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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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화. 그림
조금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기 시작했다는 게.
그것도 모자라 빈 공간을 가득 채웠다는 게.
“와아아!”
함성과 박수 소리.
그 외에도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자연히 느껴지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다.
‘.. 왜 들리냐.’
대화 소리가 들린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갑자기 초능력을 터득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 뭐냐고?
언어는 통하지 않을지라도 두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표정, 억양, 제스처……’
신기하게도 그럼 알 수 있었다.
대충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건지.
이런 걸 보면 괜히 비언어적 표현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 듯했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정면으로 연두와 눈이 마주쳤다.
성공적으로 버스킹을 개시한 우리 귀여운 리더님이 한층 안정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그 위에 환한 웃음이 떠오른다.
“헤헤..”
손을 흔든다.
그런 연두의 잠깐의 행동으로 인한 여파는 꽤나 컸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 거다.
‘곤란한데.’
절로 멋쩍은 표정이 떠올랐다.
한 발 떨어져서 관객의 시선으로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주목을 받아버릴 줄이야.
이젤까지 있으니 더 낯간지러운 기분이다.
또다시 의도치도 않은 해석 능력이 발동했다.
‘.. 저 사람은 누구지?’
‘그니까. 애기가 손 흔들던데.’
‘한국인 맞지?’
‘희한한 사람이네. 저런 데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놀랍게도 전부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대화였다.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무리 혼자만의 생각이라 해도, 여기서 더 나가면 과대망상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나도 연두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잘했어, 연두야.’
대견한 마음. 단지 아빠라서가 아니었다.
생각해 봤다.
만약에 내가 연두의 아빠가 아니라 그냥 이 다리를 지나가는 행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면.
그대로 지나갔을지, 아니면 멈췄을지.
‘고민할 것도 없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급한 일이 있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나는 반드시 멈췄을 거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나쳤더라도 엄청나게 아쉬워했을 테고.
‘그런 연주였어.’
모든 게 완벽했다.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의 밸런스와 팀으로서의 호흡까지.
현재 눈앞의 장면이 그 증거였다.
다들 자리를 잡은 것도 모자라, 몇몇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들고 촬영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때였다.
“Hey!”
가까운 소리였다.
***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젊은 백인 여성이었다.
아마 독일인이겠지.
조금 당황한 채로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는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들이랑 아는 사이인가요?”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이번에는 상상이 아니었다.
내 귀에 들려온 건 독일어가 아닌 영어였으니까.
‘하긴, 하나 더 있지.’
바디랭귀지 말고도 만국 공용어는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Yes.”
질문을 알아들은 이상 틀릴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오, 그렇군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잠깐만. 대화가 더 이어지는 건 변수인데.
일단 알아듣긴 했다.
문제는 대답할 수 있느냐였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내 머릿속에 아무런 양분이 없다고는 볼 수 없었다.
따로 각 잡고 영어 공부를 한 건 아니지만.
‘연두튜브.’
우습게도 유투브가 내 양분의 원천이었다.
날이 갈수록 연두튜브 댓글창의 세계화가 일어나며 영어의 비중도 엄청나게 상승했다.
해석하려면 알아야 했다.
국적이 다르다고 해도 연두부는 하나니까.
‘그 과정에서 알게 됐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영어 표현들을 알게 됐다.
주접도 마찬가지고.
활용할 날이 오기는 할까 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퍼즐을 맞추듯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조합된다.
이윽고 그 조각들이 명확해졌을 때 비로소 내 입이 벌어졌다.
“Can you see the girl over there? Playing the piano.”
(저기 여자아이 보이나요? 피아노 치고 있는.)
말하고도 놀랐다.
그렇게 길었던 것도 어려운 표현을 쓴 것도 아니었지만.
머릿속 생각을 영어로 전달했다는 사실에.
“보여요. 왼쪽에 있는 아이 말이죠?”
“네.”
“그런데요?”
자신감이 붙은 걸까.
이제는 머릿속을 거치지도 않고 영어로 답이 나갔다.
“저 사랑스러운 아이가 바로 제 딸이랍니다.”
교본이 연두튜브 아니랄까 봐.
결국 튀어나온 주접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표정을 본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말실수라도 했나?’
왜인지 잔뜩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의아함에 내가 한 말을 곱씹고 있으니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저 아이의 아빠라고요?”
“.. 네.”
“아빠 맞죠?”
“.. 네.”
“오빠가 아니라 아빠요?”
“.. 네. 네?”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되묻자 들려오는 실소.
“오, 세상에! 너무 젊어 보여서 아빠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한국 사람은 전부 당신 같은가요?”
“하하..”
“실례였다면 미안해요.”
뒤늦게 사과를 건네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좋은 뜻인데요, 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서양인은 동양인을 원래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그게 나한테도 해당되는 말일 줄은 몰랐네.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쪽은요? 그쪽도 어려 보이는데.”
이제는 이 정도 질문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I’m eighteen.”
“Oh, eightee……”
아무렇지 않게 호응하려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에이틴?
‘.. 열여덟 살?’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동시에 깨달았다.
방금 일생일대의 실수를 할 뻔했다는 걸.
‘그쪽은요? 그쪽도 어려 보이는데.’
뒤에 덧붙이려다 말았거든.
저랑 동갑 정도일 거 같은데, 라고.
만약 그랬다면… 정말이지 대참사가 날 뻔했다.
“때, 땡큐.”
“…?”
당황감이 가시지 않은 내 입에서 나간 건 맥락 없는 감사 인사였다.
***
버스킹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점점 멈춰 서는 사람들은 많아졌고 돗자리도 없는 바닥에 앉아서 관람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오스카도 그 경우였다.
