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452
제453화
투명한 벽이 사라졌다.
고정된 시간이 풀린 것이다.
나와 같은 마나의 흐름을 느낀 무기가 번개를 뿜어냈다.
들끓는 어둠이 검은 태양처럼 변한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도운아, 태천아.”
아줌마가 우리를 불렀다.
평소라면 “이따가 말해요”라고 말하고 올라갔겠지만, 그녀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마녀였다.
이 타이밍에 우리를 불렀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무기도 그리 생각했는지 번개를 뿜어낸 채로 가만히 있었다.
우리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너희는… 선구자(先驅者)가 뭐라고 생각해?”
“어….”
“몰라요.”
태천이의 생각을 끊어내며 대답한다.
사전적 의미는 안다.
어떤 일이나 사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사람이란 뜻이지 않나.
하지만 아줌마가 말한, 한진환이 될 선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 말하기는 좀 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인간은 선구자 같은 거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바돈의 무저갱에서 빠져나올 뇌제를… 똑바로 봐줘.”
“네?”
“그가 너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줄 테니까. 알았지?”
“……?”
나아가야 할 길?
한진환이 우리에게 무슨 길을 보여준다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할 말은 그게 다예요?”
“응. 이게 전부야.”
“…그래요, 그럼.”
따로 되묻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후 태천이와 함께 검은 태양이 떠 있는 곳으로 갔다.
한 번 들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면, 계속 고민해봐도 이해하지 못한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고찰한다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멈춰 서서 고민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였으니까.
“빠른데?”
“응?”
“저길 봐.”
태천이가 가리킨 검은 태양 앞엔 윤건과 최동훈이 있었다.
역시… 그들도 우리처럼 고정 시간대가 풀리는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나 보다.
아까워라.
아줌마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우리가 먼저 도착했을 텐데.
[세계수가 순수한 마나들을 느꼈습니다.]아쉬움을 느끼는 가운데, 새싹이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순수한 마나들의 주인은 당연히 윤건과 최동훈이었다.
최동훈이 지팡이로 검은 태양을 건드리는 동안, 윤건이 붉은 화염구를 만들어냈다.
온 마나가 담긴 덕분일까?
붉은 화염구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느껴졌다.
“과연 윤건 아저씨야. 화력이 엄청난데?”
“그래 봤자지. 마족의 힘은 저 양반이 어쩔 수 있는 게-”
“되는데?”
“뭐?”
“불태우고 있잖아.”
“…얼씨구?”
입에서 당황스러움이 튀어나왔다.
태천이 말마따나 윤건이 만든 화염구가 크라우드의 검은 태양을 집어삼키며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검은 태양을 집어삼킨 덕분인지 이젠 작은 태양이 아니라 완전한 태양처럼 보일 정도로 커졌다.
저게 왜 되는 거지?
저 화염구가 세계수의 마나로 구성된 것도 아닐 텐데.
[세계수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전합니다.] [첫 번째 이유가 주된 이유인데, 관찰 결과 검은 구체는 쓰다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찌꺼기?
아, 마족의 힘이 얼마 담기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런 거라면 윤건의 화염으로도 태울 수 있긴 하겠네.
두 번째 이유는 뭐야?
[세계수는 두 번째 이유는 관리인 덕분이라고 전합니다.]나?
내가 뭘 했다고?
[세계수는 얼마 전에 관리인이 윤건의 몸을 정화하지 않았냐고 전합니다.] [현재 윤건의 몸엔 관리인의 마나가 아주 조금 녹아 들어있으며, 그 덕분에 찌꺼기를 수월하게 불태울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오, 그런 거구나.
생각지도 못한 우연이네.
덕분에 나서지 않고 편해졌으니 잘 됐는걸.
“…왔나.”
“늦었군그래.”
두 중년 남자가 다가온 우리를 돌아봤다.
표정에서 의아함이 느껴졌는데, 태천이도 그걸 느꼈는지 윤건에게 물었다.
“왜 그래요?”
“저길 봐라.”
