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04
제204화
48. 스케치 (1)
“되게 친절하신 분 같아요.”
“한차현 헌터 말씀이시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차현이 그려 준 약도에 코를 박고 있던 채성아가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까지 험한 이들과 부대끼고 산 만큼 작은 호의에도 감회가 남다르겠지.
‘정작 여길 잘 아는 사람은 무책임하게 갔는데.’
비행선의 문이 열리자마자 팔랑팔랑 사라진 견지운을 떠올리자니 없던 두통도 생기는 것 같았다. 이 사태를 예상한 한차현이 미리 준비해 둔 지도를 내주지 않았다면,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할 뻔했다.
발트하임은 그리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시계탑 광장을 중심으로 뻗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초행자에게는 녹록지 않은 곳이었다. 오랫동안 예술가들의 요람 노릇을 해 온 만큼 골목마다 눈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가 많았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길을 잃기가 쉬웠다.
그러나 지도를 내어 준 이가 누구던가. 한차현은 우리를 위해 이정표가 될 만한 가게나 조형물을 꼼꼼하게 표시해 두었다.
수시로 길을 잘못 드는 채성아에게 지도를 받아 들고, 앞장서 골목을 가로질렀다. 치안관리국이 비행장에서 마차를 타고 움직이기에 애매한 곳에 있어 한참을 걸었지만, 이제 곧 도착이었다.
“저울을 든 신상을 끼고 오른쪽으로……. 아, 저기 있네.”
경비 대원들이 머무는 치안관리국 건물은 외견에서부터 근엄함이 배어 나왔다. 유리로 된 둥그런 돔을 제외한 모든 곳을 뒤덮은 진회색이 이런 분위기 조성의 주범. 무거운 색채에 눌려 우아한 곡선이 제빛을 발하지 못했다.
‘원래 저런 색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곳에 상앗빛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저편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미감 없는 업자의 센스를 비난하며 아치 모양의 입구를 통과했다.
관청 특유의 딱딱한 공기에 얼어붙은 채성아가 산만하게 두리번거렸다. 그게 길을 잘못 든 관광객처럼 보이기라도 한 걸까. 우릴 스쳐 지나가던 제복 차림의 여자가 갑자기 휙 몸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높게 묶은 금발을 찰랑대며 성큼 다가왔다.
“캐서린 리번 경위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신 상황입니까?”
“……?”
“이곳은 발트하임 치안관리국입니다.”
앞뒤 잘린 대사에는 플레이어들이 올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끄러미 우리를 보는 것이 원한다면 길 안내라도 해 줄 듯한 태도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겐 그런 배려가 필요 없었지만.
“그렇다면 맞게 찾아왔군요. 저희는 여섯 번째 날개의 담당자를 찾아뵈러 왔거든요.”
예상을 훌쩍 벗어난 대답이었는지 캐서린이 곧바로 반문했다.
“6구역에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따라오십시오.”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진위를 가늠하던 캐서린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우리를 안내했다.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인 것이 내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성격 나쁜 플레이어들이 장난이라도 친다고 여기고 있겠지.’
발트하임은 여섯 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경비대는 각각의 구역을 관리하고, 캐서린 같은 수사관들이 다시 그들을 관리하는 구조라고. 대부분의 사건은 경비대 선에서 처리되고, 어지간해선 이곳, 치안관리국까지 사건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견지운이 목격한 살인 사건은 연쇄 살인마의 소행으로 짐작되는 만큼, 신고와 동시에 관리국으로 이관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모든 증거품도 여기로 옮겨졌다.
캐서린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우리를 데려가는 게 맞나 고민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봤다. 척 보기에도 심약해 보이는 채성아는 그나마 경계하지 않았으나, 날 보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이렇게 생긴 걸 어떡하라고.’
불편한 동행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날개, 그러니까 1번 구역이 2층, 2번이 3층, 3번이 4층……. 층수에 비례해 구역 번호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 등반으로 헐떡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차피 마주친 npc. 정보나 뜯어낼까 싶었던 순간, 캐서린이 선수를 쳤다.
“방문한 연유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여섯 번째 날개라면 플레이어분들께선 좀처럼 방문하지 않으시는 곳인데.”
“음, 함부로 발설해도 되는 건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일단은 저도 6구역 소속입니다만. 그래도 안 되겠습니까?”
그는 내가 자신을 의심할세라, 재빠르게 제복 가슴팍에 달린 주머니에서 등록증을 내보였다. 정말로 캐서린 리번이라는 이름 아래, ‘여섯 번째 날개 소속’이란 문구가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제 발로 굴러떨어진 수사관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경비대원과 수사관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부터가 달랐다.
‘기회가 된다면 한 명이라도 붙잡고 구워삶아 볼 생각이었는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주저하는 척,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요새 발트하임에 흉흉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죠?”
“……연쇄 살인 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대로 연기를 할 자신이 없어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그렇다고 답했다. 내가 말한 것은 그걸로 끝. 하지만 캐서린은 저 혼자서 시동이 걸렸는지 연신 무언가를 중얼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우리 구역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고 했지. 분명 그 목격자가…….”
