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132
제133화
회의실은 조용했다.
점심을 먹고 모인 탓이었을까.
사람들은 식곤증을 느꼈는지 대부분 졸고 있었다.
S급 헌터들도 마찬가지인지 그들도 그랬다.
알레딩 밀러, 리롄제, 막심 다닐로비치 스미르노프.
그들도 반쯤 눈이 감겨 졸았다.
뭐랄까.
괜히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
나를 제외하고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던 이는 또 있었다.
화염산 던전 조사팀의 김태석이다.
그는 한국 조사팀의 리더로서 이번 회의의 진행자로 선택됐다.
다만, 이런 큰 자리에 참석한 경험이 적은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행자이면서도 회의를 진행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기도 했다.
침만 꿀꺽 삼켜대는 꼴이 ‘졸고 있는 S급 헌터들의 신경을 깨워도 되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한 선배라도 있었다면 힘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 인간은 지금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구경꾼이나 파파라치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결계를 치고 있었다.
그나마 도움 될 만한 인물인 조주현도 그런 한 선배를 따라갔고.
“아, 참….”
문득 밀러가 앞에 놓인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댔다.
회의실에 있는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위친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어요.”
“개…!”
김태석이 대꾸하려다 삑사리를 냈다.
바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고생이 많네.
“개인적인 사정이라면… 어, 어떤 일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아침에 나오지 않기에 찾아가 보니 명상을 시작했더라고요.”
“명상…이요?”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지는 말이다.
명상 때문에 공적인 일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머릿속에 질문이 떠오른 건 나나 김태석뿐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데도 회의에 참석한 리롄제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끌끌끌.
웃는 건지 혀를 차는 건지 모를 소릴 낸 것이다.
밀러가 리롄제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해요, 미스터 리. 하지만… 나는 그의 명상을 끊을 수가 없었어요.”
“끊을 수 없었다?”
“네. 그 모습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거든요. 그건 평범한 명상이 아니었어요.”
“이해가 가지 않는군.”
리롄제의 길게 자란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에 따라,
[경고.] [세계수 어린나무가 관리인에게 경고합니다.]어제 그랬던 것처럼 새싹이가 경고를 울려댔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었다.
자리를 피하기를 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고해도 내가 자리를 피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리라.
우리 새싹이는 어쩜 이렇게 나를 잘 알까?
이구, 똑똑해라.
“설명할게요.”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인지한 밀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롄제가 기분 나빠하는 것도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위친은 명상을 하고 나면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해요.”
“……!”
리롄제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놀람과 경악이 일었음은 알 수 있었다.
영감탱이는 밀러의 말을 이해했나 본데….
아쉽게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게 대체 뭘 뜻하는 걸까.
나처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 있었고, 그들을 위해서 밀러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간단히 말하자면, 명상을 끝냈을 때 그위친은 ‘더 강해져 있을 것’이라는 소리예요.”
“무… 네?”
김태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고 싶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롄제의 수제자 리우이호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녀석의 얼굴에서는 ‘명상만으로 강해지는 게 말이 되냐’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보였다.
나도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점으로 놀랐다.
명상만으로 강해진다는 건 내게 있어 전혀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어떤 놈은 어처구니없게도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강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쓰레기를 땅에 파묻는 거로 더 강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명상을 감히 끊을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내가 놀란 점은 그위친이 지금보다 강해질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는 ‘최강의 사나이’라고 불렸다.
같은 S급 헌터인 리롄제, 스미르노프, 밀러보다도 강할 것이라는 게 세상의 평가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평을 받는 양반이….
밀러의 말에 따르면 더 강해져서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
침묵이 흐른다.
리롄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스미르노프조차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
그 때문일까.
회의실은 도저히 회의를 진행할 분위기가 아니게 되었다.
김태석은 어쩌면 좋나 하고 전전긍긍했다.
흠, 조금 도와줘 볼까.
나는 옆에 앉아 반쯤 눈을 감고 있는 태천이를 바라봤다.
톡 건드리면 알아서 내가 바라는 행동을 취할 듯했다.
