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earned alchemy RAW novel - Chapter 31
31화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학생들이 쉬는 주말이건만 황성고등학교 정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 있어요~ 시계 있어요~”
“시험 잘 쳐라!”
“파이팅!”
시험 때마다 기가 막히게 찾아오는 잡상인과 누군가를 응원하는 소리가 뒤엉켰다.
거기다 정문 앞에는 카메라를 쳐다 보며 대사 연습을 하고 있는 기자 한 명까지 보였다.
민환 역시 이들과 같은 이유로 여기, 황성고등학교를 찾았다.
민환은 정문에 붙은 대자보를 읽으며 가방을 여며 맸다.
“후우. 떨린다.”
한숨을 뱉으며 제멋대로 쿵쾅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시도했지만, 가방 끝을 쥐고 있는 손에는 땀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지금까지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번엔 결과가 나올거야.”
수겸은 민환의 팔을 주먹으로 툭 치며 응원했다.
그런 수겸 옆에는 민환의 엄마, 한윤희가 두 눈을 꼭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엄마. 기도 그만해. 그 분이 내 정답지를 바꿔줄 순 없을거야.”
한윤희는 모태신앙이 기독교였지만, 민환은 철저히 무신론자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널 지켜주실거야. 엄마는 믿어.”
“에휴. 이번이 마지막이야 엄마. 진짜로 합격해서 엄마한테 못 했던 효도도 하고 할게. 믿지?”
“응. 엄마는 우리 아들 믿지. 화이팅!”
수겸은 그런 모습을 말 없이 보고만 있었다.
“야, 와 줘서 고맙다. 요새 바쁜 것 같던데. 오늘 시험 끝내고 저녁에 한잔 하자?”
굳은 표정의 수겸을 보며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민환이 술잔을 뒤로 넘기는 시늉을 했다.
“한잔 해야지. 1년에 몇 번 없는 맘 편히 술 먹을 수 있는 날 아니냐. 긴장은 좀 풀린 것 같다?”
“어. 역시 말을 하니까 좀 풀리네.”
민환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고는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무언갈 찾는 모양이었다.
‘오케이. 잘 챙겼네.’
맨들맨들한 유리 병을 만지니 조금 남아있던 긴장감이 바람에 날아가듯 후욱 사라졌다.
‘빠뜨린 건 없다. 이제 시험만, 시험만 무사히 잘 치면 돼.’
민환은 어제까지 시험을 준비하던 때를 떠올렸다.
사실 수험생에게 제일 중요하다는 시험 전 마지막 3일동안 민환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문제집을 풀거나 오답노트를 읽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장에서 물은 먹을 수 있겠지만, 시험을 치는 중에는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약을 빼먹는건 아마 힘들지도 몰라.’
그게 문제였다.
약효는 11분정도인데 반해, 시험시간은 100분. 5개 과목을 한번에 모두 풀어내야 한다.
물론 집에서 테스트했을 때 쉬운 과목은 10분이면 거의 한번 풀어낼 정도였지만, 이제는 실전이 아닌가.
한번 다 풀었다고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중간에 3번, 어쩌면 그 이상 약을 먹고 약효를 유지해야 했다.
민환은 방에 앉아 골똘히 연구했다.
‘잘게 쪼개서 몰래 조금씩 먹는다면 어떨까?’
실험 결과 약효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한번에 한 알을 먹는 것보다는 약효가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몸을 뒤로 젖히고 방바닥을 발로 차 의자를 뱅글 뱅글 돌렸다.
“으아아. 모르겠다.”
한참을 멍하니 의자에 앉은 채 빙빙 돌다가 문득 목이 말라 부엌을 향했다.
엄마가 없을 땐 컵에 따르지 않고 통째로 물을 마시는 것이 국룰.
벌컥벌컥.
물통에 입을 대고 시원한 냉수를 들이키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
흡사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을 때처럼 민환이 물을 먹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순간 소리를 질렀다.
민환은 그 길로 컵 하나를 집어 들고 마시고 있던 물통까지 챙겨 방 안에 들어왔다.
컵에 물을 따르다가 시선만 살짝 옮겨 책상 위에 올려진 유리 병 속 환약의 크기를 가늠했다.
‘약이 전부 잠길 정도만. 이정도면?’
유리 병을 열어 약 하나를 꺼내 컵 속에 퐁당 떨어뜨렸다.
