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478
제480화
끼익….
문고리를 붙들려고 손을 뻗는데 호텔방문이 열렸다.
알레딩 밀러가 마법으로 먼저 열어준 것이었다.
뻗었던 손을 거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끼익, 탁.
문이 다시 닫히는 동안, 나는 호텔 소파에 반쯤 드러눕다시피 앉은 밀러를 발견했다.
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울적함이 느껴졌다.
옆 테이블엔 그녀의 울적한 마음을 따라낸 듯 황금빛 위스키가 담긴 얼음 잔이 놓여 있었다.
병과 잔에 따라진 양을 대충 가늠하니 그녀가 위스키를 입에도 데지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마시려고 따라놓은 게 아닌가?
“어서 와요, 미스터 백….”
밀러가 축 처진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혹시 울고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표정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좋지 못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세계수는 밀러가 슬퍼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후회와 그리움도 함께 느껴진다고 덧붙입니다.]새싹이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이내 깨달았다.
후회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슬픔을 느끼는 이유….
그녀는 한진환의 부고를 이제야 전해 들은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그녀가 아니라 대리인을 통해 한진환의 명복(冥福)을 빈다 싶더라니.
“…….”
일리스가 오른팔을 치료하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다.
앨릭스 협회장이 밀러에게 전달될 부고를 통제했을 테니까.
과연 그 사실을 오늘 깨닫게 된 밀러가 그를 가만 내버려 뒀을까?
절대로 그럴 리 없었다.
밀러는 앨릭스 협회장을 공격했을 것이고, 그 공격을 일리스가 막아내다가 다쳤으리라.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갸웃거립니다.] [막아낸 것과 치료하지 않은 것은 무슨 상관이냐고 질문합니다.]시위하는 거지.
고래들이 싸우면 새우 등만 터지게 될 뿐이니 싸우지 말라고.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아, 실례.”
바로 밀러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날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내가 최희석도 아닌데, 내게 “고인의 명복은 빕니다.”라는 말을 하기엔 적절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 말도 사실 최희석이 해줘야 했으리라.
“한 선배는 잘 갔어요.”
“…미안해요. 그위친의 숲에 있었던 탓에 알지 못했어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셔.”
한진환의 말투를 빌려 대답했다.
밀러의 눈이 살짝 커진다.
“-라고, 한 선배라면 말했을 겁니다.”
“…….”
놀라서 커졌던 눈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아마 그녀의 머릿속엔 한진환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이어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앨릭스 협회장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대체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던 건지….
밀러는 그위친의 숲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새싹이도 내가 느낀 분위기에 동의했다.
[세계수가 밀러를 관찰합니다.] [현재 밀러는 전에 봤을 때보다 2배 가까이 강해진 것 같다고 관찰 결과를 설명합니다.]2배 가까이, 라….
사실 나는 그녀를 S급 헌터 중 하위권에 해당할 거라고 넘겨짚었다.
하지만 지금 밀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리우이호쯤은 가볍게 이길 것 같다.
스미르노프와 싸워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듯하고….
물론 다른 두 사람도 마냥 놀고 있진 않았을 테니, 내 예상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그걸 가정해두고서도 밀러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대단했다.
아무래도 그위친은 ‘천재는 좋은 스승일 수 없다’라는 말을 보기 좋게 깨부순 모양이다.
하여간 대단한 인간… 아니, 정령이라니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밀러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 시간 동안 크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잘됐네. 한 선배도 그걸 더 좋아할 거예요.”
“후….”
밀러가 한숨 같은 쓴웃음을 흘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달리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다.
한진환이라면 내 말처럼 좋아했을 테니까.
“…자.”
인사는 이 정도로 됐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블랙 드래곤의 마법 봉인….”
“…….”
“파훼할 수 있겠어요?”
“…아쉽게도, 찾아내지 못했어요.”
밀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찾아내지 못했다, 라….
그위친과 함께 연구했는데도 실패했단 소리다.
이것 참 아쉽게 됐는걸.
아무리 크게 성장했다고 한들 그녀는 마법사다.
마법을 봉인하는 능력이 있는 블랙 드래곤과 싸우기엔 상성이 좋지 못하다.
어떤 마법을 쓰든 봉인 당해버릴 테니까.
“할 수 없네요. 이번 토벌에서, 밀러 씨는 딜러가 아니라 후방 지원을… 응?”
-라고, 말할 때였다.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갸웃거립니다.]어째서인지 밀러의 얼굴이 밝다.
파훼법을 찾지 못한 이의 분함과 아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래?
설마 자포자기한 건 아닐 테고….
“밀러?”
“대신.”
대신?
“저는 그위친과 함께 ‘다른 해결책’을 마련했어요.”
“해결책을 마련했다고요?”
“네.”
밀러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그위친과 함께 어떤 해결책을 마련했기에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까.
궁금한 마음이 샘솟아 얼른 그녀에게 물었다.
“그 해결책이란 게 뭔데요?”
“그건 말이죠….”
서두를 던진 밀러가 말을 잇지 않고 후후 웃는다.
장난스럽게 뜸을 들이는 모습이 참 얄미웠다.
방금까지 한진환을 함께 떠나보내지 못한 일로 쓸쓸함을 느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
이어진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만했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새싹이도 그랬다.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천천히 주억거립니다.] [이어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긍정합니다.]그녀가 그위친과 함께 마련해왔다던 해결책은 정말로 괜찮은 것이었다.
