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00
제200화
47. 에스키스 (1)
“가호 넌 아쉽지도 않아?”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작업실 구석의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신주가 성의 없이 팔을 휘적거렸다. 저가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려는 의도 같았다.
“한재이 얼굴은 왜?”
“아니, 그걸 보라고 한 게 아니잖아. 그 위, 그 위 말이야!”
뭐라 말해도 애매한 상황이라 알아듣지 못한 척, 눈을 깜박이자 신주가 답답해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일부러 딴청을 피우는지 가늠하던 그는 결국 제 입으로 기사 제목을 읽었다.
“한재이의 재발견! A급 변이 필드를 단신으로 격파해……. 이게 말이 되냐고!”
“말이 안 될 건 또 뭐야.”
“말장난하지 말고! 최권세 씨 말로는 네가 제안한 거라던데. 정말 그런 거야?”
반동을 이용해 단숨에 일어난 신주가 내 앞에 있는 책상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액정에는 타워즈 닷컴의 실시간 검색어 목록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개중 태반이 한재이와 퍼펙트핸즈의 경매에 관한 단어들. 그러나 내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대강 알 텐데도 신주는 분에 차 씩씩댔다.
“솔직히 어제 너 아니었음 정말 범람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어. 그랬음 난리가 났겠지. ……근데 다들 네 공을 몰라주니까, 괜히 내가 속상하잖아.”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손바닥으로 누르자 신주가 불만스럽게 날 노려봤다. 그래 봤자 무섭지도 않았지만. 손을 떼고, 책상 앞쪽으로 돌아가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이렇게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
“그거 되게 서운한 발언이야. 난 완전 진심으로 한 말인데.”
“……입막음은 길드장 님이 한 거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내가 최권영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이 건에 제가 관여되었다는 이야기는 최대한 비밀에 부쳤으면 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업무를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요.’
본래 가지고 있던 레인저라는 정체성에 애착이 있는 만큼 물론 아쉬움이 남았다. 전투계 헌터로서의 평판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대중에게 나를 드러낼 적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야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임팩트가 떨어져.’
어설픈 명성은 세계탑에서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분간 견지운과 함께 움직여야 할 텐데 나까지 시선을 끌어선 곤란하지.
최권영이 협조해 준 덕분에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경매장에 있던 헌터 전원의 입을 단단히 막아주었다. 추측건대 인재 유출을 막으려는 길드장인 척하며 사람들을 협박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재이가 반발한 건 좀 의외였지만.’
한쪽을 가리려면, 다른 쪽을 요란스럽게 포장해야 하는 법.
자연히 모든 공을 한재이에게 돌려 그를 빛내게끔 하게 되었는데 본인은 이를 대단히 싫어했다. C급 몫을 뺏을 생각은 없다나. 은근슬쩍 날 견제하던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태도였다.
“뭐, 결국은 승낙했다만.”
후회하지 말라는 새침한 경고가 떠올라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됐든 원하는 대로 일이 굴러가서 다행이었다. 경매장의 소동이 생각보다 파장이 커졌으니 더더욱. 대중의 혼란을 막기 위해, 변이 필드의 자세한 정보는 풀리지 않았으나 헌터들의 커뮤니티에서는 암암리에 사실 섞인 소문이 떠돌았다.
몇 년간 이현상을 가까이 보아 온 내가 느끼기에도 어제 본 필드는 희한했다. 공략 방법도 예사롭지 않았고.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있음이 분명했다.
“신주 넌 어떻게 생각해? 그 필드 말이야. 범람하기도 전에 마수가 나왔잖아.”
“별생각 없는데.”
“응?”
“언제는 뭐 세계탑이 원칙대로 굴러갔나. 원칙이란 것도 사실 사람들이 멋대로 세운 거잖아. 거기 들어맞지 않는대서 허둥댈 거 없지. 명쾌한 것이라곤 퀘스트밖에 없는 곳이니까 말이야.”
시원스러운 대답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었다.
그래,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게 있나. 어차피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 그림이 완성되리라.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다 보면 세계탑에서는 늘 답을 얻게 되니까.
‘그 끝에 무엇이 있든, 언젠간 알 수 있겠지.’
한편으로는 이 모든 상황이 꼭 내가 겪은 히든 퀘스트와 같은 절차를 밟고 있단 생각도 들었다. 굳이 대입하자면, 지금은 한창 단서를 수집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단계겠네. 여러 번 해 온 일이라서일까. 괜히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느꼈던 특이점과 기시감들을 기억 한편에 고이 담아 둔 뒤, 고민을 완전히 털어 냈다.
“아, 그래. 마침 둘이 있으니 이 조커 님이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도 좀 이야기해 볼까?”
“쓸 만한 이야기를 들었나 보네.”
“내가 괜히 가호가호의 조커겠어?”
멋대로 내 소유물이 된 신주가 오해일의 뒤를 밟으며 얻은 정보들을 풀어놓았다. 어느 것이고 허투루 들을 이야기가 없었다. 일 처리가 깔끔한 신주답게 녹음이나, 사진도 잘 남겨 두었다고 하고.
“수고했어, 정말로.”
“이거 잘만 요리하면 오해일 정도는, 아니 어쩌면 그놈 길드까지 완전히 매장할 수 있을 거야. 나 잘했지? 응? 그럼 이제 나랑 놀…….”
