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13
제213화
50. 데생 (1)
양탄자 위에 네모난 모양으로 칼집이 나 있었다. 한 변이 1m쯤 되었는데, 양탄자의 털실이 유독 북슬북슬해 잘 보이지 않았다. 방금 내가 발이 걸린 부분이 살짝 들떠 있지 않았더라면 발견하기 힘들었으리라.
“열어 보겠습니다.”
틈에 손가락을 넣고 힘을 주자 칼집 난 부분이 뚜껑처럼 들렸다. 그 아래 자리한 것은…….
“이건…….”
“가호 씨한테는 뭐가 보이나 봐요?”
자신에게는 그냥 판자 바닥만이 보인다는 한차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을 보여 주는 술식을 섞어 감춰 둔 듯한데 탐색자의 눈은 그마저도 꿰뚫어 보았다.
처음 보는 형태의 식이었다. 선과 도형, 문자로 이루어졌던 다른 술식들과 달리, 기계 장치로 작동되는 마법이라니. 마정석이 박힌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광경을 유심히 살폈다.
여태껏 내가 보아 온 것과는 조금 형태가 달랐지만, 마력이 흐르는 구조는 비슷해 어떻게든 그 용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동 술식입니다. 규모를 고려하면 사람은 어렵고,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 같은데.”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장치 위에 얼룩진 핏자국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이를 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눈치챈 건지. 한차현이 짧게 한숨을 뱉었다.
“심장과 눈은 헌터들에게 있어 마나로드의 중추이지 않습니까? 줄리에게 듣기로는 이 계층의 마법사들에게도 비슷하다더라고요.”
“그 말씀은…….”
“데런의 왕이 이제 와 마력을 갈취할 이유가 생겼다는 거죠.”
상상했던 것 중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아니길 빌었는데 역시나인가.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법이 자취를 감춘 도시. 마법사들의 신변을 이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버려진 공주에서 시대를 바꾼 성군이 된 데런의 왕, 마르틴 3세. 그리고 그가 지금, 돌연히 마력의 원천을 긁어모으고 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탄탈리움 수급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앞으로 수십 년은 거뜬히 채굴할 수 있는 광산이 여러 개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렇게 갑자기 고갈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군요.”
바닥의 기계 장치로 손을 뻗었다. 여기 있는 이 녀석은 만든 방식이 신선하기는 했으나, 여타 술식보다 건드리기 쉬웠다. 여기저기 헐거운 매듭들이 있었으니까.
‘대량 생산한 부품들을 끼워 맞췄으니, 큰 그림을 그릴 때 조금씩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모습을 감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여기인가. 검지 끝에 마력을 집중해 흐름을 끊어 냈다. 적당히 정도를 조정했으니, 조금 뒤에는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어, 이제 보이네요?”
갑자기 바뀐 바닥을 본 한차현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장치를 관찰했다. 들뜬 표정을 보니 오랜만에 그가 나와 비슷한 또래라는 게 실감이 났다.
“보고 계시는 이 장치, 제법 신경 써서 만든 겁니다. 거리에 나다니는 기계들과는 수준이 달라요. 사용된 탄탈리움의 순도도 높아 보이고요.”
“별거 아닌 일에 사용될 물건이 아니란 말이죠?”
“절대로요.”
“가호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담백하게 내 말을 인정한 한차현이 안경테를 쓸었다. 왕이 심장과 눈을 수집하는 이유를 고민하는 듯했다.
“증오나 쾌락 같은 감정적인 이유는 아닐 거예요. 그런 거라면 굳이 플레이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괜찮잖아요. 많은 부위 중 심장과 눈을 고수할 필요도 없고요.”
“이곳에서 진행된 메인 퀘스트의 상세 내역은 기밀로 붙여졌다죠?”
“네, 이상할 정도로.”
오고 가는 눈빛 속 서로가 같은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래 들어 자주 그러하듯 한차현은 내가 종지부를 찍을 것을 말없이 권유했다.
“도시 전쟁 이전에 맺어졌다는 실라 밀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당시 이곳의 상황을 잘 아는 지화 님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겠죠.”
“동의해요. 연락은 제가 대신해도 될까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탄탈리움 조사도 병행했으면 하는데……. 수급에는 문제가 없다지만, 연관이 없지 않을 것 같아서요.”
어디까지나 의견일 뿐이라고 덧붙였지만, 한차현은 자신도 같은 생각이었다며 내 말을 긍정했다. 줄리엣과 나눈 대화에 신경 쓰이는 지점이 있었단다.
“줄리는 굉장히 실험적인 화가였더라고요. 남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것들도 덥석 그림의 재료로 쓰곤 했다는데. 개중 하나가 굉장히 낯익은 거더라고요.”
“……설마, 탄탈리움을?”
“네, 맞아요. 당시에 쓰레기 광물이라고 불리던 탄탈리움도 염료로 써 보셨대요.”
탄탈리움을 가루 내어 만든 염료는 지나치게 쉽게 휘발되어 그림의 재료로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줄리엣은 우연히 그 단점의 극복법을 알아냈으니.
“피요. 줄리의 피가 들어가니까 완전히 달라졌답니다.”
“예?”