“후…아아아암.”
나는 부러 크게 하품했다.
하품은 퍼져 나가는 법.
태천이도 하품했다.
역시, 예상대로다.
졸고 있었으니 하품하면 바로 리액션이 나올 줄 알았다.
“하아아아품…!”
입이 찢어질 듯 큰 하품이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모였다.
시선을 느끼며 나는 한 번 더 하품했다.
숨길 생각도 없는 꼴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한 듯했다.
리롄제만이 흥미로운 걸 봤다는 듯 빤히 쳐다봤다.
그만 좀 봐, 제발.
“후암….”
일부러 한 거였는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이거 실례. 분위기가 너무 지루해서 그만…. 잘 뻔했네요.”
“뭐야…. 회의 안 끝났어…?”
“끝나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에이 씨…. 끝나면 깨워줘….”
그러면서 태천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쯤 조는 것을 그만두고 확실하게 잠들기로 한 것이다.
어쩜 말도 안 했는데 내가 바라는 행동을 착착 취해주는 걸까.
꼭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온 것만 같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도희가 태석에게 말했다.
“시작하죠, 회의.”
“네? 아, 네! 회,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김태석이 곧바로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회의실에서는 화염산 던전 연구에 관한 회의가 시작됐다.
이 보답은 꼭 받아야겠다하아암.
아….
나도 그냥 자야겠다.
***
[며칠 동안 서울월드컵 경기장에서 있을 거야.] [난 애들이랑 베이스캠프 막사에서 대기 중이고.] [한 선배는 열심히 결계 치는 중]유재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낮에 있었던 회의의 결과였다.
네 나라는 동시에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한국은 동쪽, 미국은 서쪽, 중국은 남쪽, 러시아는 북쪽.
[알았어. 바로 준비할게.]그 문자를 확인한 후 화면을 전환했다.
어린나무 상태가 된 새싹이와 엘프들이 떠올랐다.
화면 속 엘프들은 돼지 통구이를 먹고 있었다.
맛있겠는데.
몰래 들러서 같이 먹고 올까….
“저….”
김태석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오른편에 있는 태천이었다.
시선이 태천이를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방금 러시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러시아요? 설마….”
“네. 스미르노프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아, 씨발….”
태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얘 왜 이래?
[세계수 어린나무가 욕설을 듣고 당황합니다.]앗….
우리 새싹이 귀 막아.
[어린나무는 자신은 귀가 없다고 전합니다.]아, 맞다.
“…뭐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
“후우. 차라리 있었으면 좋았겠다.”
뭔 소리래.
나는 왼편에 앉은 도희를 쳐다봤다.
도희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태천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그 새끼 꿀 처먹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어.”
“뭐야, 만찬장에서도 그랬어?”
“어. 그렇다니까.”
“얼씨구…?”
태천이는 스미르노프가 차 타고 오는 동안 쳐다보기만 했다고 말했다.
만찬회에서는 다를 거로 생각해 자리를 피해줬었는데….
아니, 대화를 안 나눌 거면 자리 피해준 의미가 없잖아.
그 덕에 쉬고 있던 그위친을 만나긴 했다만….
“도희는 밀러랑 사이좋게 떠드는데 그 새끼는 나 먹는 거만 쳐다봤다니까? 계속! 와, 소름이 다 끼치더구만.”
“허…. 그럴 만하네.”
나 같아도 바로 옆에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칠 거 같다.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면 왜 자꾸 찾아오는 거람?
동물원 동물도 아니고 구경하는 게 목적인 건가.
“나 없다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 하하….”
김태석은 당황한 낯으로 웃기만 했다.
안 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거다.
“되겠냐? 스미르노프인데. 만나고 와.”
“아오.”
태천은 도희를 바라봤다.
도와달라는 시선이었지만….
도희에게선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나고 와요.”
“빌어먹을….”
“오늘은 쳐다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김태석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전달한 사람이 러시아 통역사였어요.”
“통역사?”
“네. 같이 온다고 하더군요.”
