 우리 동아리에 오지 않더라도 도서관에 꼭 한 번 놀러와! 헤헷!
포근한 말투에 연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옆에서 하연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6학년 언니다…”
놀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원래 그렇지 않은가.
초등학교 때는 윗 학년 선배들이 어른보다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연두도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리미언니, 진짜 착하다…”
“응, 응.”
다음 편지의 분위기는 180도 달랐다.
짧고 굵은 내용이었다.
-안녕. 나는 5학년 짱 이수호다.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5학년 5반으로 찾아와.
“…”
연두와 하연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내용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무서운 쪽지였다.
그렇게 두 아이가 편지를 보는 한편, 뒤에 서서 마음을 졸이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다름아닌 연두의 단비어린이집 동기 서현우였다.
아까부터 현우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라고? 고백?
분명히 귀에 고백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그 후에는 편지를 읽으며 웃는 연두의 모습이 보였고.
현우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받으려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돼!
물론 연두에게 고백을 하려는 생각같은 건 없었다.
단지 전해주려는 것뿐이었다.
주머니에 감춰둔 사탕을, 친구로서 말이다.
‘안 되겠어.’
더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현우는 지나가다 들린 듯 최대한 자연스레 연두의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선 말했다.
“서연두.”
“.. 응?”
여기서부터가 포인트였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여자아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자칭 연애고수 아빠가 전수한 멘트.
척!
“오다 주웠다.”
모두를 주목하게 만드는 한 마디였다.
***
“오다 주웠다.”
그 말은 생각보다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학년이긴 해도 그 밈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 꽤 있었으니까.
막상 말한 당사자 현우와 대상인 연두가 몰랐다는 게 함정이지만.
특히 연두는 더더욱 그랬다.
‘주운 걸 왜 주지..?’
그런 순수한 의문이었다.
한편 5반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우아악!”
“서현우가 고백했다!”
“뿌뿌뿌뿌!”
“커플이다! 선생님 오면 말해야지~”
석호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은 쓴 침을 삼켰다.
사 온 초콜릿은 있었지만 놀림당할까 봐 가만히 있던 사이에 현우가 용기를 낸 거니까.
막상 현우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빠가 하란대로 한 것뿐인데.
“아니야!”
현우는 뒤늦게 항변했다.
“고백이 아니라 친구라서 준 거라고!”
안타깝게도 분위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가방에 손을 넣은 연두가 무언가를 꺼냈다.
손수 만든 초콜릿이었다.
스윽.
“여기, 현우야. 헤헤.”
“.. 어?”
침묵이 일었다.
벙찐 표정의 현우와 경악하는 몇몇 남자아이들.
설마 정말 이렇게 커플이 탄생하는 걸까.
‘나도 용기를 냈다면……’
아이들로서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장면.
현우의 머릿속에도 스쳤다.
감히 꿈꾸지 못했던, 연두와 커플이 돼서 손을 잡고 선화초등학교 복도를 웃으며 거니는 꿈같은 장면들이.
그리고…… 정말 꿈이었다.
“여기 하연이 거도 있어..!”
“.. 응?”
똑같은 모양의 초콜릿이었다.
이어서 연두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친구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금세 전환된 화제.
“연두가 내 거는?”
“나도 줘!”
“직접 만든 거야, 연두야?”
현우는 그저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세상 슬픈 스토리였다.
한편 그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뒷문으로 들어오는 한 여자아이.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레나였다.
“헉.. 헉..”
진이 빠진 표정으로 레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는 초콜릿과 사탕이 잔뜩 들려있다.
마치 교실에 들어올 때의 연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비록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연두.. 뭐 하는 거지?’
연두가 웃으며 교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잘 모르겠다.
우선 이것들을 어떻게 하는 게 먼저였다.
책상 밑에는 교과서가 들어있고, 넣을 만한 곳은 하나뿐이었다.
레나는 바로 사물함으로 이동했다.
덜컥.
파바밧!
“…?”
토끼눈이 된 레나.
그제야 아이들의 시선도 레나를 향했다.
1학년 5반에 일어난 두 번째 파도였다.
***
다행히 세 번째 파도는 막을 수 있었다.
달달한 내용의 편지도 있었지만 동아리를 소개하는 언니오빠들의 쪽지도 무척 많았다.
그럴 만도 했다.
연시레는 선화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였으니까.
“자, 이제 초콜릿과 사탕은 집어넣도록 해요. 수업시간에 먹으면 안 돼요.”
“네, 선생님!”
작년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더욱 시끌벅적한 화이트데이였다.
‘허허, 정말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아침부터 얼마나 몰려드는지.’
학생주임 선생님의 말이었다.
5반 복도가 말 그대로 연휴의 정체된 고속도로 같았다고.
그 원인은 굳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럼 조금 이따가 수업 시작할게요. 오늘 1교시가 뭐죠?”
“바른 생활이요!”
“맞아요. 그럼 수업 준비할까요?”
바른 생활.
‘통합(바)’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바른 생활이라고 불리는 과목이다.
비교적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수업 준비를 끝낸 연시레는 연두의 자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언제 가, 우리?”
입을 뗀 건 레나였다.
시은이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4교시가 끝이니까 쉬는 시간에 가야 해.”