“호오. 신기한데.”
젓가락으로 좀 휘저어야 녹으려나 싶었는데 약은 물에 닿자마자 원래 이렇게 먹는거라는 듯 사르르 녹아 금새 형체가 없어졌다.
이제 시음 차례였다. 민환은 휴대폰 화면 속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7분.
벌컥 벌컥.
약을 녹인 물을 시원하게 마시자마자 약효는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안개가 가득 낀 길을 걷다가 순식간에 확 걷힌 것처럼.
뿌옇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무엇을 하든 다 할 수 있을거야.’
민환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고양된 자신감을 만끽했다.
높아진 자신감만큼 민환 본인의 존재 자체가 커진 것 같았다. 마치 거인이 되어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기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죄다 짖뭉개버릴 수 있을 것 같아. 날 깔보고 무시했던 놈들 전부. 어디 나와보라지.’
“하하하.”
약효에 심취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민환의 세상이 작아졌다. 쪼그라 들기 시작했다.
밝았던 시야는 다시 뿌옇게 되고, 세상은 안개 천지가 되었다.
‘아, 벌써 끝인가.’
민환은 다시 휴대폰 속 시계를 봤다.
11시 37분.
약효는 10분이었다. 기존보다 지속시간이 1분이 줄었지만 이정도면 성공이다.
‘시험 중에 물 먹는 것 정도는 누가 제지하겠어?’
이제 준비가 끝났다.
민환은 회상을 하면서 시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들! 화이팅!”
“야, 잘쳐라.”
애정이 듬뿍 담긴 엄마의 응원과 무미건조한 수겸의 응원을 뒤로 한 채.
***
“조금 빨리 왔나?”
시험실 입실 제한시간은 9시 20분. 지금은 8시 20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민환이 시험을 치를 3학년 2반. 19번 시험장 중 절반은 찬 상태였다.
민환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억지로라도 한 글자라도 더 보기 위해 준비해 온 오답노트를 읽고 있었다.
그 때 누가 민환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야, 최민환!”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함께 공무원 학원을 다녔던 이영수였다.
이영수. 지난 번 민환의 멘탈을 털어버린 장본인이었다.
‘약 도둑 새끼.’
감정 정리가 되지 않은 민환은 이영수를 아니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뭐?”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었지만, 눈 앞에서 말 거는 사람을 무시하는 건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일.
“너, 너 왜 전화도 안받고 메세지로 안 보는거야?”
“어쩌라고. 내 맘이지.”
물어보는 이영수도, 대답하는 민환도 왜 이런 대화를 나누는지 알고 있는 상황.
주어만 빼놓은 대화가 시작됐다.
“너 혹시 그거 있어?”
“뭐?”
민환은 일부러 더 단답으로 응했다.
“왜 모른 척 해. 알잖아 내가 멀 묻는건지. 제발 나 하나만 주라. 전에는 내가 미안해. 사과할게.”
이영수는 울음이라도 터뜨릴 기세였다.
“아 시발. 뭐라는거야. 꺼져. 바쁘니까.”
오히려 사과를 받으니까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서 욕이 나왔다.
“그러지말고. 민환아 우리 같이 공부한 게 몇 년이냐. 네가 준 그, 그거만 있으면 나도 이번엔 합격할 수 있어. 제발.”
“없어.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네 자리로 가서 한 글자라도 더 봐.”
민환이 소리쳤다.
이제는 교실에 있는 수험생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의자를 거칠게 뒤로 빼서 민환은 교실 밖 복도로 나왔다.
“새끼야. 나와.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러면 하나 주는거야? 고마워.”
“뭐래? 내가 없다고 했지. 그러니까 꺼지라고. 나와.”
민환은 이영수의 팔을 잡아 끌며 앞으로 밀쳤다.
“아야. 아프잖아!”
바닥에 내팽개쳐진 이영수가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무릎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민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미, 미안.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손까지 내밀어서 일으켜 줄 생각은 없었는지 민환은 어설픈 사과를 하고는 곧장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진.
“살게.”
“뭐?”
민환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되물었다.
“내가 산다고. 바로 이체 해줄게.”
이영수가 비뚤어진 안경을 다시 매만지며 일어섰다.