“잠깐만.”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내 신경 쓰고 있던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해랑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템이 전시된 장식장 앞에서 떠나지 못하던 고래가 돌연 문 쪽으로 헤엄쳤다.
간발의 차이로 문고리를 눌러 열려는 해랑을 가로막았다.
“해랑아, 멋대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지.”
– 우우…….
“문 여는 건 또 언제 배웠고? 학습력만 좋아서……, 어?”
칭얼거리는 해랑에게 훈계하던 중, 살짝 벌어져 있던 문틈이 갑자기 벌어졌다. 누군가가 바깥에서 문을 연 것이다. 얼결에 문에 밀려 뒷걸음질 쳤다.
해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얘는 정말…….
“윤해랑, 안 돼!”
“어후, 목청도 좋아라. 애는 내가 잡고 있으니까 걱정 마.”
내 외침에 곧바로 답한 목소리에 긴장이 쫙 풀렸다.
‘아, 벌써 저 사람이 올 시간이었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 옆으로 빠져나오자, 해랑을 쥔 채 싱글거리는 견지운이 보였다. 그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해랑과 해후를 나누기 바빴다.
애초에 목적이 견지운이었는지, 해랑은 얌전히 그의 손에 몸을 맡긴 채 꼬리를 흔들었다. 아이템으로 쌓인 친밀감이라는 건가. 견지운이 손을 놓아주자 고래는 곧바로 그의 뺨에 착 달라붙어 반가운 티를 냈다.
“내가 그렇게 반가워? 그냥 나랑 같이 살래?”
– 큐우, 큐!
“그래, 좋은 생각이야. 내가 맛있는 것도 많이 주고…….”
“견 길드장 님.”
냉랭히 그를 호명하자, 견지운이 전부 농담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위기감에 해랑을 얼른 내 쪽으로 데려왔다.
“해랑아, 내가 전에도 그랬지. 맛있는 거 준다고 다 좋은 사람 아니야. 함부로 따라가면 안 된다.”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고래의 모습이 천진하기 짝이 없어 방 안의 모든 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마저도. 가르칠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귀엽긴 했으니까.
“흑막 양, 나 계속 세워 둘 거야?”
“……그 호칭은 또 뭡니까?”
몸짓으로 그를 안내하며 묻자, 견지운이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소문이 파다하다는 모호한 말만 하니. 내가 정말로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린 후에야 견지운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다.
“어라, 정작 본인은 못 들었나. 하기야 하루밖에 되지 않은 이야기니까.”
하루? 그렇다면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흑막’이란 단어가 붙을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흑막한테 당한 쪽이지.
내 반응을 살피던 견지운은 상상외의 답을 내놓았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문이었다.
“천하의 최권영을 쥐락펴락하는 아가씨가 있단 이야기가 벌써 파다한데 말이야. 어찌나 제 품에 안고 물고 빠는지, 구설수까지 염려하면서 입단속을 한다던데?”
뭐? 최권영이 뭘 어째?
“다들 최권영 무서워서 아가씨 이름까진 떠들지 못하는 것 같지만, 완전히 입을 다물 순 없었나 보지. 벌써 내 귀에까지 들어왔으니 어쩜 좋아?”
얼핏 듣기엔 걱정하는 듯한 어조였으나, 견지운의 얼굴에선 지울 수 없는 장난기가 뚝뚝 떨어졌다. 곤란해 할 내 모습을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회장에서 파트너 흉내를 냈더니 뭔가 오해들을 하신 것 같은데.’
물고 빨기는 무슨. 물어뜯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찼지만, 이대로 휘둘린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객한테 놀아나서야 꼴이 우습지 않겠는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침착한 척, 응접실 문을 열었다.
“제 이름만 떠벌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들어오시죠.”
“어어?”
“선호하시는 음료 있으신가요? 홍차, 커피, 주스도 몇 종류 있습니다. 신주 너도 들어올 거면 들어와.”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견지운이 당황하는 사이 얼른 먼저 응접실로 들어갔다. 엉겁결에 날 따라오면서도 견지운의 얼굴에는 찜찜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았어. 이대로 그냥 없는 일인 척 넘겨 버리자.’
차를 우리는 동안에도 견지운은 몇 차례 나를 찔러봤으나, 큰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이내 가만히 입을 닫았다. 이때다 싶어 나는 완전히 화제를 전환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경위서 작성도 남아 있고, 어제 쌓인 피로도 있어 휴식을 취하고 싶었습니다만. 급하게 일정을 당기신 이유가 있습니까?”
본래 견지운의 장비를 손봐주는 것은 다음 주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견지운이 일정을 조정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지. 갑작스럽게 시간을 빼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일견 제멋대로 구는 것처럼 보이나, 철저한 계산 아래 움직이는 견지운이다. 그런 만큼 단순한 변덕은 아닐 테고. 차를 홀짝이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쪽 아가씨도 예의 그 건의 관계자라고 했지?”
“히든 퀘스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맞습니다. 바로 직전까지 움직였습니다.”
“좋아, 그럼 편하게 말할 수 있겠네.”
제 스태프를 소환해 테이블 위에 놓은 견지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로 폭탄을 던졌다.
“다른 공조팀이 발트하임에 얼쩡거리고 있다네? 선수 뺏기지 않으려면 내일, 어쩌면 오늘 당장 출발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