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59
제259화
60. 데칼코마니 (3)
같은 시각, 지하의 위기는 아직 일단락되지 않았으니.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고!”
날카로운 바늘이 번뜩이더니, 최정록의 팔뚝에 꽂혔다. 음습한 광채를 내는 액체가 꿀렁꿀렁 그의 혈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피스톤을 누르자마자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손끝이 심각한 부작용을 짐작게 했다.
챙! 다행인지 불행인지 약물이 전부 주사되기 전, 주사기가 부서졌다.
“한차현 헌터의 말대로 될 줄이야.”
“우위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하면 급격하게 판단력을 잃더군요. 그런 와중에 쓸 수 있는 수는 한정적이니까요.”
제정신일 때도 전략이라곤 모르던 이가 아닌가. 이성이 없는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윤가호는 어쩌다 이런 인간과 알게 된 거지? 선후배 사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럼에도 의아했다. 그와 어울리기엔 너무나도 질이 떨어지지 않나. 쌀쌀맞은 척하면서도 무른 구석이 있는 윤가호의 성정을 고려하면 뭐, 대강의 상황이 그려지긴 했다.
제가 모르는 과거의 윤가호를 상상하던 한차현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평생 엮일 일이 없겠지만.”
“음?”
“아, 혼잣말입니다.”
능숙하게 둘러댔지만, 최권영은 괜히 그를 보며 눈을 휘며 웃었다. 언급하지도 않은 주어를 알아챈 게 틀림없었다. 한차현은 평소 그의 예민함을 높게 쳤으나, 이 순간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변명해봤자 빌미밖에 안 되겠지.’
이미 다 들킨 것 같은데.
정작 알아야 할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제 속내를 알게 되었으니.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애매했다. 당분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것 같다는 점에서 더더욱.
한차현은 일부러 최권영의 웃음을 듣지 못한 척하며, 최정록에게로 향했다.
“혹시 모르니 경위님은 거기서 대기해주세요.”
덩달아 따라오려는 캐서린에게 경고를 남긴 한차현이 자세를 낮췄다.
“윽, 끄윽…….”
“최정록 헌터, 제 말이 들리십니까?”
“꺼, 꺼져. 내 옆에서, 큭!”
가까이서 보니 최정록의 용태는 실로 심각했다. 약물 남용 때문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울긋불긋한 반점이 빼곡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나로드에도 문제가 생긴 듯 홧홧한 마력이 제 주인과 한차현을 가리지 않고 위협했다.
“마나로드가 과부하 상태에 빠진 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마력을 팽창시킨 결과 같았다. 내용물이 넘친 그릇처럼 마나로드의 수용치를 넘긴 마력들이 밀려 나온 것이다.
기세를 보건대, 이대로 전신의 마력이 모두 쏟아진 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천마저도 고갈되면…….”
각성자에게 마력은 생명력과 다름없었다. 일정 이하로 수치가 떨어지기만 해도 행동 불능에 빠지니. 한차현은 최정록의 목을 옭아맨 사신의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그것이 가엾다거나, 안타까운 것은 아니었다. 본인의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일이니까.
“괜한 논란이 일어서는 안 되니, 돕긴 할 테지만요.”
기껏 잘 감춰왔건만. 이번 계층에 들어 윤가호의 존재가 필요 이상으로 노출되었다. 이 이상 잡음이 생기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자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어떻게든 숨을 붙여놔야 할 텐데.”
정작 본인은 이 와중에도 손을 꿈틀거리며 바닥에 쏟아진 약물을 긁어모으려 하니, 한숨만 나왔다.
다소 매정한 손길로 최정록을 밀어낸 한차현이 궁여지책으로 감각을 벼렸다. 좀 더 세밀하게 마력의 흐름을 보면 무언가 답이 나올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숨통을 틀어막는 텁텁한 열기. 최정록에게서 뿜어져 나온 화속성 마력이 그들이 서 있는 배수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차현은 불쾌감을 꾹 눌러 참고, 좀 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한 겹, 두 겹, 켜켜이 쌓인 불의 장막을 넘어 도달한 중심에는.
“……!”
용오름처럼 치솟는 마력에 주춤하며 물러난 순간, 최정록의 심장께에서 불새가 튀어나왔다.
천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덩치가 큰 불새는 머리만 뱀의 형상을 한 기이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새가 날갯짓하자, 가까이 있던 한차현의 몸이 뒤로 죽 밀렸다.
탕, 탕! 최권영이 연달아 쏘아낸 총탄이 경계선을 그었다. 일행에게 다가오려던 불새가 물의 마력을 느끼고 움찔 멈추었다.
의도한 바가 이루어졌지만, 최권영의 표정은 드물게도 어두운 빛을 띠었다.
“어떻습니까?”
“최소 S급. 77층에서 만난 놈과 비견할 만합니다.”
최권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본능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욕망을 먹이 삼아 태어난 저 괴물을 조심하라고.
“해보아야지요. 엄호 부탁합니다.”