민환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금 학교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소란에 일일이 반응할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지도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둘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사태가 진정되는 것 같자 이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얼마면 나한테 줄래?”
이영수는 민환이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여유를 가지고 대화에 임했다.
실제로 민환은 처음 생각과 달리 하나쯤은 팔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여분 약도 챙겨오긴 했으니까. 수겸이한테는 미안하다고 하고 오늘 밥이나 한번 사면 되지 않을까?’
둘은 복도 한 켠에 비켜 서서 협상을 시작했다.
먼저 이영수가 간사한 목소리로 제시를 했다.
“10만원 줄게. 딱 한 알에.”
“한 알?”
민환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한 알을 먹어봐야 얼마나 간다고 그러는거지.’
“너도 알잖아. 나 영어만 잘 치면 되는거. 딱 그때 먹을 것만 있으면 시험은 그냥 합격이야. 그 날 네 가방에서 꺼낸 약 먹고 난생 처음으로 영어 과목에서 합격 점수를 넘겼다고!”
이영수는 민환이 고개를 갸우뚱한 이유를 안다는 듯 왜 본인이 하나만 필요한지 설명했다.
‘하긴 이 새끼 영어만 더럽게 못하긴 했지. 근데 이 상황에서 10만원은 너무 적지 않나 싶은데.’
민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영수의 설명을 들었지만, 금액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았다.
“10만원은 너무 적지 않냐? 인간적으로 전에 학원에서 네가 가져간 것도 있는데 말이야.”
“그 때는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어? 치사하게 이럴거야?”
“어, 치사하게 그럴거야.”
어차피 아쉬운 건 이영수였다.
“20만원.”
이영수가 마지못해 베팅 금액을 높였다.
“네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단돈 20만원에 사겠다고? 양심 없냐?”
이영수가 금액을 올린다는 건 일단 협상의 저울이 민환에게로 기울었다는 뜻. 민환은 이왕 삥뜯기로 한 것 제대로 하기로 했다.
“시발. 이럴거야?”
참다 못해 이영수가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더 비싸질텐데. 시끄럽게 하지마. 귀 아프니까.”
그 때였다.
둘과 같은 학원의 수강생이었던 이들 셋이 어느새 소문을 들었는지 민환을 찾아왔다.
“나는 50만원. 바로 이체 할게.”
“나는 60만원!”
“65만원!”
순식간에 이영수 단독 협상에서 경매로 바뀐 상황.
민환은 이쯤 되니 자기가 이들에겐 완벽한 갑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민환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켜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신호음이 두 번 울린 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어, 민환아. 이 시간에 전화해도 되냐? 포기함?』
수겸이었다.
“그건 아니고, 여기 좀 재밌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혼자 하자니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이영수와 나머지 셋은 어리둥절했다.
“누군데?”
뒤에 참여한 학원 수강생 중 하나가 대표로 물었다.
“너희들이 애타게 찾는 약 제공자.”
수겸이 한 손으로 휴대폰을 가린 후에 답했다.
『먼데? 말해 봐.』
“내가 전에 약 삥 뜯겼다고 했잖아. 근데 마침 주동자를 여기서 만났는데 약을 좀 팔아달라고 하네? 어떻게 할까 싶어서 전화했어. 이거 네가 나한테 선물로 준건데 내가 맘대로 팔면 안될 것 같아서 말이지.”
민환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난 또 뭐라고.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얼마를 받던 간에 그냥 밥이나 한끼 사줘. 근데 지금 스피커 폰이냐?』
“아니.
『그러면 스피커폰으로 바꿔 줄래?』
수겸의 말을 듣고 민환은 스피커폰 모드로 바꾼 후 손바닥 위에 휴대폰을 올렸다.
『들리시죠? 전에 한번 드신 것보다 지금 민환이가 들고 있는 약이 더 품질이 좋아요. 그러니까 그에 걸맞는 가격을 제시하셔야겠죠?』
민환에겐 마음대로 하라던 것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경매에 불을 짚이는 말이었다.
“배, 백만원!”
“나도 백만원!”
이영수와 좀 전에 전화 상대방이 누군지 물었던 수강생이 백만원을 불렀다.
“크크큭. 수겸아 일단 전화 끊는다. 결과는 좀 있다 시험까지 치고 말해줄게.”
『오냐. 그럼 수고.』
수겸과 민환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학교 안과 밖에서 동시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