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28
제228화
53. 오버코트 (3)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로시.”
계약 때문에 최정록에게 손을 댈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도로시의 조각상이 나섰다.
사람의 살갗처럼 표면은 매끄럽지만, 그보다 훨씬 단단한 팔다리들이 최정록을 짓눌렀다. 상대를 봐주지 않는 거친 움직임에서 도로시의 사감이 읽혔다.
“으윽, 고작 npc 주제에, 이거 놓으라고!”
본인은 화염 저항이 있다는 거지. 불이 붙든 말든 무차별적으로 던져 대는 불덩이들은 나와 한차현이 처리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이럴 리 없다고!”
조각상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그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도 아는 것이다. 그리도 무시하던 내게, npc에게 자신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걸.
전형적인 위저드답게 근접전에 약한 최정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제된 표본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다. 조각상들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뒷덜미며 오금, 손목 같은 곳들을 힘주어 밟았다.
내게 포션을 건넨 한차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고든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심문은 제가 맡죠. 쉬고 계세요.”
“돕도록 하지.”
최정록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내가 도움이 될 것 같아 끼워 달라 부탁했지만, 두 남자는 단호했다.
“가호 씨는 환자잖아요. 제가 못 미더운 게 아니시라면, 회복에 전념해 주세요.”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동의하는 바이네.”
결국 나는 포션 병을 쥔 채 미적미적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고마우면서도 괜히 머쓱해져 툴툴댔다.
“윤수호도 아니고 웬 과보호람.”
워낙에 갑작스러운 부상이라 나도 놀라긴 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상처가 깊진 않았다. 근래 아이템의 등급을 한 차례 올린 덕분이었다.
이전에 입고 있었던 보급형 장비였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스스로의 선구안에 찬사를 보내며 포션 병을 열었다.
“이것만 쓰면 바로 낫겠네. 으, 그게 된다면 말이야.”
하필이면 등 한복판에 상처가 났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도 환부 전체에 손이 닿지 않았다. 몸을 비트느라 이제 겨우 피가 멈추었던 상처가 벌어진 건 덤.
통증과 난감함에 혀를 찬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각상을 손보고 있던 도로시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이리 줘 봐요.”
아이를 찾아 방황하는 내 시선을 알아챈 것일까. 포션 병을 받아 든 도로시가 아이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며 알려 주었다. 멀쩡한 조각상들과 함께 안쪽 방에 보내 두었단다.
말없이 내 등에 포션을 부어 주던 그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상처가 완전히 아무는 것을 지켜보던 도로시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굳은살이 켜켜이 박인 손바닥 위에는 뚜껑이 열린 염료 단지가 있었다.
“네가 나의 후학이라 하였지.”
“몇 시간짜리 엉터리도 인정해 주신다면 예, 그렇습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대강 알 만하구나. 내 작은 천사가 또 고약한 장난을 쳤나 보지. 그리고…….”
도로시가 말을 하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한차현과 최정록, 고든이 있는 방향이었다. 계약 아이템을 사용하며 울린 종 소리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달각, 옅은 소리를 내며 닫힌 단지가 내 손아귀로 들어왔다.
“부디 귀히 여겨 주길.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도 소중했을 흔적이니.”
나는 본능적으로 도로시가 언급한 ‘누군가’가 환상에 개입한 낯선 이임을 깨달았다. 지금이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 역시.
‘당신은 대체 누구지?’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훌쩍 떠나려는 도로시의 옷자락을 붙잡은 그때.
“npc 주제에 으스대는 게 꼴불견이었는데. X발, 그 새끼가 그린 그림대로 놀아날 줄이야. ……이게 다 전부 네 놈들 때문이야!”
체념한 듯 늘어져 있던 최정록이 발버둥 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손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보지 못했던 정체불명의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주사기 안에 든 푸른 액체는 한눈에 보기에도 긍정적인 용도로 쓰이는 것은 아닌 듯했다. 혹시 독이라면 그와 가까이 있는 두 사람이 위험했다.
“한차현 헌터! 고든! 물러나세요!”
목표들이 모두 거리를 벌렸는데도 최정록의 입가에 걸린 기이한 미소는 가실 줄 몰랐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야.’
나는 엄습하는 불안을 무시하지 않았다.
최정록이 정말 뭔가를 벌일 작정이라면, 여기서 멈춰야 한다. 빠르게 화살을 메겨 주사기를 겨눴다.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큼 작은 과녁이었으나, 스킬 보정은 그마저도 완벽하게 꿰뚫어 냈다.
챙! 유리로 된 주사기 몸체가 산산이 조각났다.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던 액체도 공중으로 흩어졌다가 추락했다. 최정록의 손과 손목을 밟고 있던 조각상의 발치가 푸르게 물들었다.
‘독은 아니었나.’
자신의 안위만큼은 끔찍하게 챙기는 사람이 아닌가. 아니, 저 상태라면 쉽게 판단할 수 없겠는데. 기분 나쁘도록 히죽거리는 최정록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후배님, 왜 그렇게 겁을 먹으셨을까.”