“쉬는 시간?”
“응. 10분밖에 안 되니까 빨리 전해주고 와야 하고. 우리 반이랑 거리도 멀잖아. 3교시가 국어니까 2교시 끝나고 가자.”
연두와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세운 작전이었다.
초콜릿을 전해줄 친구는 반 친구들 말고도 더 있었으니까.
얘기를 듣던 하연이가 말했다.
“저기.. 얘들아.”
“응.”
“그 초콜릿 전해줄 친구는 어떤 친구야..?”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어떤 아이길래 이렇게 작전까지 세워가며 갖다주려 하는지.
그 물음에 연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짜진짜 예쁘고.. 연두가 좋아하는 친구.”
“…”
연두의 환한 웃음을 보니 조금은 부러워졌다.
초콜릿을 받을 그 친구가.
***
선화초등학교 1학년 1반 강철호.
1반의 회장이자 이름답게 강철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도 철호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강철!”
그래서인지 철호가 아니라 강철이라 부르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 호칭이 철호는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나는 강철이야.’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부서지지 않고 심지어 휘지도 않는 강철.
아빠도 항상 얘기했다.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네 길을 가는 강철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런 바람을 담아 지은 이름이라고.
“수업시간 전에 들어와!”
반을 나서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모두가 그런 성격의 철호를 회장으로서 마음에 들어하는 건 아니었다.
대표로 한 명을 꼽자면 민우.
며칠 전 일이었다.
잠깐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며 철호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떠드는 아이의 이름을 칠판에 적으라는.
선생님이 반을 나서자마자 민우가 때를 기다렸다는 듯 떠들기 시작했다.
바로 철호는 칠판 위에 적었다.
-박민우
그걸 본 민우는 당황해서 말했다.
“뭐, 뭐야!”
“박민우. 두 번.”
자비란 없었다.
바를 정 자 2획이 그어졌다.
얼굴이 시뻘게진 민우는 소리쳤다.
“니가 뭔데! 회장이면 다야!!”
쿵. 쿵.
그 말에 철호는 민우를 향해 걸어갔다.
또래에 비해 커다란 체구.
그 모습은 민우의 눈에 마치 강철로 된 로봇처럼 보였다.
강철 악당 로봇!
“.. 뭐라고?”
육중한 목소리.
안타깝지만 민우는 파워포스 레드로 변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주드의 무기인 나뭇가지도 없었고.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세 번 적히기 전에.”
“…”
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철호가 기선제압을 한 이후로 민우는 잔뜩 기가 죽어있었다.
강철을 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으으..’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화이트데이를 맞아 철호가 선생님께 부여받은 임무가 있었다.
‘철호야.’
‘예, 선생님.’
‘다른 반 아이들이 반에 못 들어오게 하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강철과도 같아 절대로 깨어질 수 없는 법.
그러니까 지킨다!
철호는 문 앞에 서서 복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톡. 톡.
누군가가 두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철호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
꼴깍.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8년을 살면서 또래 아이를 보고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천사가 서 있었다. 그것도 세 명이나.
심지어 말도 한다.
“나는 연두야. 너는 이름이 뭐야..?”
그리고 웃는다.
“처, 철호.”
“철호야. 1반에 초콜릿 주고 싶은 친구 있는데.. 잠깐만 들어가도 대..?”
동시에 연두는 내밀었다.
“여기! 철호도 줄께..!”
얼떨결에 받아든 초콜릿.
그와 동시에 철호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자리를 비켰다.
강철같이 굳게 닫혀있는 문이 열린 거다.
“.. 고마워!”
동시에 철호는 깨달았다.
절대 깨지지 않는 강철도 녹아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
1반에도 아직 좀처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다름아닌 지우였다.
화이트데이는 더더욱 소외감이 들었다.
보통 친한 사이끼리 주고받기 마련인데, 지우는 친한 친구가 없었으니까.
소외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 기뻤는데.’
놀이터에서 사귄 첫 친구들.
연두와 시은이, 그리고 레나.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
하지만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
함께 어울리는 것도 어려웠다.
쉬는 시간은 짧았고 1반과 5반은 거리가 멀었으니까.
겁도 났다.
자신과 달리 새 친구도 잔뜩 사귀었을 텐데, 괜히 방해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지우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엄마 말이 맞는 걸까.’
정말 진짜 친구같은 건 필요없는 걸까.
가방에는 초콜릿이 들어있었다.
용기를 내서 친구들에게 주려 가져왔지만 2교시가 지난 지금도 꺼내지 못했다.
겁쟁이.
나같은 겁쟁이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 응?’
그때였다.
갑자기 교실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귀에 들어오는 친구들의 목소리.
“와악! 연두다!”
“우와.. 쟤가 레나지? 머리카락 노란색 짱이다!”
“시은이도 진짜 예쁘다…”
“우리 반에 왜 왔지?”
꿈인 걸까.
들려서는 안 되는, 보고 싶었던 친구들의 이름이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이윽고 발소리가 멎은 뒤, 너무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지우야.”
빨라진 심장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향하는 세 친구의 환한 미소가.
“화이트데이 선물이야..!”
그 어느 때보다 새하얀 화이트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