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19
제219화
51. 리얼리즘 (3)
어지럽게 엉킨 소음들.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추스르고 빠르게 우선순위를 가늠했다.
“일단 여기부터!”
땅바닥에 처박히려는 고든을 받아 들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도 고든에게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2층에서 머리부터 떨어졌는데도 공중에서 빙글 몸을 돌려 가뿐히 착지했다. 여느 헌터 못지않은 몸놀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고든?”
“큼, 그럭저럭. 용케 늦지 않게 도착했군.”
관자놀이께에서 흐른 피가 고든의 얼굴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고든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맞이했지만, 고된 싸움이었으리라. 플레이어를 상대로 지금까지 버틴 게 용했다.
– 큐우우!
깨진 창문 너머로 내 존재를 감지한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너도 힘냈구나.’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짧게 숨을 내뱉고 테라스 난간에 갈고리를 걸었다. 일일이 계단을 타고 오를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창문을 통해 진입하겠습니다! 한차현 헌터도 따라와 주세요.”
동시에 고든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상태 그대로 그에게 물었다.
“저자들이 도착한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제 막 10분 정도 되었다네. 자네가 딸려 보낸 그 녀석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도로시를 습격한 플레이어들이 화재를 일으켜 이 주택을 통째로 태우려는 것을 해랑이 덕분에 막았단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로시와 고든을 지켰다지.
‘최정록이 화염 계열 위저드라 다행이었네.’
겉모습처럼 해랑은 바다 정령, 아스트로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덕분에 상성의 우위를 점해,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든 버텨 낸 듯했다. 녀석의 종잡을 수 없는 스킬들도 한몫을 했을 테고.
이 밤을 무사히 넘긴 뒤, 해랑을 충분히 칭찬해 주어야지. 다짐하며 땅을 박찼다.
내게 운반되는 것이 달갑지 않은 듯 고든이 몸을 뒤틀었지만, 탈출보다 테라스에 도착하는 것이 빨랐다. 그를 내려놓고 커튼을 걷으려던 그때, 최정록이 고함을 질렀다.
“수속성인가 했더니 이번엔 번개? 이 마수 새끼는 대체 뭐야?”
– 큐우, 큣!
같은 순간, 아래층에서는 정수환과 한차현이 대치를 시작한 듯했다. 한차현이 마력을 운용할 때면 느껴지는 파동이 감지되었다.
“덩치 큰 놈은 도로시의 조각상들을 상대하던 중이었다네.”
질문하기도 전에 고든이 왜 두 사람이 흩어져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마법사 박해가 심해진 이후, 도로시는 조각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남몰래 젊은 시절 그가 만들어 낸 작품들을 보관 중이었다고 한다.
꼭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던 것처럼.
“저자들이 습격하자마자 저택 곳곳의 조각상들이 일순간에 일어났다네. 불꽃을 쓰는 놈은 족제비처럼 빠져나갔지만……. 오랜만에 보는 진풍경이었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나는 이내 모순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본다고?’
대규모 마법은 전쟁 이후로 모습을 모두 감췄는데. 이건 마치 그가 발트하임 토박이라도 된다는 듯한 발언 아닌가?
소니아의 집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고든은 이 도시 출신들이나 안다는 노동요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언뜻 들은 것이라고 하기엔 가사까지 정확히 기억했더랬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고든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이 도시 출신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넘겨짚었을 뿐이지. 데런의 직속 기관인 치안관리국 소속이니까.
의심은 점점 깊어졌으나, 지금은 이를 해소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니었다.
“돌아가서 얘기 좀 합시다.”
고민을 털어 내고 창틀을 걷어차려던 그 순간. 얌전히 늘어져 있던 커튼이 훅 얼굴을 향해 들이닥쳤다. 피할 틈도 없이 시뻘건 불꽃이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우리 위로 쏟아졌다.
“……!”
나는 간발의 차로 고든을 껴안은 채, 등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매서운 열기가 접근하는 듯하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리를 가둔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위해도 입히지 못했다.
윤수호가 준 아이템, 마지막 불꽃이 이번에도 날 구한 것이다.
‘이걸로 두 번째……. 나가면 밥이라도 사자.’
당장 불꽃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기척을 죽였다. 저 작자가 어떻게 나올지를 살피고 싶었으니까.
응당 따라와야 할 비명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으니, 최정록 쪽에서 먼저 접근해 왔다.
“쯧, 화력 조절을 잘못했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계십니까?”
지익, 직-. 땅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그의 안일한 마음가짐을 보여 주는 듯했다. 발소리는 점점 테라스 쪽으로 가까워졌다.
‘조절은 개뿔.’
저 인간의 실력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전투로 소진된 상태에서 이 정도 화력을 내려면 제법 용 좀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리를 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기선 제압을 하고 싶은 거였겠지. 그러다 상대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테고. 실제로 아이템이 아니었다면, 나는 몰라도 고든은 크게 위험해질 뻔했다.
최정록이 제 스킬을 거두기 전,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망토 형태로 모습을 바꾼 ‘마지막 불꽃’이 우릴 뒤덮고 있던 화마를 집어삼켰다.
“뭐야? npc 나부랭이가 어떻게…….”
“npc가 아니라 죄송하군요. 오랜만입니다, 선배.”
