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92
제292화
68. 희붐 (1)
“가호 언니? 언니 맞죠?”
꽃들이 사위지 않도록 양손을 꼭 맞잡고 있던 차태양이 고개를 치들었다.
따뜻하면서도 올곧은 빛. 윤가호가 그의 곁에 다가올 때면 느껴지던 기운과 쏙 빼닮은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지난한 싸움에 땀으로 젖었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멀리서 반짝, 흰빛이 어리는 듯하더니 별안간 웬 화살이 나타나 차태양에게로 날아왔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있죠, 저는 언니가 하는 거라면 다 믿어요.”
“태양아!”
“괜찮아. 아마도?”
차태양은 오히려 가슴을 쭉 내밀어 과녁이 되길 자처했다. 저 빛이 자신을 해칠 리 없다는 강한 믿음이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흰 화살이 가슴팍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어찌나 힘을 주어 쏜 것인지. A급, 아니 S급인 차태양마저도 충격에 주춤주춤 두어 발짝 물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통증은 없었다.
“언니가 나한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다른 일행들이 그의 웃는 낯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태양의 심장에 박힌 화살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작은 열쇠를 삼킨 것 같아. 가슴팍의 옷자락을 꽉 쥔 차태양이 본능적으로 생각한 그 순간.
[장인 윤가호의 고유 회로, ‘침식’의 권한을 양도받으시겠습니까?]존경해 마지않는 길잡이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차태양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에게 새로운 지평이 열렸으니.
너른 하늘을 가득 메운 선과 문자, 방대한 흐름이 불시에 쏟아졌다. 본디 예민했던 감각도 더욱 활짝 열려, 그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물어다 주었다.
“그동안 언니는 이런 세계를 봐 왔던 걸까?”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차태양이 조심스레 불씨를 틔웠다. 호흡마다 느껴지는 세계를 끌어안으며, 주문을 읊조렸다.
“하늘을 뵙고저, 인정과 사정으로 비노니. 가시 문 벗고 극락 문 피리다.”
누구도 상처 입지 않는 세계를.
갈기갈기 찢어져 휘날리던 꽃잎들이 차태양을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너울거리는 불꽃들이 층층이 쌓여 산을 이루니. 소박하나, 위대한 소원이 푸르게 치솟았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타오르던 푸른 불꽃은 이내 높다란 탑의 형상이 되었다. 꽃과 꽃으로 이루어진 푸른 탑이 하늘에게 소원하던 제단과 나란히 섰다. 차태양은 그 앞에서 고이 모았던 손을 펼쳤다.
“다들 이리로 와요.”
어린 영매가 무명천 대신 길게 꼬리를 뺀 불꽃을 흩날리며 춤을 추었다. 그가 물려받은 ‘침식’의 식이 보다 널리 그의 불꽃을 퍼뜨렸다. 영혼들을 붙든 불합리를 불태우고, 자유를 되찾아 주었다.
춤사위를 계속하며 탑을 도는 차태양의 뒤를 따라, 속박을 벗어던진 혼백들이 줄지어 섰다. 점점 길어지는 행렬을 본 한차현이 중얼거렸다.
“탑돌이. 탑돌이구나.”
순간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깊숙이 넣어 두었던 유물 한 점이 한차현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도 딱 들어맞는 상황은 아니지만…… 작은 도움이나마 되기를.”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작은 탑. 먼 옛날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물건이었다.
[특성, ‘온고지신’이 ‘청동 공양탑’의 세월과 공명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과거에 있으니. 마땅히 익히고 이해할지어다.]과거로부터 이어진 기억이 마침내 미래를 기도하는 이곳에 닿으니. 푸른 휘광이 서울 전체로 번졌다. 요란한 풍악이 마침내 꼬인 실타래가 풀렸음을 알리며 법석을 떨었다.
빛이 잦아들 무렵, 꽃잎들이 하나둘 닫히기 시작했다. 탑을 가득 메운 꽃들은 신기하리만큼 쏟아지는 혼백들을 능히 담고도 남았다.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요.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끝까지 혼백들을 달래어 돌려보내는 차태양을 보며 한차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돌보아야 하는 후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의 덕을 톡톡히 봤다.
“그리고…….”
차태양 못지않게 공을 세운 누군가를 떠올린 탓일까. 그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짙어졌다.
분명 지금도 보고 있겠지. 민망해하겠지만 감사 인사라도 남길까. 분명 또 거칠게 얼굴을 쓸어 넘기며 붉어진 뺨을 숨기려고 할 것이다. 서툴기 짝이 없는 회피였다.
“그런 점이 좋은 거지만.”
아, 이 말도 듣고 있으려나?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짓궂은 짓을 해 버렸다.