“처음엔 본인도 이유를 몰랐죠. 갑자기 흡착력이 좋아졌는데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고양이한테 할퀸 상처에서 피가 떨어진 것 같단 거예요.”
내내 기계 장치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한차현이 날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냥 우연은 아닌 것 같죠?”
“아, 예.”
은은한 미소나 짓던 사람이 시원스럽게 웃자 괜스레 당황스러웠다. 표정에 다 티가 났을 텐데 한차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의식적으로 질문이 툭 나갔다.
“줄리엣 루와 만나신 게 퍽 즐거우셨나 봅니다.”
“네?”
“오전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으음……. 그게 말이죠.”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서야 기억났다. 이 사람 사적인 이야기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웃는 얼굴로 선을 긋는다고 어려워하는 길드원들도 많은 이 아닌가. 근래 부쩍 사이가 가까워져서 잊고 있었다.
“실례되는 발언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뒤늦게 수습하려고 했으나, 한차현이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로도 모자라 그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을 뿐이다, 다정히 설명까지 해 주었다. 누가 봐도 날 무안하지 않게 하려고 하는 말 같아 얼굴이 홧홧해졌다.
“가호 씨 지금 하나도 안 믿는 표정인데.”
“아뇨. 아닙니다. 제가 왜…….”
“다 보이지만, 이번 한 번만 속아 드릴게요.”
한차현이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이 사람, 오늘 좀 이상하다. 낯선 모습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숨긴다고 숨겼으나, 눈치 백 단인 한차현이 이를 모를 리가. 그는 절레절레 고갯짓하며 날 응시했다.
“줄리엣 루와 만나서 즐거웠냐고 물으셨죠?”
“실언이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대단한 질문이라고요. 네, 맞아요. 그 사람하고 만나서 즐거웠어요. 시공을 넘나드는 건 언제 해도 즐거운 경험이죠.”
내가 납득하고 넘어가려던 그때, 한차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건 그것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랬다면 좀 더 잘 갈무리했겠죠.”
“다른 이유가 있단 말씀입니까?”
“글쎄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 한차현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뜻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 같았지만, 무언가가 미묘하게 달랐다. 설명하기 힘든, 애매한 부분이.
‘뭐가 다른 거지?’
마음이 앞서 몸이 그를 향해 기울 뻔했으나, 한차현이 일어나며 시도는 무산되었다. 아직 상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내게 한차현이 손을 뻗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얼결에 한차현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생각했다. 정말로,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고.
***
잠깐을 못 참고 수사실을 너구리 굴로 만든 고든이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는 제가 만든 연기 때문에 콜록거리는 우리는 안중에도 없이 바이퍼 란이란 이름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바이퍼 란. 2구역의 산업 단지에서 수습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라는군.”
이것으로 총 4장. 오늘 밤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들의 정보가 모두 모였다.
“가장 유력한 것은 역시 이 바이퍼란 사람이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하지만 니아 켄슬러도 그에 못지않은 위험군이야.”
고든은 바이퍼와 니아의 서류를 제외한 두 장을 뒤로 뺐다.
제해진 두 명은 몸이 불편한 노인과 임산부. 늦은 시간에 거의 외출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가택 침입까지 한 사례는 아직 없었으니,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았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자택 근처에도 인력을 배치할 걸세. 안일한 예측이 무고한 사람을 죽여선 안 되는 법이니까.”
“이 건에 연루된 플레이어들은 상당한 실력자입니다. 경비대원들만으로는 대응이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서 자네들을 둘로 쪼갠 게 아닌가.”
“음, 그렇지! 내가 왔으니 말이야!”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견지운이 명랑하게 외쳤다. 그는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뭐가 들었냐 물으며 고든의 파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철딱서니 없는 모습에 골이 아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제때 와 줘서 다행이야.’
나와 한차현이 치안관리국으로 도착했을 무렵, 채성아는 극적으로 견지운을 찾아냈다. 아무 말도 없이 데런으로 가는 비행선을 타려고 했다는데. 그랬다면 정말 곤란해질 뻔했다.
“환기 좀 하겠습니다.”
“네, 부디.”
캐서린이 화를 내기 전, 그와 함께 들어온 한차현이 견지운에게 파이프를 뺏고 창문을 열었다. 방구석에서 기침을 삼키던 채성아가 그를 구세주처럼 보았다.
이걸로 모두가 모였으니, 최종 확인에 들어가도 되겠네.
“고든, 지도 좀 펼쳐 보세요.”
명령하지 말라며 툴툴대면서도 고든은 얌전히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그가 펼친 지도 양 옆에 서류를 옮겨 두고, 두 지점을 차례로 가리켰다.
“산업 단지에서 늦은 시간까지 근무하는 바이퍼 란은 상대적으로 동선을 파악하기 편하죠. 그러니 저와 한차현 헌터가 이쪽을.”
“그리고 나랑 성아는 다른 한쪽을?”
“네. 니아 켄슬러는 어떻게 움직일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요. 견 길드장 님께서 밀착 감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밀착 감시란 어감이 마음에 든다며 견지운이 눈을 찡긋거렸다.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일행들에게 선언했다. 이는 곧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 밤, 열네 번째 희생자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