약속이 있어 다리를 지나가던 중 음악 소리가 들려온 거다.
‘또 버스킹인가?’
합리적인 유추였다.
원래 이 다리는 버스킹 장소로 애용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늘 들려오던 독일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의 음악이었다.
‘.. 근데 왜 이렇게 좋게 들리지?’
톡톡 튀는 음과 앳된 느낌의 보컬.
그건 오스카의 귀에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가던 길을 멈추고 발길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엄청 많네.’
평소와는 달랐다.
버스킹하는 걸 자주 목격하긴 했지만 드문드문 서 있는 경우가 보통인데.
흔치 않았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경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내 버스킹 장면을 마주한 오스카의 입이 벌어졌다.
“뭐, 뭐야.”
완전히 애기들이었다.
이제 일곱 살이나 됐을까 싶은 조그마한 아이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 너무 귀엽잖아!’
발걸음을 멈추고 여기까지 걸어오게 만든 원동력은 음악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귀에 이어서 두 눈이 사로잡히고 말았으니까.
오스카는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
“야, 언제 와!”
통화가 연결되고 들려오는 친구 녀석의 목소리.
“축구 하자며!”
“테오.”
“뭐.”
“축구보다 중요한 게 생겼어.”
“뭐?”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바움 다리 위로 달려와. 끊는다.”
“뭐라는……”
툭.
미련은 없었다.
전화를 끊은 오스카의 시선은 단비음악대를 향했다.
마침 다음 곡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다음 곡은 숫자송이에요.”
숫자송.
단비음악대가 야심차게 준비한 한국의 동요였다.
오글거린다며 유리가 불만을 표하긴 했지만.
일!
첫 한 글자는 단비음악대 일원 모두가 함께였다.
“일 초라도 안 보이면~ ♪”
이!
“이렇게 초조한데~ ♪”
얼굴이 빨개진 유리도 목소리를 섞고 있었다.
벌써 몇 곡의 연주를 거듭하며 분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있었다.
즐거움.
심장이 벅차올랐다.
콩쿠르에서 완벽한 연주를 하고 상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유리는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입가에서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는 걸.
곧이어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짝짝짝!
아예 엉덩이를 대고 앉은 오스카도 손이 터져라 박수를 보냈다.
공이 머리를 강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퍽!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
축구공이었다.
고개를 들자 테오가 씩씩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슥.
말없이 오스카는 손가락으로 단비음악대를 가리켰다.
자연히 따라가는 테오의 시선.
이윽고 둘이 나란히 앉아서 사이좋게 버스킹을 끝까지 관람했다는 건 안 비밀이었다.
***
버스킹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그나마 있었던 변수를 꼽자면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인해 앵콜 무대까지 선보였다는 것 정도일까.
여담이지만 나도 완성했다.
‘괜찮네.’
이젤 위에는 완성된 그림이 있었다.
솔직히 많이 겸손 떤 거다.
괜찮다 못해 선물하기 아까울 정도의 결과물이었으니까.
찰칵!
즉석으로 사진으로 남겼다.
선물하더라도 나는 물론이고 연두부한테도 공유할 수 있도록.
그림을 챙기고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최고였어, 얘들아.”
“헤헤..”
다들 행복감이 묻어나는 표정이다.
그럴 만도 하다.
성공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완벽하게 버스킹을 마쳤으니.
잠깐 동안 그 기쁨을 만끽한 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 와중에 하파엘이 말했다.
“다음은 공원으로 가죠.”
다소 뜬금없는 말에 물었다.
“공원이요?”
“네. 당장은 아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요.”
“왜요?”
“다음 버스킹을 해야 하니까요.”
끝이 아니었어?
하파엘에게는 내가 몰랐던 계획이 있었다.
다음 장소까지 정해뒀을 정도로.
‘갤러리와 다리 사이에 있는 정원.’
해 질 녘 일몰로 유명한 장소라는 모양이다.
일몰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나.
결국 식사를 마친 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우리는 제2의 장소로 향했다.
‘여기인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하파엘의 말대로 일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해는 저물기 시작해 노을 진 듯한 색깔이다.
그 속에서 다시 시작됐다.
버스킹 제2부가.
나는 다시 이젤 앞에 앉아서 펜을 손에 쥐었다.
지금 그리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올 거 같았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스윽. 스윽.
역시 관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뭇 다른 분위기긴 했지만.
아까는 다 함께 공연을 즐기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다들 이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좀 더 낭만적이라고 해야 할까.
“메리 미~ 나랑 결혼해 줄래요~ ♪”
수찬쌤의 결혼식 때 선보였던 축가는 여기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연주는 사람들에게 낭만을 더해주고 있었다.
쪽.
입을 맞춘다.
젊은 연인이, 나이가 지긋하신 노부부가.
처음 버스킹을 봤을 때 연두를 벅차오르게 만들었던 그 장면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내 손도 계속해서 움직였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그에 따라 버스킹도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톡.
느껴지는 기척에 은주아일 거라 생각했다.
허나 아니었다.
“.. 소피아?”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미소를 띠며 옆에 서 있었다.
옆에는 노엘도 함께였다.
얼떨결에 인사를 주고받고 나니 소피아는 말했다.
“그림이 아름답네요.”
“감사합니다.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요.”
온화하게 웃으며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을 향해.
자연스레 나도 다시 시선을 돌려 아이들을 바라봤다.
‘행복해 보이네.’
어쩌면 소피아는 한참 전부터 이 그림을 그려왔을지도 모른다.
다시 손이 움직였다.
얼마 후에 다시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질 때, 그림은 완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