“…….”
“날 아주 우습게 생각했잖아. 솔직하게 말해 봐. 예전부터 날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어? 내가 모를 줄 알고. 그 업신여기는 눈빛을 내가 기억하는데. 안 그래?”
스스로의 날조에 취한 최정록이 대답할 새도 없이 헛소리를 쏟아 냈다. 듣다 못한 내가 말을 자르려 했으나, 최정록이 입을 연 것이 더 빨랐다.
“어디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
그가 범상치 않은 대사를 던진 직후. 내 뒤에 서 있던 도로시가 돌연히 주어 없는 의문을 표했다.
“뭐야?”
“예?”
“이건 뭐지? 내 작품이, 마법이 이상해. 이런 적은 처음이야.”
그러니까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혼란에 휘감긴 도로시가 평정을 찾는 것보다 기현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빨랐다.
터텅, 텅! 소리를 느끼고 전방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최정록을 구속하고 있던 조각상은 까만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졌고, 자유를 되찾은 그의 손에는 새로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처럼 번쩍 치켜든 팔. 저택 이곳저곳에 남은 잔불에 비친 액체가 기이한 광채를 냈다. 빛깔도 방금 본 것보다는 좀 더 진하고 선명했다.
“감히 너희가 나를 얕봐?”
지독히도 저다운 대사를 남긴 최정록은 이내 주사기를 제 목덜미에 꽂았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엄지를 누르니.
푸른 빛깔의 액체가 그의 몸 안으로 남김없이 부어졌다.
“가호 씨.”
“네, 다들 저희 뒤로!”
한차현과 나란히 선 채 npc들을 우리의 등 뒤로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별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런 것으로 막을 수 있는 열풍이 아니었으니까.
귀를 째는 듯한 최정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그를 중심으로 더운 바람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의 마력이 마구잡이로 팽창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양이며, 위력이 못해도 A급. S급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의 마력이었다.
‘대체, 뭘 주사한 거야?’
탐색자의 눈을 꺼도 보일 정도로 부푼 마력이 저택 안을 가득 메웠다. 최정록이 장막을 도로 탈환해 간 것이다. 저보다 훨씬 수준 높은 마법사인 도로시를 상대로.
거기다 기세는 또 어찌나 사나운지. 가려지지 못한 살갗뿐만이 아니라, 몸속에 숨은 마나로드까지 화끈거렸다.
주변의 기온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흩날리는 바람 사이, 불꽃들이 떠돌고 저택 곳곳에서 예고도 없이 발화가 시작되었다. 최정록만을 위한 화속성 필드가 마련된 것이다. 우리에겐 이런 비보가 없었다.
‘해랑이만 소환할 수 있어도 훨씬 나을 텐데.’
다른 조항들과 달리, 해랑을 언급한 조항에는 빈틈이 없었다. 눈앞에 띄지 않게 하라는 말에 이어, 소환 자체를 금지한다는 말을 덧붙였거든. 어지간히도 해랑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방도를 찾는 도중, 돌연 등 뒤에서 킁킁, 냄새를 맡는 소리가 들렸다. 도로시 같지는 않고. 무슨 일이냐 묻기도 전에 고든이 입을 열었다.
“탄탈리움.”
“예?”
“저 녀석이 주사한 푸르스름한 것 말이야. 탄탈리움을 정제해 만든 액체야.”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고든은 그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며 답을 유보했다.
“이 상황에서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습니까?”
“플레이어야, 그건…….”
묵묵부답인 고든을 대신해 나서려던 도로시의 안색이 일순간 핼쑥해졌다.
“맙소사.”
아연함을 숨기지 않은 그는 곧이어 우리를 내버려 둔 채 복도 안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와 한차현이 붙들려고 했으나,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우리를 떼어 놓고 사라졌다.
‘대체 왜……. 이런, 제기랄!’
감각을 예민하게 벼리자 저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이 뒤늦게 감지되었다. 우리가 최정록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에 더운 기류와 마력이 깊숙이 침투한 것이다.
그리고 저 안쪽에는 홀로 잠든 아이가 있었다.
“이미 늦었어!”
한차현에게 고든을 맡기고 도로시를 따라 뛰어들었다. 최정록의 진득한 웃음이 뒤통수에 들러붙었다.
도로시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를 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더운 곳을 향해 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네 개의 문을 지나쳐, 다섯 번째 방문에 이르니 작열통이 느껴질 정도로 농도 짙은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문짝을 걷어찼다. 문틈이 벌어지자마자 거대한 날개를 휘두르는 불새가 보였다.
제발, 이번에도 늦지 않기를. 짧은 순간 수십 번을 빌며 달려갔다.
그러나 기적은 여러 번 찾아오지 않는 법.
“도로시!”
새빨간 선혈이 체크무늬 실내복을 흠뻑 적셨다. 불새는 이내 발톱을 세워 목표물을 탈취해 갔다. 거친 동작에 튀어 오른 핏방울이 사방에 후드득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