아니, 새싹이가 훌륭하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 그저 괜찮고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훌륭한데요? 그 해결책?”
“미스터 백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새싹이도 그거라면 블랙 드래곤에게도 통할 거라네요.”
“아아…! 역시, 역시 그위친은 대단해요…!”
내 말을 듣자마자 밀러는 그위친을 찬양(讚揚)했다.
하지만 난 그 찬양에 100%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그위친이 낸 아이디어를 블랙 드래곤에게 통할 만큼의 해결책으로 구현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기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이건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그녀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리라.
다른 마법사였다면 같은 아이디어를 들었어도 해내지 못했겠지.
언감생심 시도해 볼 생각조차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난 그녀에게 칭찬을 전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밀러.”
“음, 고마워요….”
밀러가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굉장한 일을 해낸 사람이 지을 얼굴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겸손했다.
저 겸손한 얼굴로 블랙 드래곤을 당황에 빠뜨릴 것을 상상하니….
절로 즐거워졌다.
어서 빨리 당혹스러워하는 놈의 면상을 망막에 새기고 싶었다.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끄덕입니다.] [부푼 기대감으로 꽃들이 더욱 만개합니다.]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 새싹이도 똑같았다.
***
게이트로 들어가기 하루 전.
리롄제가 아침 9시쯤 제자들을 이끌고 베르동 협곡에 도착했다.
왜 하필 아침에 오고 난리일까.
어제 밤늦게까지 태천이와 ‘프랑스 코스 요리’를 수차례 섭렵한 탓에 잠이나 자고 싶었는데 말이다.
물론, 원래 내 성격상 리롄제 일행이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잠을 청할 수도 있었다.
도희와 한재임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계속 눈을 흘겨대지만 않았다면 그랬으리라.
“내가 잠을 깨웠나 보군…?”
호텔 앞에서 마주한 리롄제가 짐짓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히 걱정하는 목소리건만, 왜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내 심보가 고약해서?
아니, 그건 아닐 거다.
리롄제는 나보다 더 심보가 고약한 양반이니까.
능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릴 수 있는 인간이다, 저 영감은.
[세계수가 나뭇가지로 긁적입니다.] [관리인의 “나보다 더 심보가 고약하다”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객관적인 판단을 전합니다.] [이어 관리인은 관리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씨가 더 곱지 못하다고 덧붙입니다.]…내가 느끼는 게 맞겠지.
새싹이의 메시지를 못 본 척 무시했다.
객관적인 판단이 다 뭔가?
나는 주관적인 판단을 하리라!
새삼스럽게 마음을 다잡던 순간, 내 옆에 서 있던 태천이가 넉살 좋게 웃었다.
“프랑스에 맛있는 요리가 너무 많더라고요. 그거 먹느라 늦게 자버렸지 뭡니까? 하하…!”
“음. 그런가? 내겐 너무 느끼하던데…. 요리는 자고로 중국요리 아니겠나?”
“그렇죠. 중국요리도 굉장히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불맛이라고 해야 하나? 전 그 고유한 향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가?”
“네!”
“그리 생각하다니, 중국인으로서 기쁘군. 허허, 허허허….”
리롄제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연신 헛웃음을 흘려댔다.
저 영감은 비아냥거리려고 한 말이었으나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 태천이는 바로 동의했다.
기가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만도 했다.
태천이의 순수함을 처음 봤기 때문일까?
진 씨 남매를 포함한 리롄제의 제자들이 황당한 얼굴로 태천이를 바라봤다.
우리 태천이가 사람 당황하게 하는 재주가 좀 있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세계수가 불순한 의지가 담긴 마나의 흐름을 감지합니다.] [또한, 그 마나는 순수하고 완전하다고 설명합니다.]미세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다.
그 흐름을, 나와 새싹이를 제외하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태천이까지도.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
“…….”
나와 리롄제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10초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하나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이들이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어 이 쓸데없는 기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그들의 호기심은 충족되지 못할 터였다.
내가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
슥….
검지를 들어 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내 검지로 향하지만, 리롄제의 두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계수의 춤.”
스킬을 썼다.
뿅!
검지 위에 새싹이가 이파리 두 장밖에 없는 새싹 형태로 자라났다.
그러고는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겸사겸사 푸른 빛도 좀 흩뿌리고.
[세계수의 춤이 도발에 성공했습니다!] [도발에 걸린 모든 이들의 신체 능력이 소폭 하락합니다.]곧이어 도발에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전투 중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싹이 형상을 공격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허허허…!”
황당한 얼굴을 하는 제자들 앞에 선 리롄제가 얼떨떨한 웃음을 웃는 게 다였다.
그렇게 몇 초간 웃었을까?
리롄제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이 되더니 중얼거렸다.
“참 재미없는 놈이로고….”
“내가 누군가 웃게 하는 재주가 없긴 하죠.”
“열 뻗치게 하는 재주는 있지만요.”
“하하하! 과연 그 말대로군!”
도희가 끼어들어 덧붙이자, 리롄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능구렁이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호쾌한 척하기는….
“끌끌…. 그럼 이따 보자꾸나.”
그리 말하고는 리롄제는 인사할 새도 없이 바로 떠났다.
제자들이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운 듯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그냥 떠나갔다.
얼마나 쥐어박아 댔으면 저렇게까지 눈치를 살필까.
“쯧쯧쯧….”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세계수의 춤이 끝났다.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열정적으로 추던 새싹이의 형상이 푸르스름하게 스러졌다.
[세계수가 개운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