다시는 제 앞에 낯짝 들이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목 뒤로 삼킨 말은 차게 식은 눈빛으로 대신했다. 그와의 재회를 예상했던 나와 달리, 불시에 과거의 인연을 마주하게 된 최정록은 멍청하게 눈만 깜박였다.
“이제 괜찮을 듯한데. 놓아주지 않겠는가.”
“아, 실례. 다친 곳은 없으시죠?”
– 큐우우!
고든은 무어라 답하려 했으나, 내게로 마구 돌진해 온 해랑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그때까지도 최정록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있어 해후를 나눌 수 있었다.
“……고마워, 해랑아. 내 부탁 때문에 무리했구나.”
– 큐!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푸른 몸 이곳저곳에 최정록을 상대하며 생긴 상처가 가득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활약해 준 내 작은 고래를 꽉 껴안았다. 그러자 해랑이 왜 이제야 왔냐는 듯 높은 소리로 울며 어리광을 부렸다.
해랑을 달래면서도 눈은 빠르게 2층 내부를 훑었다. 커튼이 모조리 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기 구석에 쓰러진 노파가 도로시겠지.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행히 가슴팍이 들썩이고 있었다. 천장이 높고 방이 넓은 데 비해 가구는 많지 않았다.
‘엄폐물로 사용할 만한 건 소파, 책상. 저기 있는 저 선반까지도 괜찮겠네.’
도로시에게로 갈 수 있는 최적의 동선이 짜였을 때 즈음, 최정록이 내게 외쳤다.
“유, 윤가호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용케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네가 왜 지금 여기에…….”
“그게 지금 중요할까요?”
화살을 소환해 손안에서 핑그르르 돌렸다. 반대쪽 손에는 방금 꺼낸 활이 들려 있었다. 해랑도 장단을 맞춰 꼬리를 탁탁 휘둘러 댔다.
“잠깐, 잠깐. 그러고 보니까…….”
명백한 공격 의사를 알아본 최정록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 멈추었다. 당혹감에 굳었던 얼굴에도 어느새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나 보지?”
“뭘 말입니까?”
“모른 척하긴. 윤가호 너 고작 C급이잖아! 발에 차고 차이는 C급! 개중에서도 형편없는 축이었지. 그런 주제에 센 척이라니. 우습지도 않지!”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어이가 없어 대꾸하지 않은 것을 긍정을 받아들인 것일까. 최정록은 곡해를 멈추지 않았다. 머리 하나만큼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였나 보다.
좀 내버려 둘까 했더니만. 최정록은 내가 제게 푹 빠져서 간도 쓸개도 내주었다는 가짜 소문까지 들먹이기 시작했다.
“몇 년간 잠잠하더니. 설마 이런 곳까지 날 쫓아온 건…….”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잡아뗄 생각이야? 복수 맞잖아. 그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흉흉하게 쳐다보는 건데?”
“원한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이번엔 다른 용건입니다.”
아주 멍청해진 것은 아닌 모양이지. 사적인 감정이 얽히지 않았음을 알아챈 최정록의 눈빛이 달라졌다. 뒤로 감춘 그의 손 언저리에서 마력이 일렁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로군.”
“…….”
“네 까짓것한테 성배를 넘길 순 없는 노릇이지!”
몸을 살짝 낮추는 듯하더니, 최정록이 앞을 향해 손을 크게 휘둘렀다. 손에 맺힌 불꽃들이 궤적을 그리고, 그곳에서 아가리를 쩍 벌린 용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일격은 내게 닿지 못했다. 진작 수를 읽어 낸 내가 최정록이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망토로 용을 쳐내고, 그의 뒤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게 막힐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최정록이 인상을 찌푸렸다.
“윤가호 너! 대체 뭘 한 거야!”
대답해 줄 필요가 있나.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화살을 장전하자 최정록이 그제야 허둥지둥 무기를 꺼냈다.
그의 손에 나타난 무기는 붉은 깃털이 달린 쥘부채. 언뜻 보이는 회로로 추측하건대, 마력 증폭 외에 대단한 기능은 없는 물건이었다.
‘저걸 건드려 봐도 되겠지만, 제작계 능력은 최대한 자제하는 게 좋겠지.’
최정록은 내 망토가 제 불꽃을 상쇄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부채를 휘두르는 게 아닌가. 색안경을 쓴 시선이 그 원인이었다.
“네가 가지고 다닐 만한 것이니 그래 봤자 C급 장비겠지!”
보통 C급 장비의 특수 능력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다. 그 틈을 노리려는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이건 그냥 그런 아이템이 아니라. S급의 힘을 빌어 불꽃을 가볍게 쳐내자 기껏 여유를 찾았던 최정록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해 볼 만한 싸움이다.’
헌터 간의 전투라 긴장했는데. 최정록은 그럴 가치도 없는 상대였다. 등급이 높은 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듯싶었다. 그는 나를 우습게 보고 방심하고 있는 데다가 여러모로 형편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상황 판단력.
최정록은 아직도 자신이 나와 해랑이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였다면 어설픈 공격 대신 당장 이 불리한 구도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며 부채를 퍼덕이는 최정록을 겨눴다.
“언제까지 착각하실지 한 번 두고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