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58
제258화
60. 데칼코마니 (2)
‘퀘스트의 답?’
복원의 실마리를 내어주겠다는 건가? 입을 열 수 없으니, 반문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추측만 하던 그때,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네 모습■ 지켜■는 게 내 큰 낙이■만. ■■을 너무 괴■힐 수도 없■ 노릇 ■니니?]“…….”
[그리 어려■ 일도 아니■다. ■곳■ 이■ ■■이 ■ ■계니■.]끝으로 갈수록 노이즈가 심해져, 마지막 문장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들린 단어들을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목소리의 의도는 전해졌다.
‘내게 호의를 베풀겠다는 거잖아?’
가설을 증명하듯.
[세계탑의 축복으로 히든퀘스트, ‘지나간 마법의 시간(S)’이 완료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퀘스트를 완료 처리해주겠다니. 수상한 것을 알면서도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제의였다.
정체불명의 목소리 역시도 이렇게 생각했는지, 그저 낮게 웃음만 흘렸다. 이 이상의 설득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거다.
‘저 녀석은 그간 나를 다 지켜보고 있댔지.’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퀘스트 해결에 노력을 쏟고 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지.
포기하지 못할 미끼를 드리워놓고 반응을 관찰하는 모습을 생각하자니 소름이 돋았다. 나를 제 손 위의 먹잇감으로 본다는 거니까. 아니, 그보다 더 질이 나빴다. 생존이 아니라 단순 유희가 목적임이 훤히 보이지 않나.
[날 믿■ 못하■구나.]딴에는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는 그새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읽어냈다.
‘쓸데없이 눈썰미만 좋아선.’
어떻게 하면 말없이 둘러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가 먼저 말문을 뗐다. 그와 함께,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서로■ ■굴을 보■ 못■면 오해■ 생기■ 법■니까.]“……?”
[기억■■. 이■ 내■도 꽤 무리■ ■는 일이란■? ■의 심기■ 거스■■ ■■■.]조금 전처럼 뒷부분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정보값이 없는 건 아니니 유추해볼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다른 곳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그의 마지막 대사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시계탑이 서 있던 자리가 칼로 그은 듯 북 찢어졌다. 점점 벌어지는 틈 사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하늘 가득히 천장화의 회로가 펼쳐지고, 오감이 곤두섰다. 세계탑의 구조와 뒤섞인 듯 회로는 내가 보았던 것보다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그 마디마디마다 노이즈가 일어나고, 완벽하던 이음새들이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다.
모두 그 목소리의 소행이었다.
‘세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나를 덮쳐오는 감각의 파도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탐색자의 눈을 얻은 게 후회되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세계를 억지로 비틀고, 조립하는 모습은 그만큼 끔찍했다.
한차현이 문을 열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가 한 것이 설득이라면,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폭압과 강제였다.
[안녕, 어린 장인아.]직, 지직-!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을 동반한 채 나타난 침입자는 사람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자이크 같은 안개를 두르고 있어, 그 이상은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내가 요동치는 세계와 거센 마나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해내자 녀석이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아직 네게는 너무 일렀던 걸까?]“큭, 당신은 누구…….”
[그 답은 알려줄 수 없어. 대신 다른 걸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놈은 지휘라도 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칼로스가, 칼리아가 보이곤 했던 것과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반투명한 창 뒤에 선 녀석이 빙그레 웃었다. 고약한 안개 사이, 언뜻 비치는 입꼬리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알겠지. 이 탑에서 나는 무엇이든 능히 해낼 수 있는 이임을. 그러니 얼른 수락하렴.]“…….”
[고집 없는 장인은 없다지만, 너는 좀 유별나구나.]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평을 남긴 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총총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힘에 압도되어 꼼짝할 수 없었던 나는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개에 뒤덮인 팔이 내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으니 속이 완전히 진탕되겠어.’
그러나 각오했던 것과 다르게, 녀석은 나를 해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제 기운을 불어넣어 내상을 치료해주었을 뿐이다. 각혈이 멈추자, 정중히 물러나기까지 하니. 영문을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멀어진 녀석은 내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의아해할 것 없어. 줄곧 말했지만, 난 널 해할 생각이 없으니까.]치료로 내 마음이 누그러진 틈을 노려야 한다고 생각한 듯 놈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손끝을 까닥까닥 움직이며 회로를 괴롭히니.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피곤해졌다.
[이번 제안도 그래.]“……?”