한차현은 최권영의 버프를 한껏 흡수하며 인벤토리에서 유물들을 선정했다. 모두 원거리 딜러를 보조하기 적합한 것들뿐이니. 여러 번 손발을 맞춰본 이들다운 호흡이었다.
그 사이, 불새는 저를 태어나게 한 원천의 마력을 끝까지 뽑아먹었다. 불새가 홰를 칠 때마다 최정록의 숨소리는 눈에 띄게 희미해지더니, 끝내는 끊어졌다. 그리고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불새와 사냥꾼들은 거의 같은 순간 준비를 마쳤다.
입을 쩍 벌린 불새의 아가리에서 뱀의 혀가 날름대고, 그를 진압하기 위한 총탄이 발사되려던 그때. 누군가 최권영의 허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안 됩니다!”
전투를 앞두고 신경이 곤두선 최권영이 차갑게 팔을 내쳤지만, 캐서린은 다시금 그에게 매달렸다. 거슬려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 위험해 보여 한차현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보시다시피 그리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애로사항이 있다면 일이 전부 마무리된 다음에…….”
“폭탄이 터지면, 다음이고 뭐고 없습니다!”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두 남자가 시선을 마주치는 틈을 타 캐서린이 외쳤다.
“여기서 전투를 벌여선 안 돼요! 이 배수로 전체에 폭파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지 않았습니까. 만약 불씨가 튀어 오작동하기라도 하면…….”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는지, 말끝이 생략되었으나 어렵지 않게 뒷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장치가 작동하면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발트하임은 끝이다.
운에 맡기기엔 너무 위험한 리스크였다. 심지어는 이 바로 앞에 제어실이 있지 않은가. 열기 때문에 장치가 오작동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한차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수호 헌터 같은 분이 있다면 모를까…….”
전투의 충격을 모두 흡수할 수 있는 헌터는 방어계 중에서도 드물었다.
눈앞의 위험과 후폭풍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낭떠러지 같은 기로에 선 세 사람이 핼쑥한 낯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물론 자비로움이라고는 모르는 불새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불새가 혀를 날름대더니, 그 끝에 흰빛의 불덩이가 어렸다. 근원이 된 최정록의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뜨겁고, 강력한 마력이었다. 불새 주변의 석조 벽들이 지글지글 끓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목숨부터 부지하고 봅시다.”
결단을 내린 최권영의 총구가 적을 향해 돌아섰다. 하나, 마력탄이 생성되기 전 짧은 찰나 그의 뒤에 있던 이가 뛰어들었으니.
무언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일까. 흩날리는 금발을 간발의 차로 놓친 두 헌터가 망연히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뒷모습을 보았다.
“지난한 세월에 붓은 꺾였다네. 그러나 칠하고 칠하리.”
그들을 달래듯 달콤한 음률이 귀를 적시니.
“붓 끝의 그림은 우리네 인생이라네.”
오랜 기다림조차 태우는 불길 앞에서도 흐려지지 않는, 절실한 음성이었다.
***
“음음, 우리네 인생이라네-.”
“그 노래는 언제까지 부를 셈입니까?”
캔버스처럼 희게 빈 풍경 앞,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노동요를 부르던 여인이 나를 보며 말갛게 웃었다. 그리고는 태연히 덧붙이기를.
“줄리엣한테 배운 거예요. 힘이 나는 노래 아닌가요?”
내 말문을 틀어막는 아주 효과적인 한 방이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사라진 이후 자유를 되찾은 팔레트는 나를 어디론가로 안내했다. 눈에 익은 골목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줄리엣의 저택이었다.
‘음, 저택이었던 곳이라고 해야 하나.’
완벽하게 재현된 다른 장소들과 달리,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복원하며 아예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이 공백을 채우는 것이 발트하임에서 남은 내 마지막 과업이었다.
그림이라도 그려야 하는 건가. 고민하기도 했지만 관리국에서 견지운이 해준 말이 떠오르며 그 의견은 즉각 폐기되었다.
“내 세계의 중심은 나.”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재구축된 이 팔레트는 내 방식을 사용해야만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마력이 맺힌 손끝을 허공을 향해 뻗었다.
마냥 비어 있기만 한 중심부는 나중에. 먼저 옆쪽과 연결된 부분을 만져보자는 생각으로 나는 가장자리부터 회로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앞서 훨씬 어려운 작업을 성공했기에,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흰 공간에 죽죽 그인 직선들은 솔직히 좀 앙상해 보였다. 그러나 뼈대가 완성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여기서부터는 제 차례군요.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드릴게요!”
응원이랍시고 노동요나 부르던 여인이 일어나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발아래 내려놓았던 팔레트가 두둥실 떠오르고, 내가 그린 회로의 빈틈 사이로 온갖 색들이 차올랐다.
“사실 아주 고대하고 있었어요. 줄리의 뒤를 이을 누군가가 와주길.”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우체통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팔레트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리곤 경쾌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니 힘내볼게요! 우리의 시간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