윤건이 활활 타오르는 붉은 태양을 가리켰다.
마족의 힘으로 모여 있던 검은 구체는 형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젠 윤건의 불의 마나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 대단하시네요.”
“뭐라고?”
윤건이 바로 되물었다.
이어 황당한 얼굴로 태천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째서 “대단하시네요”라는 대답이 나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최동훈이 윤건의 말을 풀어서 설명했다.
“천공. 이 녀석은, 지금 저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다.”
“아. 그렇군…요.”
태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게 마지막에 ‘요’를 붙인 건, 최동훈과 서로 견제했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우리도 그렇고 놈도 그렇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을지도 모른다.
“…….”
최동훈은 윤건과 똑같은 얼굴을 짓고는 날 쳐다봤다.
지금 네 친구가 내 말을 이해한 게 맞나?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을 보고 참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태천이가 멍청하긴 해도 말을 전혀 못 알아듣지는 않는데 말이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것은, 그저 한진환이 그곳에 없으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 선배는 무저갱이란 곳에 가 있을 거야.”
“무저갱? 그게 뭐지?”
“봉인 마법이야. 날 가둬두기 위해서 준비한 거라나.”
“아, 그런 거였나….”
내 설명에 최동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세계수 관리인이란 것도 알고, 크라우드가 마족 권속이란 것도 알고 있으니 날 노릴 만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가둬두려는 목적은 모를,
“즉. 크라우드의 목적은 블랙 드래곤 토벌을 방해하려는 것이었군그래.”
-줄 알았는데, 아네?
어떻게 알았지?
현재 블랙 드래곤 토벌에 관한 정보는 아는 사람만 아는 대외비다.
최동훈이 대형 길드의 마스터라고 해도 이런 정보를 직접 전해 들었을 리는 없었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몰래 빼냈다고 보는 게 옳겠지.
“무슨 소리지? 블랙 드래곤이라니?”
“백도운 네가 가장 큰 방해가 될 테니 치워 버리려고 했던 거야….”
최동훈은 질문하는 윤건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했다.
“그걸 어떤 이유로 알아차린 한진환이 도중에 끼어든 것일 테고…. 그럼 그 투명한 벽을 준비한 건 한진환인 건가?”
준비했다고 해야 할지, 당했다고 해야 할지….
그 때문에 그가 위험에 빠지게 됐지만, 반대로 그것 덕분에 내가 무사할 수 있었다.
준비했다고 봐도 괜찮겠지?
“…비슷해.”
“놀라운데. 그런 마법은 처음 봤다. 아니, 마법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한진환이 대체 누굴 불러온 거지?”
“…….”
“우리 사이에 비밀-”
“닥쳐라, 약골. 그딴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단 말이다.”
화륵!
윤건이 최동훈의 입을 향해 불을 뿜었다.
고개를 숙여 불을 피한 최동훈이 반격하고자 지팡이에 마나를 모았지만, 윤건은 이미 그가 아니라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백도운. 뇌제는 언제 돌아오는 거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걸요.”
간단히 대답한 후 붉은 화염구를 바라봤다.
화염구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나 아까와 다른 확실한 차이가 눈에 띄었다.
태양의 흑점처럼 까만 부분이 발생한 것이다.
[세계수가 혐오스러운 기운을 느꼈습니다.]조금씩 크기를 키워나가는 흑점은 마족의 마나였다.
즉, 아바돈의 무저갱에서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
온통 어둠뿐이었다.
앞뒤 좌우 위아래.
한진환의 두 눈이 어디를 향하든 완연한 어둠만이 보였다.
우르르…!
그곳에서 밝은 것이라곤 그의 손에 쥐어진, 한국 전체에 펼쳤던 결계를 응축한 번개구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해골의 음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뇌제…. 그분의 무저갱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는 동시에 한진환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추락은 어떠한 힘이 위에서부터 짓눌러서 떨어지는 감각과는 달랐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에 발목을 붙잡혀 가라앉는, 그런 감각이었다.
그 손아귀의 정체가 무엇일지는 뻔했다.