사과할 양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윤가호의 시선을 찾던 한차현의 얼굴에서 점점 미소가 지워졌다.
“김 서방! 너도 같이 춤…… 히이익! 무서운 표정!”
“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사라졌습니다.”
“뭐가?”
“가호 씨의 시선이,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아요.”
뒤늦게 도착했던 둘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벅댔다. 평소라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을 텐데.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 한차현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아주, 나쁜 예감이 들었다.
사정이 있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해도 자꾸만 심장이 요란하게 쿵쾅댔다. 마치 위기를 알리는 경광등처럼. 이런 식의 흉조는 좀처럼 빗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불안했다.
한차현은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날개를 펼쳤다.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한 차례 햇빛에 노출되었으니,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겠지. 하지만 그렇게라도 살피고 싶었다.
“어어, 김 서방! 어디가!”
“한차현 헌터……?”
“잠시만.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강하게 땅을 박찼다. 별자리를 엮어 만든 연약한 날개가 햇빛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고도를 높였다.
높이 날아야만 한 뼘이라도 멀리 볼 수 있으니까.
무리한 보람이 있게 한차현은 몇 초 만에 종로 인근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윤가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계시는 겁니까?”
이쪽이 아닌 건가. 방향을 틀어 서울역 방향을 확인하려던 순간, 그의 날개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일찍 한계를 맞이하고 말았다. 너무 높이 날아올라 태양이 가까워진 탓이었다.
날개는 별 무리가 되어 흩어지고, 한차현은 그대로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아니, 그럴 뻔했다. 누군가 추락하는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
“죽음이 두려운지 모르는 이가 둘이라. 정말, 볼 만한 파티로군요.”
한차현의 시선은 무례한 구조자보다 그의 팔에 들린 또 다른 이에게 고정되어 옮겨질 줄을 몰랐다. 그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었으니까.
“가호 씨?”
달조차 진 밤의 호수, 자신의 부상을 보았던 그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피에 젖은 윤가호의 낯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뺨은 창백하고, 호흡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옅은 데다가, 감긴 눈꺼풀은 들릴 줄 모르니. 그야말로 산 시체 같은 모습이었다.
“내상입니까? 포션은 왜…….”
“제가 시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실언했습니다.”
모든 파티원이 윤가호에게 유난한 편이었으나, 개중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것이 윤수호였다. 레이드를 위주로 활동하는 S급이니, 상급 포션이 없지도 않을 거고.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는 하나, 윤수호는 윤가호에게 무언가를 아낄 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태가 저 지경인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전부 소용없었던 거지.”
한차현은 설명을 요구했으나, 윤수호는 자신 역시 아는 바가 없다고 무뚝뚝하게 답하며 고도를 낮췄다. 강인한 날개는 세 사람을 순식간에 서울 광장으로 옮겨 주었다.
기척을 느낀 것인지 이강토와 차태양, 소리가 미리 도착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게이트 열렸어요! 그런데 어디……. 언니?”
“피, 피가 나고 있잖아! 너희 뭐 하는 거야! 얼른 김 서방 낫게 해 줘!”
“이런 건 아름답지 못해요.”
윤수호의 품에 안긴 윤가호를 발견하자마자 그들의 얼굴을 물들였던 환희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헌터에게 부상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자리한 모두가 느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선배. 언니가,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아뇨. 아닐 겁니다.”
“부득불 뭔가를 고치는 것 같더군.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화살을 날렸지.”
“윤수호 헌터!”
생각보다 침착하다고 여겼건만. 윤가호의 부상에 제정신이 아닌 윤수호가 차태양이 상처 입을 것이 뻔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한차현이 황급히 끼어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가엾은 후배의 눈시울이 붉어진 뒤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이 파티의 중심을 잡던 것은 윤가호였구나. 울먹이는 차태양을 달래며 한차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이 없어졌을 뿐인데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포션은 소용이 없다고 했죠? 그렇다면 얼른 바깥으로 나가 병원…….”
“왜 그러지?”
“잠시만요. 방금 뭔가 반짝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든 일행을 지휘하려던 한차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천천히 다가가는 그에게 답하듯, 윤가호의 근처에 다시금 작은 빛이 반짝였다.
“모노클?”
정확히는 모노클에 달린 보석.
청보라 색 광물을 손바닥에 얹자, 보석이 정답이라는 듯 마구 빛을 냈다. 그는 어렵지 않게, 이 모노클이 윤가호가 심해의 현자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던 아이템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제게도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신 건가요?”
불행 중 다행으로 그에게는 오랜 시간을 품은 아이템들과 교감하는 스킬이 있었다. 제발.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한차현은 손아귀의 보석을 꾹 쥐었다.