[내가 뭘 설명한들 믿지 않을 테니까. ……그래, 대신 네가 믿고 따르는 이의 말을 빌려볼까?]괜한 손장난이 아니었나 보지? 문장에 마침표를 찍듯, 녀석의 손가락이 툭 어딘가를 누르자 허공에서 웬 목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 앞으로는 네가 속하지 않은 세상의 회로에 손대지 마. 가호 네가 나를 뛰어넘는 그 순간까지, 절대로. 약속해, 윤가호. 너의 스승인 날 걸고.
나는 단번에 음성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칼로스?’
대사도 낯익었다. 발트하임에 오기 전, 그의 집에서 들었던 것이니까. 이 괴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은 끄덕끄덕 고갯짓하며 스승님의 의견에 편승했다.
[세계관을 초월한 대장장이라고 불리는 이라지? 현명하고, 또 어리석어 가엾은 아이야.]“…….”
[그리고 나 역시도 이번만큼은 그와 같은 의견이란다. 어린 장인아, 너의 잠재력은 인정하는 바이나 아직은 너무 일러. 세계는 너를 용납하지 않을 거야.]이어 그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필연적으로 발트하임의 세계식에 간섭해야 함을 일러주었다. 그만큼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란다.
[모든 일에는 마땅한 순리가 있는 법. 네게 허락되지 않은 곳에 감히 발을 디디지 마라. 끝내는 후회하게 될 테니.]설명하는 내내, 녀석은 나를 애정 어린 말투로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내 손을 부드러이 감싸 쥐며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진심으로 너를 걱정하고 있어.]순종적으로, 아니 그런 척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허, 퍽이나.’
천산에서의 일이 없었다면 껌벅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 고생을 시켜놓고 이제 와서 걱정을 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 못해, 진창에 처박은 주제에 모르쇠를 하니 어이가 없었다. 부조리한 세계탑에 대한 불신도 한몫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로를 이딴 식으로 다루는 장인이 멀쩡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을 리 없어.’
정보를 줄줄 흘려대는 언행 덕분에 알게 되었다. 저놈 역시도 나와 같은 장인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어떤 분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니, 이건 너무 나간 생각이었나.’
뜬구름같은 망상을 휙휙 흩어냈다. 지금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니 추후 칼리아나, 칼로스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
어찌 되었든 저 녀석도 장인이니 알고 있을 것이다. 줄리엣이 만든 이 그림 속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장인의 붓질 끝에 탄생한 회로는 정교하고, 또 애틋하였다.
놈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악스러운 등장은 세계의 구조를 크게 어그러뜨렸다. 불가피한 일이라도 이런 식일 필요는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으리라.
‘내가 아는 걸 저놈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번거로우니까.”
[으응?]“당신과 길게 말해 좋을 것 없을 것 같으니, 딱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놈에게 붙들려 있던 손을 빼냈다. 뒤이어 배려 없는 접촉으로 바닥을 나뒹굴게 된 팔레트를 주워 들었다.
“당신의 눈에 저는 한없이 부족한 이처럼 보이겠죠. 실제로도 그렇고요. 장인이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송구스러운 애송이니까.”
[괜찮단다. 내가 있으니…….]“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도와주지 마세요. 간섭하지도 마시고요.”
[뭐?]“저와 제 세계는 알아서 할 테니 물러나시란 말입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는 녀석이 이곳에 나타나며 생성된 회로를 끊어냈다. 이곳에서만큼은 L급이라 칭해도 될 팔레트가 날 도왔다. 줄리엣의 세계를 망치는 불청객이 껄끄러웠던 것은 이 아이템 역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본 적이 없는 구조의 회로였으나, 의외로 간단했다. 스승님의 집에서 했던 반복 작업 덕분에 회로를 거꾸로 풀어내는 것만큼 자신이 붙은 상태였으니까.
‘할 수 있어. 해내고 말 거야.’
바른 자리를 짚는 손을 따라 회로가 호흡했다. 나는 느껴본 적 없는 일체감에 도취되어 길을 엮고 끊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게 너의 답이니?]“영영 다시 보지 맙시다.”
보이지 않는 붓으로 칠한 듯, 시계탑의 균열이 메워지고 무채색투성이였던 세상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앞의 인영도 점차 흐려졌다.
놈은 저항하지 않고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남겼다. 내가 한 말은 귓등으로 모두 흘린 이다운 대사였다.
[세계의 끝에서 다시 만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