무저갱(無底坑).
바닥이 없는 구렁텅이.
그곳은 두 발로 오롯이 서 있는 자를 용납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끝없이 떨어지고 하릴없이 낙하하고 영원히 추락해야만 하는, 부조리로 가득 찬 장소였다.
그 순간,
“하…!”
한진환은 이곳의 본질을 깨달았다.
크라우드의 목적이 세상을 정복(征服)하는 데에 있지 않고, 전복(顚覆)하는 데 있는 이유도 알았다.
그 모든 것은 이 바닥 없는 곳의 추락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스마트폰 게임을 놓지 않는 나사 빠진 후배가 이따위 놈들에게 절대로 패배할 리가 없다는 것을.
설령 한진환 그가 없다고 해도.
“이제야 알겠네….”
한진환은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사과 크기의 번개의 구가 우르르 소리를 내며 푸른 빛을 뿜었다.
한국 전체에 펼쳤던 결계가 응축된 만큼 번개구엔 엄청나게 방대한 마나가 들어 있었다.
“알겠다?”
어둠에서 해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때가 되니, 드디어 네놈이 그릇된 판단을 해왔음을 깨달은 것이냐?”
“네 소망 따위 들어줄 생각 없어, 등신아.”
한진환이 코웃음 치며 반박했다.
그가 알겠다고 중얼거린 것은 그가 지금까지 한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겠다고 한 것은….
“미래를 알지 못했을 내가 왜 이 선택을 했었는지야.”
“이 선택…?”
“어차피 마지막이니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거였어. 백도운에게.”
“뭘, 말이냐…?”
“후후….”
한진환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백도운.
그 이름 석 자가 나오자마자 해골의 목소리엔 불안함과 불길함이 깃들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으나 꺼림칙함에서 출발하기는 했다.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저러니, 그의 꽁지머리 후배는 싸우지 않고서도 이기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해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버스트 모드에 다음 단계가 있다는 거.”
“버스트 모드…? 그딴 걸 왜 백도운에게 보여준단 말이냐?”
“헐. 너 설마 몰랐냐?”
“……?”
“내 버스트 모드랑 백도운의 광합성 모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결이 같거든.”
“뭐라고…?”
해골의 말 어미가 늘어졌다.
한진환의 “결이 같은 스킬”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쯧쯧….”
한진환은 혀를 두어 번 찬 후에 여유롭게 설명을 덧붙였다.
“즉. 너희가 죽고 못 사는 백도운의 광합성 모드엔 다음 단계가 있다는 뜻이야.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고. 미래의 나는.”
“…거짓말하지 마라! 그런 게 있다면, 왜 진즉에 보여주지 않고 인제야 보여주려고 한단 말이냐!”
“실패하면 죽으니까.”
“……!”
“그래서 이론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건데…. 난 이제 죽네?”
한진환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꺼릴 것 없이 행동하는 모습에서 해골은 그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은 듯 외쳤다.
“막아라! 모두 저놈이 허튼짓하지 못하게 막으란 말이다!”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어둠에서부터 손들이 튀어나왔다.
총 여덟 개의 손이 한진환을 붙들기 위해 빠르게 다가왔지만,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남자를 붙잡기엔 턱없이 느렸다.
설령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래로 낙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쾅!
벼락이 내리친 사이 한진환은 번개구를 자기 가슴에 박아 넣었다.
우르르 쾅!
가슴에 박힌 번개가 폭발하듯이 뿜어져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버스트 모드를 쓴 것과 유사한 모습이었으나 마나의 흐름이 전혀 달랐다.
한진환의 몸을 휘감았던 번개가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흐르고 스며들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느다란 마나 회로에 이르렀다.
“안 돼… 안 돼…!”
해골이 크게 부르짖는다.
버스트 모드는 몸에 번개가 둘린 듯한 흐름을 보여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석구석 스며드는 흐름을 보이니, 해골은 한진환의 말이 그저 허세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골이 인정한 것을 알아챈 한진환은 나직하게 말했다.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