“오.”
태천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김태석의 말마따나 쳐다만 보고 있지는 않을 모양이다.
어제 만찬회에서 쳐다만 보고 있던 건 옆에 도희와 밀러가 있어서였나?
자리를 피하자고 말하면 됐을 것을….
미련한 구석이 있는 양반일세.
“좋아. 무슨 얘길 하나 한번 볼까.”
“대화 잘 하고 와.”
“그래.”
“이상한 말로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뭐래. 내가 너냐? 난 분위기 파악 잘하거든?”
“…….”
음. 할 말이 없는걸.
확실히, 태천이가 나보단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알았다.
비교 대상이 나라는 것부터 이미 글러 먹은 거지만.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말에 동의합니다.]아니, 그걸 동의하면 안 되지.
“다녀올게.”
“오냐.”
“다녀오세요.”
태천이를 배웅하며 도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김태석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응?”
“전화 왔어요.”
“전화? 아.”
손에 들린 스마트폰은 진동하지 않았다.
검은 화면에 발신자의 이름만 떠오를 뿐이다.
회의할 때 매너모드로 전환해 놓은 것을 깜빡했다.
진동 모드로 바꾸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백도운. 지금 나올 수 있어? 우리 정문 앞에 도착했는데.
“도착…? 어라, 직접 왔어?”
– 배송비 내기 아까워서.
“…….”
배송비….
하긴, 이곳과 재이네 대장간이 가깝기는 하다.
김태석은 달리기로 금방 왔다 갔다 했을 정도다.
그것도 정장을 입은 채로.
“금방 나갈게.”
– 오케이.
전화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도희도 일어섰다.
“…왜 일어나?”
“오라버니는요?”
“잠깐 정문 쪽에. 아는 사람이 와서.”
“어머.”
어머?
어머어?
뭐지, 이 억지로 쥐어 짠듯한 연기 톤은?
“지인분이면 소개해줘요.”
경고! 경고!
갑자기 새싹이가 그런 메시지를 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동자를 살짝 돌려보지만, 시야엔 새로운 메시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직감이 울려댄 거였다.
“오라버니?”
“…….”
대체 뭘까.
이 뱀이 내 몸을 옭아매는 듯한 께름칙한 기분은.
“좋아, 같이 가자.”
라고 말하는 순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그냥 아는 대장장이야.”
“아는 대장장이…요.”
거기서 왜 목소리가 낮아지는 거니.
헌터가 대장장이 만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네? 어머. 나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요?”
“…….”
와….
얘 봐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네?
2년 전엔 거짓말을 하면 다 티가 났었는데….
귀가 붉어지고 말을 더듬는 식으로.
어디 갔니, 2년 전 도희야.
보고 싶다.
“…방패 배달 온 거야, 방패.”
“아.”
“기억나지? 태천이 방패.”
“네. 기억나요.”
“그거 배달 온 것뿐이야. 금방 다녀올게.”
“그래도….”
“도희 님.”
어느새 김태석이 다가왔다.
어라.
이거 혹시….
도희의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말하지 마요.”
“…죄송합니다.”
“하지 말라니깐?”
“밀러가… 곧 올 겁니다.”
“하아….”
도희가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사이좋게 대화를 나눴다더니….
표정을 보아하니 태천이가 착각한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도희는 상사에게 붙잡힌 부하 직원의 기분으로 밀러를 대했던 것 같다.
뭐, 나한테는 잘된 일이다.
도희가 날 따라나서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나 없다고 하면-”
“응. 안 돼. 태천이 보고 스미르노프 만나고 오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아….”
도희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앉았다.
좋아, 지금이다.
“다녀올게!”
“…….”
나는 해맑게 인사를 한 후 베이스캠프 막사를 빠져나갔다.
도희가 날 빤히 쳐다보긴 했지만, 곧 손님이 올 예정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요, 밀러!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베이스캠프를 빠져나온 순간,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유재이가 보낸 문자였다.
[서두를 수 있어? 여기 좀 귀찮아졌는데.]응? 귀찮아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