“네, 방금 말씀하신 대로 저흰 그분을 대신해서 방문했습니다. 목격자요.”
“굳이 대리인을 보낼 필요가 없었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그분은 현재 바깥으로 나오실 만한 상황이 아니라.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고 심신의 안정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괜히 동요하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채성아도 즉각 호응하며 도왔다.
“그분은 끝까지 증언을 위해 나오시겠다고 했지만, 도, 동료로서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힘든 일을 겪은 분을 어떻게 여기까지 보내겠어요.”
“저희 쪽이 약소하나마,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고요.”
“도움이라 하심은?”
“두 번 말하기 번거로우니, 나머지 논의는 다른 분들이 계시는 곳에서 하죠.”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7층에 도착했다. 여섯 번째 날개의 상징인 끌과 정을 새긴 조각이 계단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캐서린은 조각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두 번째 방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러곤 ‘중대범죄수사과’란 팻말이 붙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틈이 벌어지자마자 지독한 연초 냄새가 쏟아졌다. 캐서린은 익숙한 듯, 소매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으나 나와 채성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콜록, 읍, 담배를 얼마나……, 콜록!”
“괜찮, 괜찮으, 콜록! 으, 안 괜찮…….”
“네, 안 괜찮습니다.”
“관리국 내에서의 흡연은 금지되어 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고든 경감님.”
방의 주인은 방문객들을 연민하지도 않는지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내 사무실에서 내 담배를 피우겠다는데 금지는 무슨.”
짜증 서린 걸음으로 방에 들어간 캐서린이 창을 활짝 열고, 한참이 지나서야 우리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너구리 굴 같은 방 안쪽에 앉은 이의 모습을 확인할 여유도 생겼다. ‘수사과’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내부에는 있는 것은 방만한 자세로 앉은 남자 한 명뿐이었다.
‘서른? 아니 어쩌면 마흔?’
고든 경감이라 불린 남자는 좀처럼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양이었다. 단단한 턱이나, 오만한 눈빛을 보면 원숙함이 느껴졌으나, 표정과 어투에서는 젊은이의 혈기가 철철 흘렀기 때문이다. 경감이란 지위를 생각하면, 어찌 됐든 나보다는 연상일 것 같았다.
‘보통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문득 저 사내가 고집스러운 소꿉친구와 이상한 상사를 섞어 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달갑진 않은데. 무의식적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관찰의 성과가 썩 별로인가 봐? 하긴 내가 썩 첫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지, 그래.”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는데. 귀가 밝은 고든은 그를 놓치지 않고 꼬투리를 잡았다. 무례한 행동이었던 건 맞으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결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아아, 캐시 같은 놈이로군. 놀리는 맛이 없어. 아주 실망이야.”
“저는 갑자기 왜 끌고 오십니까?”
“네 놈이랑 아주 꼭 닮은 말투지 않나. 고지식하고 꽉 막혔을 게 틀림없어. 이런 게 쌍으로 찾아오다니 오늘은 재수가 없으려나 보군.”
채성아가 눈치를 보며 내 소매를 죽죽 잡아당겼다. 내가 도발에 넘어갈까 걱정이라도 한 모양인데.
‘내가 겨우 이런 소리에 끄덕이나 하려고.’
아닌 척 내 반응 살피는 고든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한재이에 비하면 그쪽 정도는 새 발의 피야. 담배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보는 눈은 있으신가 보네요.”
“뭐?”
“보신 대로라고요. 저 꽉 막히고 고지식한 인간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절 쫓아낼 이유는 못 되죠.”
이런 사람에겐 절대 얕보여선 안 된다. 탕! 내리치듯 강하게 책상에 손을 짚은 채 고든과 눈을 맞췄다. 이놈 좀 보라는 식의 흥미 어린 시선이 날 직시했다.
“어차피 상부상조할 관계인데, 좋게 좋게 갑시다.”
“내가 그쪽과 뭘 상부상조한다는 거지?”
“대충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적적해서 선문답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가?”
“무슨 말인지 난 전혀…….”
“경감님, 이분들 중요한 증인입니다. 그렇게 쫓으시던 사건의 증인이요. 경중 없이 구는 것도 그쯤 하세요.”
서로의 말꼬리만 잡는 의미 없는 언쟁이 시작되기 직전, 캐서린이 시기 좋게 끼어들었다. 그는 또다시 불을 피우려는 고든의 파이프를 빼앗고 날 뒤로 물렸다. 처음 봤을 때보다 확연히 피로한 낯이 된 그는 고든의 책상을 제 것처럼 뒤져 파일철들을 꺼냈다.
고든은 제 황당함을 숨김없이 드러냈지만, 캐서린은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되레 그가 앉은 의자를 옆으로 치워 내고는 내게 보이도록 파일을 펼쳤다. 이어 그는 읽어 보라는 듯, 서류의 가장 윗부분을 가리켰다.
사건 번호 014449-13. 붉은 날개.
“이번 사건의 총칭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현재 남은 유일한 목격자의 대리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